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146화
내가 프라비체 저택에 도착한 건 오후 세 시가 다 되어서였다.
“다녀왔…….”
“이블린!”
“왜 이제 와!”
저택 문을 열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우리집 최강 팔불출 두 남정네들이 나를 품에 끌어안고는 폭풍 잔소리를 쏟아 냈다.
“얘가, 얘가, 정말! 엄마 아빠 걱정되게 왜 이제야 집에 들어와!”
“맞아! 요즘 세상 얼마나 험한 줄 알아!? 외박으로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사흘에 한 번은 집으로 들어와야 할 거 아냐!”
우리 집 남정네들 목청 좋네. 양쪽에서 내 등짝이라도 칠 기세로 소리를 질러대니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죄인은 나다. 프라비체의 귀염둥이 악당 신분으로 열흘이나 집을 비운 죄를 잘 알고 있는 나는 마지못해 소리쳤다.
“아, 미안해! 그래도 다른 데도 아니고 라파엘네 있다 온 거거든!”
“그게 문제인 거야, 그게!”
“남자들은 다 못 믿는다니까!?”
저기, 댁들도 남자 아닌가요?
내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니 아실이 답답하다는 듯 참다못해 소리쳤다.
“그 라파엘이라는 놈이 너한테 흑심 품고 있는데 어떻게 안심을 해!”
휘이. 나는 슬며시 아실의 눈을 피하며 작게 휘파람을 불렀다. 그러자 헨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알고 있었니, 딸?”
“……당연하지.”
“알면서도, 붙어 다닌 거야……?”
라파엘과 사귀게 되다 못해 프로포즈까지 받을 뻔했다는 말은 잠깐 비밀로 하기로 했다.
만약 시끄러운 두 남정네 귀에 들어간다면 나는 정말 신랑 없는 결혼식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이들이 누군가. 눈치 백단 대회라도 열리면 나란히 1등상 2등상을 타 올 헨리와 아실이다.
실시간으로 작아지는 동공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 그래도 걔가 막 나한테 함부로 손댈 사람은 아니잖아?”
“이, 이블린 너 설마!”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너, 너어어! 바른 대로 말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망했다. 숨기려다가 더 망했다.
내게서 나는 아주 수상한 냄새를 맡은 헨리와 아실이 뒷덜미를 잡았다.
어떡하지.
‘튈까?’
이러다가 내가 라파엘과 사귀게 됐다는 사실까지 불어 버릴 것만 같아 냅다 도망을 가려던 그때였다.
애애애앵!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보니 홀로 내려오는 계단 가장 위쪽에서 꼬랑지를 바짝 든 금희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희야! 내 천사 같은 동생!”
순간 금희가 수호천사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금희는 악마 모드였다.
애애애애애애앵! 우다다다, 금희는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와서는 내 다리에 머리 박치기를 시전했다.
“어억.”
“이블린!”
사람들은 알까?
상드리움 최강 흑마법사 귀염둥이 사랑둥이 악녀인 이블린 프라비체도 금희에겐 쪽도 못 쓴다는 사실을.
“아악, 금희야아. 아파, 살살해 줘.”
나에게 치명상을 입혀 놓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금희는 끊임없이 날 패며 사이렌 소리를 냈는데, 언어는 달라도 알 수 있었다.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야 기어 들어왔냐는 욕이었다.
결국 나는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부지런히 금희의 뺨과 턱밑을 긁어 주며 사과해야만 했다.
“언니가 미안해~ 그래도 욕은 하지 말고옹. 응?”
와오옹!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금희가 나를 꾸짖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매애앵 매애앵 바이브레이션까지 넣어 가며 나를 꾸짖었다. 도대체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겠다.
금희가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내 얼굴은 금희가 튀긴 침으로 흥건했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사실 상대가 금희라면 큰소리를 낼 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 결국 나는 쭈그려 앉아 금희의 잔소리를 전부 다 귀담아들어야만 했다.
애오오옹.
“아, 아야. 말로 해, 말로. 교양 있게 굴자, 우리.”
조금이라도 소홀히 듣는 티가 나면 금희의 커다란 솜방망이가 사정없이 내 무릎을 후드려 팼다.
내가 가만히 털리고 있는 모습이 불쌍하지도 않은지 아실은 옆에서 한술 더 떴다.
“금희 쟤, 이블린 네가 없는 동안 얼마나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시끄럽게 울어 댔어.”
“심지어 밤에는 엄마 아빠 자는 침대에까지 기어 들어오더라! 덕분에 옷이며 침구며 아주 털 난리야!”
헨리 역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묘하게 입꼬리가 씰룩이는 게, 금희와 있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나 보다.
그 모습에 아실이 질투심을 불태웠다.
“너무해, 내가 같이 자자고 할 때는 모른 체하더니!”
<금희> 고양이 용품점 오픈할 때부터 알아봤는데, 아실도 엄청난 애묘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고양이는 자기한테 귀찮게 치대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열이 자기보다 낮다 싶으면 무시하는 깜찍한 것들이기도 하고.
‘아실이 자기보다 아래로 보였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금희는 아실을 무시하고 헨리 쪽으로 다가가 왜옹 울었다.
헨리는 헤벌쭉한 얼굴로 쭈그려 앉아 금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훗. 아무래도 금희는 아실 너보다 이 아빠가 좋은가 보다. 그치, 금희?”
항상 헨리와 아실은 금희를 ‘그 고양이’ 라고 불렀었는데, 금희라고 부르는 걸 듣게 될 줄이야.
분명 금희라는 이름은 촌스럽게 짝이 없는 이름이었는데 헨리의 입에서 나오니 뭔가 고급스럽게 들렸다.
어쨌든 내가 없는 사이에 저렇게 친해진 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한참 뒤, 화를 낼 만큼 내고 분이 풀린 금희는 잔소리를 멈추고 내 무릎에 제 머리를 비벼 대기 시작했다.
“이제 화 풀렸어?”
애웅.
금희가 작게 울며 그르릉대기 시작했다. 아직 풀리진 않았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봐준다는 뜻 같았다.
요망하고 귀여운 것. 나는 애정을 듬뿍 받아 금희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마주 비벼 댔다.
그런 우리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며, 아실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저저, 어머니 아버지랑 이블린한테만 살랑거리는 것 봐. 나랑 형이 챙겨줄 땐 본 체도 안 하더니.”
“그게 우리 금희의 매력이…… 잠깐, 더글러스가?”
“응. 금희가 새벽에 안 자고 울면서 돌아다니니까 형이 간식 만들어 주던데. 소고기 꺼내서.”
말도 안 돼. 더글러스가 요리라니.
심지어 금희 입맛에 딱 맞았는지 ‘더글러스의 간식’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금희가 고개를 번쩍 들어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엄청 맛있었나 보네.’
내가 없는 사이에 온 가족이 금희를 살뜰하게 챙겼다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더글러스에게조차.
나는 금희를 쓰다듬으며 헨리와 아실에게 진심이 가득 담긴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다들.”
그러자 헨리와 아실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마치 내게서 이상한 소리라도 들은 양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돌려주었다.
“고맙긴. 금희도 우리 가족이잖니.”
“맞아. 이블린 넌 당연한 걸 고마워하지 않을 필요가 있어.”
“뭐야, 그게.”
이 사람들, 내가 진짜 이블린이 아니라고 알고 있으면서 나까지 이블린 같은 응석받이로 키울 생각인가.
‘물론 알고 보니 동일인지만.’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오니, 헨리와 아실도 얼굴 근육을 풀고 슬며시 나를 따라 웃었다.
헨리가 기대감 어린 얼굴로 은근슬쩍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블린. 허기 지지는 않니? 엄마랑 더글러스는 나가 있는데, 우리끼리 오붓하게 티 타임 좀 가질까?”
“아버지는. 애 피곤할 텐데 무슨 티 타임이에요. 잠이나 더 자게 둬요.”
아실의 면박에 헨리는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들과의 시간을 거절할 이유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실이 승리감 어린 미소를 띠며 으쓱였고, 헨리는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푸스스 웃은 나는 마치 병 주고 약 주듯 제안했다.
“대신 오늘 저녁, 다 같이 먹자.”
“오늘 저녁?”
저녁이야 시간 될 때마다 항상 같이해 왔으면서 헨리와 아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내일 즉위식을 어떻게 망칠지 궁금하지 않아?”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헨리와 아실의 얼굴이 동시에 싸악 굳더니 걱정스레 물었다.
“그것 때문에 요즘 바빴던 거니?”
“……우리한테 말하면 얼마든지 그놈을 처리해 줬을 텐데.”
“그래서 내가 나선 거야. 그냥 죽여 버릴까 봐. 그러는 건 좀 아쉽잖아.”
특히 타라와 더글러스는 단칼에 율리시즈의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 내 의견이 아쉬운지 두 부자는 기 죽은 얼굴을 했다. 정말 이럴 때면 비 맞은 강아지 따로 없다.
‘물론 라파엘이 더 귀엽지만.’
이런 말을 했다간 헨리와 아실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지.
아무튼 나는 둘의 어깨에 양손을 나란히 올렸다. 그러자 내 손이 닿기 무섭게 둘의 얼굴이 헤실 풀렸다.
그 모습이 마치 가면을 갈아 끼우는 모습 같아 웃겨서,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둘에게 전했다.
“다들 들으면 좋아할 만한 이야기일 거야. 그러니까 다들 저녁 시간 비워 놓으라 해.”
* * *
“문 열어.”
동이 트기 직전 새벽.
즉위식 당일 날까지도 벽에 팔이 묶인 채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선잠에 든 달리아를 깨운 건 율리시즈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예, 전하.”
철컥, 쿵.
“……!”
쇳내 나는 소리에 달리아는 퍼뜩 눈을 떴다.
잠이 덜 깨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율리시즈가 자신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에 달리아는 정신을 차렸다.
율리시즈가 싸늘하게 물었다.
“모황을 어디다 숨겼는지는 기어이 말할 생각이 없나?”
“혀가 잘려도 말 못 해요.”
“설마 저주를 푼 건 아니겠지.”
“…….”
달리아는 율리시즈를 외면했다. 율리시즈의 눈썹이 씰룩이더니 헛웃음과 함께 달리아를 비웃었다.
“뭐,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없지. 오베론을 시켜서 경비를 더 강화할 예정이거든. 네 계획은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갈 거야.”
율리시즈는 쭈그려 앉더니 달리아를 마주 보며 그녀의 턱을 거칠게 붙잡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한탄했다.
“내가 눈이 삐었었지. 어떻게 너 같은 것을 비로 맞이하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을까.”
“그러게 왜 그랬어요? 나 같은 것을 비로 맞겠다고.”
“…….”
한 마디를 지지 않는 그 모습에 율리시즈는 이골이 났다. 그는 달리아가 사실 아주 되바라진 여자였음을 실감하고는 쓰레기 버리듯 달리아를 내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기고 준비시키라 해.”
“명 받듭니다, 전하.”
율리시즈의 명령에 기사들이 달리아의 수갑을 풀기 시작했다.
달리아는 당황해서 물었다.
“정말로 날 거기에 세울 거라고요?”
“무대 완성을 위해 필요하거든.”
무대 완성? 그 말에 달리아가 불안함을 감지했고, 그 불안함은 적중했다.
율리시즈가 기대된다는 얼굴로, 달리아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기 때문이다.
“넌 오늘 제국민들이 전부 지켜보는 가운데서 죽을 거야.”
“뭐, 뭐라구요?”
“널 죽이면 공녀도 좀 얌전해지지 않겠어? 똑같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짓을……!”
달리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율리시즈에게 경멸을 쏟아 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율리시즈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달리아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듯 말했다.
“황후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날이니 걸치고 싶은 보석이 있다면 어디 마음껏 걸쳐 봐. 그 정도는 봐 주지.”
율리시즈는 생각만 해도 통쾌한지 호쾌한 웃음을 숨기지 않고 달리아를 배웅했다.
그를 돌아보며 달리아는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얼굴로 율리시즈를 노려보았고, 그럴수록 율리시즈의 웃음은 더더욱 진해졌다.
하지만 율리시즈가 간과하는 것이 있었다.
억울한 표정 연기야말로, 달리아의 전공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