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149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나는 불안하게 샬럿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안심하라는 시그널인 것 같은데 그게 더 불안하다는 걸 본인만 모른다.
라파엘 역시 대본에는 없는 상황에 섣불리 나오지 않고 오도카니 있으니 샬럿이 재차 명했다.
“라파엘 셀레스티안. 앞으로.”
“…….”
샬럿을 푸대접하는 건 셀레스티안 저택에서나 가능했지 여기서는 불가능했다. 라파엘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와 계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샬럿은 높은 목소리로 라파엘을 치하하기 시작했다.
“짐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은 건 너와 프라비체 공녀의 공이 크다. 짐은 지금 매우 기분이 좋아. 그러니 새로운 황제의 권한으로 네 잃어버린 직위를 되찾도록 해 주겠다.”
“……?”
또 뭔데?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나와 라파엘을 번갈아 보는 것이 느껴졌다.
가족들 역시 ‘잃어버린 지위라니?’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데미안 공과 간통한 게 선대 셀레스티안 후작이라는 건가?”
“친자가 바꿔치기 당했다잖소. 그럼 설마 셀레스티안 후작이 폐하, 아니, 선대 폐하의 친자…….”
귀족들의 수다가 끝나기도 전에 샬럿은 확실히 라파엘의 신분을 밝혀 주었다.
“선황제의 친자이면서도 데미안 폐후의 계략으로 폐태자의 친모에게서 길러진 불쌍한 황자여.”
“……!”
율리시즈가 사생아라고 밝혀질 때와는 다른 파급력이었다.
귀족들의 머릿속은 지금 자신들이 라파엘을 은근히 깔보고 무시했던 만행들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것을 즐기듯 샬럿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높아졌다.
“황자이면서도 자신이 부정한 핏줄이라 생각하고 지냈을 그 긴 세월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아마도 셀레스티안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기도 역하겠지.”
라파엘이 등을 지고 무릎을 꿇은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무슨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멋대로 이 사실을 밝힌 샬럿에게 화가 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샬럿에게 단단히 뭐라고 해 줄게, 라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그런 네게 심심한 위로를 담아 새로운 영지와 작위를 하사하겠다.”
“……!”
“라파엘 파그라시움 공작. 어때, 새 이름이 마음에 드나?”
라파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나 역시 손을 움찔거렸다.
라파엘이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안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라파엘은 샬럿의 상을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셀레스티안령은 파그라시움령에 귀속될 것이며 앞으로 파그라시움 공작은 황자로서의 예우와 혜택을 받을 것이다.”
지금 샬럿의 말은, 라파엘은 이제 안전하다는 샬럿식의 위로인 것 같았다.
샬럿은 라파엘을 안쓰럽고 대견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랜 시간, 네게 처해진 상황이 가혹했을 텐데도 평판이 아주 좋더구나. 상을 받아야 마땅해. 이 시간부터는 짐이 그대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겠다.”
찡긋, 말을 끝마친 샬럿이 나를 향해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이제야 그녀의 옛 말뜻을 이해했다.
‘밀어 준다는 게 이런 뜻이었냐고.’
확실히 라파엘이 이렇게 영향력 있는 공작이 된다면 집안의 반대도 전보다 심하진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우리 가족들 모두가, 보기 흔치 않은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라파엘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한숨과 함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번만큼은 진짜 고마워해야겠네.’
황제의 공식적인 지지는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영광을 되찾은 라파엘의 등에 대고 미소를 보냈다.
* * *
즉위식 날 벌어졌던 소동은 한동안 신문 1면에 실렸다.
[충격, 율리시즈 폐태자의 추악한 얼굴.]
[달리아 폐태자비, 자백으로 징역형은 피해 갔으나 자신 역시 폐태자와 공범, 벌을 달게 받고 수도를 떠나겠다.]
[달리아 폐태자비의 충격적인 결혼생활 실토, 폐태자는 늘 자신을 폭행해 왔다.]
[선황제의 잃어버린 친자, 파그라시움 공작위 받다.]
벌써 일주일째 같은 소식이었다.
‘이야, 우리가 신문사 먹여 살리겠네.’
이만하면 그만 우려먹을 때도 됐는데.
하지만 하나만 터져도 재밌는 사건이 여러 개나 우수수 터지니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길거리에 나가면 모두가 그 소리를 한다.
샬럿 황제가 어미와 함께 자신의 진짜 동생을 구했으며, 은혜도 모르는 들개는 처단했다고.
라파엘에 대한 찬사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 굳은 세월을 꿋꿋하고 지조 있게 버텨 내다 못해 청렴한 귀족으로서 이름을 떨친, 역사상 가장 푸르른 황자라고.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소문은 여전하다.
라파엘이랑 약혼한 게 이상하다 했는데, 설마 다 알고 약혼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었다.
뭐, 이블린 프라비체의 평판은 애초부터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그렇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나도 샬럿을 황위로 올린 사람 중 하나인데.
‘뭐, 샬럿도 나를 좋아하는 티를 대놓고 내준 덕에 나한테 기어오를 사람은 없지만.’
지금 수도에는 새로운 황제가 보낸 다과회 초대장을 프라비체 공녀가 받는 족족 차 버리고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웬일로 맞는 말이었다. 아까도 샬럿의 초대장을 받았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라파엘도 못 보는데 샬럿 얼굴을 보는 건 내키지 않지, 아무래도.’
황궁에 가 봤자 라파엘도 없고, 샬럿은 날 가지고 인형 놀이나 할 텐데.
라파엘은 새 영지와 작위를 받으며 전보다 더 바빠졌다.
가끔 나누는 편지에 의하면 라파엘은 지금 파그라시움령에 내려가 있는 것 같았다. 영지를 인계받느라 바쁘다고 한다.
암흑가도 일부만 남기고 해체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작령의 새로운 일꾼으로 취직시킨다나.
나만 빼고 모두가 바빴다.
‘아, 따분해…….’
평화롭지만 심심해 죽을 것만 같은 일상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신문에는 드디어 새로운 소식이 실렸다.
[폐태자, 지하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다.]
율리시즈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신문을 가까이하고 기사를 자세히 읽어 내렸다.
[간수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황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폐태자비와 프라비체 공녀를 원망하고 있었다. 샬럿 황제가 다녀간 이후부터는 그녀와 라파엘 파그라시움 공작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망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못 이긴 건지 다음 날 스스로의 옷으로 끈을 만들어 목을 매단 뒤였다고 한다.]
……이렇게 죽었구나.
아무래도 샬럿이 지하 감옥에서 율리시즈의 속을 단단히 긁은 모양이었다.
율리시즈가 안쓰럽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새삼 신기하네. 자기반성은 하나도 안 하는 게 선황제랑 그렇게 똑같은데, 친모자가 아니라니.’
뭐, 피가 이어지지 않았어도 길러지는 동안 황제에게 성격이 옮은 걸지도 모르겠다.
친구조차 잘 가려 사귀지 않으면 행실이 옮는다는데, 모자로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했으니 어련할까.
문득 옆에서 같이 신문을 보고 있던 헨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블린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니? 후작, 아니, 공작이 황자였다는 거 말이야!”
“아, 중간에 알게 됐다니까. 이 아저씨가 물어본 걸 몇 번이나 물어보는 거야.”
“아니이, 아빠는 궁금해서 그러지!”
“왜, 황자라니까 나랑 라파엘을 적극 밀어 주고 싶어졌어?”
나는 은근슬쩍 헨리를 떠보았다. 그러자 헨리는 기함을 토하며 결사반대를 외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황제가 아니라 황제여도 아빠 눈에 안 차면 안 돼!”
“할아버지 눈에는 차는 것 같던데.”
피에르는 이미 라파엘을 손녀사위로 인정한 것 같았다. 그는 소국의 왕자였는데 라파엘은 황자라고 하니, 자신보다 훌륭한 신랑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에 비해 헨리는…….
“장인어른 눈에 차도 아빠 눈에 안 차면 안 돼! 아빠 눈에는 한참 부족해! 아빠가 널 얼마나 금지옥엽으로 키웠는데, 암흑가 운영하던 놈한테는 절대 못 맡겨!”
이것이 바로 동종업계 혐오일까. 아니면 가혹한 처가살이의 산물일까.
만약 라파엘이 우리집에 들어온다면 헨리가 라파엘을 잡아도 단단히 잡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파엘을 데릴사위로 데려오는 건 안 되겠네.’
물론 그럴 생각도 없지만.
내가 한 귀로 흘려듣는 시늉을 하자, 헨리는 답답한지 가슴을 치며 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블린, 제대로 알아들었니? 아빠는 아직 결혼 허락 못 한다니까?”
나는 킥킥 웃으며 네네, 그러시겠지요, 를 반복했다.
헨리가 허락 안 해도 내가 좋다면 그의 반대는 얼마 가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파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3주째가 되던 아침이었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언제나처럼 소피가 나를 깨우러 왔다.
그런데 일어나기엔 아직 이른 시간 같은데? 나는 눈을 비비며 잠투정을 했다.
“아, 왜애. 몇 신데.”
“11시입니다.”
뭐야. 아직 11시밖에 안 됐는데 깨운 거였어? 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렸다.
“두 시간만 더 잘래.”
“파그라시움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도요?”
뭐. 누가 기다려?
잠이 순식간에 싹 달아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소피에게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야? 거짓말 아니지?
소피는 대답 대신 내게 빗과 가운을 내밀었다.
화아악,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눈이 반짝거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부랴부랴 가운을 걸치는 동안 소피는 빠르고 능숙하게 내 머리를 빗어 주었고, 나는 가운을 여미자마자 방을 뛰쳐나갔다.
라파엘이 왔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응접실에 도착하고서도,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단정하게 정리해 풀어버린 박하색 머리카락, 햇살에 반짝거리는 푸른 눈.
거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걸친 라파엘이 긴 다리를 자랑하며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라, 라파엘?”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라파엘을 불렀다.
그러자 라파엘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블린.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이른 시간에 와 버렸는데, 제가 단잠을 깨운 것이 아닐지 염려되는군요.”
“이……!”
순간 울컥한 것은 왜일까. 아마도 라파엘과 별일도 없는데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내 잠을 방해했다고 걱정하는 라파엘이 사랑스러웠고.
나는 마치 금희처럼 라파엘에게 답삭 안겼다.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라파엘은 나를 가뿐히 받아 주며 옅은 웃음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이블린. 샬럿 황녀, 아니지. 황제 폐하께서 제게 떠맡기신 일들이 끝나야 말이죠.”
“오늘은 무슨 일이야? 드디어 시간 난 거야?”
“예. 이제 좀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라파엘이 말끝을 흐리더니 두 눈을 곱게 휘었다.
순간 나는 그의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 밑에 깃든 계략을 엿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라파엘이 두 눈을 곱게 휘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전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프로포즈. 오늘 다시 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