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147화
“나오셨습니까, 전하.”
달리아는 율리시즈의 마지막 자비로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동안 시녀들은 달리아의 얼굴과 몸에 든 멍을 보며 서로 눈치를 보았지만 달리아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말을 얹기까지 했다.
“화장 너무 진하지 않아?”
“하지만 얼굴에 든 멍을 가리려면…….”
시녀장이 앞장서서 대답했고, 달리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빤히 관찰했다.
감상평은 딱 한 줄이었다.
‘안 어울려.’
진한 화장도, 걸친 옷도. 전부 다 어울리지 않는다.
왜 이렇게 맞지 않는 것에 집착했을까?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라더니 틀린 말이 없다.
그 순간, 달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전하. 아직 단장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시 앉아 달라며 부탁했지만, 달리아는 오히려 그녀에게서 붓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팔레트에 있는 수많은 붉은색 중 아무거나 대충 치덕대더니, 성의 없이 입술 위에 직직 긋고는 물었다.
“이제 됐지?”
“…….”
다들 황태자비의 미친 행보에 말을 잃었다.
아무리 율리시즈의 총애를 잃었다 해도 그렇지, 그를 망신 줄 셈인가?
저 꼴로 달리아를 나가게 한다면 자신들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시녀장이 나섰다.
“전하, 제발 체통을…….”
“체통?”
달리아가 헛웃음과 함께 물었고 시녀장이 흠칫했다.
뒷배도 뭣도 없는 황태자비의 눈빛은 싸늘하게 굳다 못해 더 잃을 게 남았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달리아는 잃을 게 없었다. 그 탓에 앞날이 아직 창창한 시녀장은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 말도 돌려줄 수 없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얼어붙은 시녀들의 모습에 만족한 달리아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좀 더 헝클어졌으면 좋겠는데.
즉위식이 끝나면 어차피 자신은 이제 다시는 수도에 발을 디딜 수 없다.
헤베 백작위는 나라에 귀속될 테니 귀족으로서 살 수도 없다.
잃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율리시즈를 더 우스운 꼴로 만들 수 있을까.
그때였다. 달리아는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 버리고는 손수건에 화장수를 묻혀 제 얼굴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저, 전하!”
그에 그치지 않고 달리아는 언젠가 화장대 서랍을 뒤졌다.
‘다행이다, 아직 있었네.’
달리아가 서랍에서 꺼낸 건 날이 잘 선 가위였다. 시녀들은 거의 졸도 직전이었다.
“어, 언제 그걸…… 제발 내려놓으십시오!”
“황태자 전하께서 아시면 저희는……!”
“괜찮아. 너희들이 모시는 황태자는 오늘로 끝이니까.”
달리아는 마치 노래하듯이 대답하고서는 날이 잘 선 가위를 들고, 자신의 머리를 한 움큼 잡았다.
‘……그 자식이 날 좋아한 건 내 반반한 얼굴 때문이 컸지.’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헝클어진 머리, 지워진 화장 탓에 드러난 멍, 번진 입술까지. 미친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달리아는 피식 웃었다.
‘깜짝 놀라겠지.’
이왕이면 뒷덜미도 잡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러고는 머리카락에 가위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율리시즈와의 인연을 끊을 준비를 했다.
‘마지막 선물이에요, 전하.’
주목 받는 걸 좋아하시니 이 선물이 마음에 들 거예요.
싹둑. 달리아의 발치로, 은색 머리카락이 비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 * *
드디어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던 즉위식 날이 찾아왔다.
모처럼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가족들은 나보다 더 빨리 준비를 마치고 홀에 모여 있었다.
“일어났니, 이블린?”
“일찍 일어났구나.”
“우리 손녀, 웬일로 부지런하기도 하지.”
오늘도 여전히 대가족이었다.
참고로 아직 오르페시아와 피에르는 드와이로 돌아가지 않았다.
전부터 율리시즈가 망하는 꼴은 보고 돌아가야겠다고 강한 의사를 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당연히 일찍 일어나야지.”
나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가족들에게 공들여 꾸민 모습을 자랑했다.
“어때? 오늘 엄청 신경 썼는데.”
“이블린, 넌 언제나 예쁘지.”
“……괜찮군.”
아실과 더글러스는 예상 내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타라와 헨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 목걸이랑 귀걸이…….”
“어? 아, 이거.”
나는 그들의 말에 내 목걸이와 귀걸이를 매만지며 살풋 웃으며 손가락을 펴 보였다.
“반지까지 하고 나왔어. 엄마 아빠가 나 성인식 기념으로 사 준 거잖아. 내가 그때 얼마나 기뻤…… 아.”
나는 아차 했다. 이미 다들 내가 이블린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너무 이블린인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타라와 헨리는 물론이며 아실과 더글러스까지 짚이는 게 있는지 멍한 얼굴을 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오르페시아만이 묘한 웃음을 띤 채 내게 다가오더니, 나한테만 들릴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을 다 되찾은 모양이구나.”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타라와 헨리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한참 뒤에 타라가 조심히 내게 다가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데, 설마 네가 정말…….”
뒤에 이어지는 질문은 굳이 타라가 입으로 꺼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헨리가 눈물을 글썽이려는 모습에 나의 두 형제도 긴장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르페시아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너는 진짜 이블린이 될 수는 없지. 그럴 필요도 없어.’
어쩌면 오르페시아는 내가 이블린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걸까? 뛰어난 흑마법사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내가 이블린이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우리 가족은 이미, 이블린을 완전히 떠나 보냈으니까.
‘그리고 나도…….’
나는 이블린의 기억을 되찾은 김금희일 뿐이다. 좋든 싫든 나는 다른 삶을 경험하다 왔고, 그 탓에 우리 가족이 애지중지 키운, 그들만의 ‘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서로에게 작별을 고했는데 다시 만나는 건 좀 뻘쭘하지.
그랬기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치미를 똑 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리고는 어색하게 얼버무리고는 가족들을 재촉했다.
“그보다 얼른 가자. 이러다 또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하겠어.”
사실 지각을 좀 한다 해도 프라비체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네 사람의 집요한 시선에 등이 따가워, 나는 발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우리 가족을 울리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 울면 복 날아가니까.
* * *
날은 더할 나위 없이 쾌청했고, 상드리움의 수도 르샹트 한가운데 우뚝 선 황금빛 성은 오늘도 눈이 멀 것 같은 반짝임을 자랑했다.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기대하는 제국민들의 인파로 황궁은 근처 마을까지 북적였고, 기사들은 이후 있을 퍼레이드에 대비하여 황궁부터 시내까지 이어지는 길을 지키고 있었다.
중앙 귀족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걸치고, 이후 연회에서 바칠 선물을 마차에 싣고 황궁에 모여들었다.
“프라비체 공작가, 입궁 확인했습니다.”
우리 프라비체 일가는 거의 마지막에 입궁했다.
즉위식이 거행될 장소는 제3경합 파티 때 쓰였던 홀로, 일전에 황제가 쓰러졌던 그 홀이었다.
‘배짱도 좋아.’
자기 묫자리는 또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여기로 골랐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앞쪽도 뒤쪽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 라파엘이 보였다.
‘찾았다!’
라파엘도 나를 알아보고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돌린 채 입 모양으로 라파엘에게 물었다.
‘라파엘, 황제랑 샬럿은?’
그러자 라파엘은 싱긋 웃더니 내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못 알아먹겠네.’
슬프게도 나는 라파엘처럼 입 모양만 가지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재주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난처해하는 내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라파엘은 이번에는 짧게 두 음절을 입 모양으로 알려 주었다.
‘유, ……다?’
고개를 돌려 보니 단상 아래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마법사 하나가 보였다.
‘아. 유다한테 맡겼구나.’
이번에는 알아들었다.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웃어 보이니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내 주의를 끌었다.
“크흠, 큼.”
“앗.”
고개를 돌려 보니 헨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잊고 있었다. 나 지금 가족들이랑 같이 있지. 나는 머쓱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변명했다.
“사랑 얘기 나눈 거 아냐. 일 얘기 나눈 거야.”
그러자 헨리가 눈물을 왈칵 터뜨리며 소리쳤다.
“아빠는 반대야!”
헨리를 시작으로 가족들의 반대가 줄줄이 이어졌다.
“엄마도.”
“오빠도.”
“오라비 놈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는 찬성.”
“……?”
할아버지는 뭔데 찬성인데.
모두가 그런 얼굴로 피에르를 어이없게 바라보니 피에르가 추억에 젖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생겼는데 왜 그래요. 잘 골랐다, 이블린.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봐야지. 아주 할아비 젊은 시절을 똑 닮았구나.”
“이 사람이! 당신 젊었을 적이 훨씬 더 잘생겼어!”
오르페시아의 반박에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라파엘이 더 잘생기지 않았을까.’
나는 피에르의 젊은 시절을 모르지만, 알았어도 라파엘이 더 잘생겼을 거다.
우리 가족이 모여 있는 자리는 대뜸 사윗감에 대하여 100분 토론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풉, 못 말린다니까. 누구 가족인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게 우리 가족다워 웃음이 나온 그 순간이었다.
“다들 정숙.”
즉위식을 주관하는 대사제의 말에 아무리 우리 프라비체라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홀이 조용해지자 대사제는 식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율리시즈 에트왈 상드리움 황태자 전하의 상드리움의 24번째 즉위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율리시즈 에트왈 상드리움 전하 드십니다!”
쾅.
홀의 입구가 활짝 열리며 화려하게 단장한 율리시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율리시즈의 옆에 있어야 할 달리아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 어디 갔지?’
설마 죽었나? 나와 비슷한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잡음이 소란으로 번지기 전에 대사제가 알렸다.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사정으로 인해 즉위식에 불참하심을 알립니다. 그럼 율리시즈 세인트 상드리움 전하께서는 계단 앞으로.”
율리시즈가 귀족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당당히 붉은 카펫 위를 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순간이었다.
“……!”
율리시즈가 나를 비웃었다. 마치 내 계획은 다 제 손안에 있다는 듯 말이다.
‘저 자식이…….’
달리아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입술을 악물고 율리시즈의 뒤통수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계단 앞에 다다라 계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길고 긴 연설은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설마 달리아를 죽인 건 아니겠지.’
달리아가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 율리시즈라면 분명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달리아를 끌고 세웠어야 했는데.
어느새 연설은 끝나고 대사제가 율리시즈의 머리 위에 황금관을 얹어 주었다.
“그럼 새로운 황제 폐하께서는 계단을 올라 착석해 주십시오.”
율리시즈는 기다렸다는 듯 계단을 올라갔다.
빨리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 율리시즈는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 황금 옥좌 앞에 다다랐다.
이제 율리시즈가 저 단상 위 황금 옥좌에 앉으면 율리시즈는 이제 정식으로 황제가 된다.
‘예정대로라면 공범인 달리아가 먼저 내부고발을 해야 했지만…….’
급한 대로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고발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들여보내 주세요!”
홀의 입구에서 절박한 목소리가 모두의 주의를 빼앗았다.
사람들의 고개가 율리시즈로부터 홀의 입구로 돌아갔고, 거기에는 입구를 막고 있는 기사들과 실랑이하는 달리아가 있었다.
“허업.”
달리아를 본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틀어막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 달리아 꼴이 왜 저래?’
달리아가 살아 있었다는 안도는 잠깐이었고, 그녀의 몰골을 보고 나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길고 고왔던 은색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잘려 있었으며, 얼굴에는 울긋불긋한 멍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옷마저 여기저기 너덜너덜했다.
귀족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절대 설 수 없는 몰골을 하고서도 달리아는 겨우 기사들을 밀치고 홀 한가운데로 달려와 소리쳤다.
“나, 달리아 헤베는 율리시즈 황태자와 같은 죄를 지은 공범으로서 그의 죄를 폭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