150화 - 150화
프로포즈 전, 내게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다는 말에 나는 나갈 준비를 마치고 라파엘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낯선 길을 따라 달린 마차는 파그라시움 공작령에 도착했다.
다만 내가 내린 곳은 라파엘의 새로운 집이 아닌, 영지의 입구였다.
나는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물었다.
“바로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당신이 이곳을 좋아해 주셨으면 해서 열심히 꾸몄거든요. 자랑할 기회 정도는 주셨으면 해서요.”
마차에서 내리는 날 에스코트해 주며 라파엘이 너스레를 떨었다.
뭐, 그렇게 자랑하고 싶다면 들어 줘야지.
걷는 걸 싫어하는 나지만 오늘은 싫지 않았다. 라파엘이 날 위해 열심히 꾸민 이 영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가 영주이며 영주의 연인이요, 하고 티를 내며 다닐 수는 없었으므로 우리는 영지의 중심에서 떨어진 외곽 쪽으로, 영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을 거닐었다.
그럼에도 난 만족스러웠다.
“깨끗하고 좋네.”
내 말에 라파엘이 싱긋 미소 지었다.
“파그라시움에 마법사들이 많아서 다행이지요. 덕분에 길 정비가 빨리 끝났습니다.”
파그라시움 마법사들이 지금쯤 헥헥대고 있을 모습은 안 봐도 뻔했다.
새삼 유다가 탈출을 꿈꾼 게 현명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다 퇴직금은 정산해 줬어?”
“예. 받자마자 멀리 갈 줄 알았는데 여기에 정착하겠답니다.”
“의외네. 그래도 네가 꽤 잘해 줬나 봐?”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요.”
한때 라파엘과 나는 예상했었다. 유다가 퇴직하면 아마도 달리아를 따라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헤베 영애, 아니지. 달리아 양이 유다의 동행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우리 예상이 틀렸네.”
“그러게요.”
“하긴, 달리아도 이제 남자는 좀 지긋지긋하지 않을까.”
처음 골랐던 남자가 그 모양이었으니, 좀 쉬고 싶을 만도 하지.
‘뭐, 진짜 속마음은 달리아만 알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걸으며 물었다.
“그럼 달리아는 어디서 어떻게 지낼 거래?”
“지금은 자칼리 백작령입니다.”
“자칼리령?”
그곳은 이미 가뭄으로 못 쓰게 된 땅인데? 그런 눈으로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봉사 활동을 하겠다는군요.”
“봉사?”
“예. 그녀 나름 대로의 속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구나. 확실히 달리아만 할 수 있는 속죄가 아닐까 싶다.
그녀가 받은 벌은 작위 및 재산 몰수와 수도 출입 금지령이 다였다. 샬럿이 꽤 신경을 써 준 덕이었다.
그런데 자진해서 지방 곳곳을 돌며 봉사 활동을 한다니.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속죄 방식이다.
라파엘이 생각에 잠긴 내게 물었다.
“달리아 양과 떨어지게 되어 아쉽습니까?”
“설마.”
“두 분이서 친구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러기에 서로 이미 못 보일 꼴을 너무 보이지 않았어? 친구가 되기엔 꿈도 못 꿀 온갖 저주와 욕도 퍼부은 사이고.”
라파엘은 내가 아쉬워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지금 이 관계에 만족했다.
나와 달리아의 관계는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나중에 만난다면 그냥 잘 지내는구나, 하며 인사도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갈 사이 정도가.
유다와 달리아의 근황까지 듣고 나니,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재잘재잘 라파엘에게 물었다.
“오베론은 방 뺐대? 카밀라는?”
“오베론은 샬럿 폐하께 작위를 몰수당했습니다. 선대 후작을 죽인 것을 빌미로요. 모건 후작은 파그라시움을 나와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더군요. 테일러 영애와 여전히 죽이 잘 맞는 모양입니다.”
“그 둘이 친하게 지내는 거는 진짜 의외란 말이야. 서로 머리채 잡은 게 엊그제 같은데.”
“저도 신기합니다. 뭐,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라고도 하니, 어느 정도 납득은 가능하지만요.”
“반대 아냐?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
“뒤집어서도 성립할 수 있는 법 아닙니까.”
하긴, 맞는 말이지.
어느새 우리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도달했다. 나는 라파엘에게 찰싹 달라붙어 다리를 건넜다.
“그럼 이제 우리 귀염둥이 근황이나 좀 물어볼까.”
라파엘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귀염둥이요?”
“너 말이야.”
귀염둥이……. 라파엘이 그렇게 말을 흐리며 난처해했다. 귀여워 보이는 건 싫은가.
‘왜지. 귀여운 게 짱인데.’
멋있어 보이는 건 어느 순간에라도 확 깰 수 있지만 귀여움은 오래 가는 법이니까.
그 예시로 금희가 있다. 금희는 눈을 뒤집어 까며 침을 흘리고 자도 귀엽지만 사람은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여전히 심란해 보이는 라파엘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
“아무튼. 공작이 되니까 어때?”
라파엘은 아까와는 다른 침묵을 유지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얼떨떨합니다.”
“그래?”
나는 왜냐고는 물어보지 않았다. 라파엘이 공작이 된 건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했으니까.
다리를 다 건널 때쯤, 라파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개운합니다. 음지에 숨어 있다가 양지로 끌려 나온 것과 다름없는데도, 이상하게 싫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라파엘은 정말로 개운해 보였다.
항상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보이지 않던 그늘이 벗겨진 듯한 상쾌함이 보였다.
괜히 코끝이 찡해진 나는 히죽 웃으며 라파엘의 팔을 콕콕 찔러 댔다.
“들은 바에 의하면 영지민들이 너 엄청 좋아하던데.”
“제가 황자니까 그런 것에 불과하겠지만요.”
“그런 것도 있겠지만, 네가 그사이 영지에 신경을 많이 써 줘서 그런 거 아닐까?”
의아한 라파엘의 모습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리 건너 보이는 영지를 내다보며 말했다.
“듣기로 이 영지, 파그라시움령이 되기 전까지는 수도 인근에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주인이 없어서 꽤 엉망이었다고 들었어.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을 봐.”
물과 길은 깨끗했고 사람들은 활기를 띠었다. 파그라시움에서 무력을 행사하던 자들은 모두 영주 소속의 경비들이 되었으니 치안도 확실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영주가 돈 쓰는 데 인색하지를 않았다.
내가 보기 거슬리지 않도록 집집마다 보수 공사를 한 건 물론이며, 길거리 쓰레기조차(그것이 물체든 사람이든) 나돌아다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는데, 영지민들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살기 좋아진 거다.
“이런 영주를 어떻게 안 싫어해?”
“……당신이 그렇게 말해 주니 조금 쑥스럽군요.”
라파엘은 그저 나를 위해 꾸민 거라고 하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다.
“이제 여기는 이제 널 좋아하는 사람들로만 가득 찰 거야. 무엇보다 널 해칠 마음을 먹을 사람은 더 이상 없지. 나는 그게 가장 기뻐.”
나는 라파엘의 양손을 잡고 감회에 젖어 말했다.
그러자 라파엘이 내 손을 꼬옥 맞잡으며 대답했다.
“……당신 덕분입니다.”
“나? 한 것도 없는데.”
라파엘에게 지위를 준 건 내가 아닌 샬럿이니까. 내가 주고 싶어도 작위도 없는 공녀가 후작님께 줘 봤자 뭘 줄 수 있겠나.
그런 얼굴로 라파엘을 보니, 라파엘은 말하지 않은 내 뒷말을 읽은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있기에 저의 지금이 있는 겁니다.”
“……?”
나는 곰곰이 내 존재가 무엇을 했는지 떠올렸다.
그러니까, 라파엘이 본래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게 해 준 건 내가 아닌 샬럿이라니까?
‘음, 여기서 조금 더 확대 해석을 하자면 내가 샬럿을 불러오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결국 샬럿을 끌어온 건 라파엘이었다.
여전히 내가 뭘 했는지 모르는 나를 보며 라파엘은 키득키득 웃으며 답을 말해 주었다.
“당신이 처음 나타날 때부터 제가 스스로 정한 규칙들이 깨졌어요.”
“……황실이랑 안 엮이겠다는 거?”
“네. 저는 절 지켜 줄 파그라시움을 해체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하루빨리 황제가 황위에서 내려오고 평생토록 내 존재에 눈치채지 못하기를. 그것만을 바라 왔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나타났어요. 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채 마음을 졸이며 숨어 있던 당신이 나를 끄집어내, 이 자리에 앉혀 놨어요. ……그 결과, 당신이 제게 여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평안함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이블린.”
라파엘의 눈동자가 푸른 호수처럼 일렁였다.
머쓱했던 것도 잠시였다. 그동안 라파엘이 고생했던 것들이 드디어 보상 받았다고 생각하니 그저 기뻐서, 나는 라파엘을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나도 고마워. 네가 있어 줘서.”
내 대답에 라파엘이 눈을 접어 웃었다. 수줍어 보이기도 했고, 기뻐 보이기도 하는 웃음이었다.
라파엘이 내게 물었다.
“그럼 갈까요?”
“응.”
우리는 이제 마지막 종착지로 걸음을 옮겼다.
마차를 타고 달려오는 내내,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하는 동안 푸르른 초목과 꽃향기는 내 코를 간지럽혔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차에 내려서는 더한 설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잘 정돈된 벽돌 길, 상쾌한 물을 뿜어 대는 커다란 분수, 입구부터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천사상, 분홍색 보라색 장미가 만발한 정원,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셀레스티안 저택의 아침을 그대로 옮겨 둔 듯한 저택까지.
거기에 나와 라파엘을 환영하는 듯, 바람은 싱그럽게 바뀌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내가 저택을 둘러보는 모습을 지켜보며 라파엘이 자신만만하게, 하지만 조금은 불안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픽 웃었다.
“마음에 들다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취향 발굴사. 어둡고 칙칙한 프라비체의 저택도 마음에 들지만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런 저택이라면 얼마든지 저절로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어질 것이다.
라파엘은 안심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정원을 거닐었다.
장미의 향긋한 내음 사이사이, 라파엘에게서 나는 향기처럼 시원한 민트향이 섞여 있었다.
장미 아치를 통과한 산책로 끝에는 티 타임을 가질 수 있는 둥근 지붕의 하얀 가제보가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라파엘은 성큼 내 앞에 다가서더니 물었다.
“이블린. 제게 반하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지. 공녀님이나 반하지 말라는 말도 기억하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자의식 넘치게 서로에게 반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던 나와 라파엘은, 지금 사랑을 약속한 연인으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이제 프로포즈 하려고?”
나는 장난스레 물었다. 라파엘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신경을 쓴 곳은 저택 안에 있지만, 아무래도 이곳이 좀 더 무드 있지 않을까 해서요.”
“좋아. 해 봐.”
내 허락에 라파엘은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내 내게 열어 보였다.
라파엘은 나를 올려다보며 내게 약속했다.
“당신의 곁에서 함께 늙어 가는 영광을 부디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당신이 평생 안심하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기둥이 될 것이고, 당신을 안온하게 해 주는 지붕이 되겠습니다.”
라파엘이 내게 영롱한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내밀었다.
“부디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책 너머로, 혹은 드라마로 많이 봐 온 그 장면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미 내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으면서, 라파엘의 눈에서 미묘한 긴장이 보였다.
웬만하면 여기서는 눈물을 흩뿌리며,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바로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괜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미 우리집에서도 그러고 있는데?”
내 장난에 라파엘은 웃음과 함께 긴장을 날려 버리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능숙하게 받아쳤다.
“그곳에 없는 게 하나 있잖습니까.”
“뭔데?”
“당신을 평생토록 사랑하고 따를 미남이요.”
“푸흡.”
“거기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미남입니다. 그래도 거절하시려고요?”
“아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졌다. 내가 졌어. 어차피 이길 생각도 없지만 이런 유혹을 어떻게 뿌리치겠어.
나는 한참 뒤에야 웃음을 수습하고 라파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는 이곳에서 평생토록 너만 사랑하고 부려 줄 미녀가 되어 볼까.”
“영광입니다.”
반지는 약지에 꼭 맞았다.
나는 눈물 대신 웃음을 흩뿌리며 라파엘에게 안겼고, 그는 나를 들어 올려 빙글 돌았다.
아, 어지럽다.
돌아온 이래로 가장 어지럽고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