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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44)화 (144/154)

144화 - 144화

감옥에서 나오니 입구 바로 앞에서 라파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파엘!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반가움 반 의아함 반을 담아 라파엘에게 달려들었다. 라파엘은 안정적으로 내 몸을 받쳐 주며 웃었다.

“걱정 돼서요. 별일 없으셨습니까?”

“당연하지.”

나는 자랑스레 턱을 들어 올리며 멀쩡하다는 걸 뽐내 주었다. 그제야 라파엘이 형식적인 웃음을 지우고 진짜로 웃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택이 유난히 조용한걸. 나는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홀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돌아가니까 엄청 조용하네. 평화로워.”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시나 보군요.”

“응.”

나는 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대답했다.

프라비체 저택만큼은 아니지만 셀레스티안 저택의 아침도 아름답다.

프라비체 저택이 밤과 어울리는 새카만 저택이라면, 셀레스티안 저택은 상쾌한 아침 햇살과 닮아 있었다.

‘아침 해가 완전히 뜬 걸 봐서 그런가. 잠이 오네…….’

이상하게 동틀 녘까지 말짱해도 해가 뜬 걸 보면 졸리다.

내가 졸려 하는 걸 눈치챘는지 라파엘이 차를 권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차라도 한잔 내려드릴까요?”

“그러면 좋지.”

나와 라파엘은 아까 모였던 응접실을 다시 찾게 되었다.

차를 내리는 라파엘의 뒷모습을 보는 건 꽤나 재밌었다.

미남은 얼굴만 봐도 재밌다고 하지 않나. 그 말은 틀렸다. 뒤태만 봐도 재밌다.

넓은 어깨, 반듯한 등, 탄탄하고 얇은 허리부터 긴 다리까지.

‘눈의 피로가 풀린다.’

라파엘이 얼마나 자기 관리에 진심인지는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자기 관리 하는 남자는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니까.

내 시선이 너무 집요했나, 뒷덜미가 빨개진 라파엘이 돌아보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너무 빤히 보시는 거 아닙니까?”

“내 거 내가 보겠다는데 문제 있어?”

“없기야 한데…….”

그래도 부끄러운지 라파엘은 서둘러 차를 완성시키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모래시계의 알이 빠르게 떨어지나. 덕분에 나는 3분간 더 라파엘의 뒤태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모래시계의 알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파엘은 쟁반을 들고 와 내 앞에 차를 따라 주었다.

“루이보스 티로 준비했습니다.”

“고마워.”

아쉬웠지만 라파엘의 뒤태보다는 얼굴이 좀 더 보는 재미가 있다. 나는 따뜻하게 데워진 찻잔을 양손으로 잡고 온기를 누렸다.

막 해가 뜬 아침의 쌀쌀함이 날아가니 이제야 몸의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차를 입에 대기 전, 나는 라파엘에게 물었다.

“안에서 있던 일 궁금하지?”

“예.”

라파엘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 같네. 나는 호록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따뜻한 입김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오베론한테서 마력을 전부 빼앗았어.”

그러자 라파엘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빼앗았다고요?”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기특해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호로록 차를 마시며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응, 부작용은 걱정 마. 내가 취하지 않고 바로 자연으로 돌려보냈으니까, 영향이 온다 해도 미미할 거야. 어차피 오베론을 흑마법사로 만든 건 나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허. 대흑마법사 이블린을 얕보지 말도록.”

나는 머리를 찰랑이며 잘난 체를 했다. 그에 라파엘이 걱정을 풀고 푸스스 웃었고 나 역시 그를 따라 살짝 웃었다.

라파엘과 둘만 있는 시간이 꽤 좋았다. 나는 아직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따뜻하고 향긋한 차를 마시니 나른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파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졸리다.”

“그러실 만하죠. 잠 많은 분이 여태까지 깨어 있으니.”

“그렇지만 오늘은 진짜 집 가야 하는데…….”

집에 못 돌아간 지 벌써 며칠째더라?

타라와 헨리가 걱정할 텐데.

아실과 더글러스 놈도.

우리 금희는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움직이기 귀찮은데.’

그렇지 않아도 나른한 상태인데, 따뜻한 차까지 들어가니 지금 자면 기분이 무척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하아암 하품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라파엘이 나를 안아 들고는 말했다.

“주무실 거면 방에 가서 주무세요. 아침이라 쌀쌀합니다.”

“라파엘. 나 집에다 연락 좀 해 주라. 너무 졸려서 여기서 자고 간다고…….”

“안 그러셔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고마워.”

나는 라파엘에게 안긴 채 꼭대기층에 있는 내 방까지 옮겨졌다.

라파엘이 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더니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이블린.”

그렇게 말하고서도 무언가 다 전하지 못한 게 있는 듯 라파엘은 쉽게 내 곁을 떠나지 못했다.

‘뭐지? 아까 못한 말이 있나?’

이제 와서 타라와 헨리에게 혼나는 게 무섭다고 날 내쫓을 리는 없고.

‘뭐야, 사람 궁금해 죽게 만들려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내가 목소리를 내려던 그때였다. 라파엘이 천천히 내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는 라파엘이 원하는 것이 뭔지 깨달았다.

‘아하. 굿나잇 키스가 하고 싶었구나.’

특별히 허락해 주지, 라고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사랑합니다.”

라파엘은 내게도 간신히 들릴 정도로 속닥거리고는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

나는 완전히 감긴 눈을 반쯤 떠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보같이 매너 넘치는 놈.’

굿나잇 키스 정도는 해도 되는데.

뭐, 함부로 내 몸에 손대지 않는 사람이기에 좋은 거였지만, 내심 아쉬웠다.

‘그래도 굿모닝 키스 정도는…… 아침에 졸라 볼까.’

내가 허락하면 기다렸다는 듯 날 잡아먹는 놈이니 분명 좋아할 거다. 물론 나도 좋고.

얼른 자고 일어나자. 그래야 라파엘이 오래 안 기다리지.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눈을 스르륵 감았다.

* * *

“전하, 주무세요?”

그 시각 황궁. 아니나 다를까, 율리시즈는 아직도 술에 절어 바닥에 뻗어 있는 채였다.

예상대로였다. 이대로라면 아마 점심 해가 뜨도록 일어나지 못할 거다.

파그라시움에서 받아온 이 약은 무색무취, 마법으로도 해독되지 않기에 무척 유용한 약이니까.

가까이 가니 술냄새가 확 풍겨 왔다. 유다가 코를 황급히 막았다.

“윽, 술냄새. 헤베 영애께선 괜찮으십니까?”

“저야 이것보다 더한 냄새도 맡아 봤으니까요. 담배 냄새가 안 나는 게 다행이죠.”

그랬으면 키스하다가 토했을 거라고 달리아가 농담 따먹기를 하듯 후후 웃었다.

“그, 죄송합니다.”

유다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니 달리아가 또다시 키득거렸다.

“어머, 유다 님이 왜요. 유다 님 잘못은 없는데.”

“그래도…….”

“마탑주님 얼굴로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별 걸 다 봤다는 얼굴로 달리아가 부탁했다. 이번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오베론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뒤늦게 자각한 유다는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느라 난리를 쳤다.

그사이 달리아는 율리시즈의 머리를 구두 끝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왜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흑마법에 손을 댔을 때조차 율리시즈를 쓰러뜨릴 생각은 못 했는데.

‘하지만 차라리 지금 와서 깨달은 게 잘된 일이지.’

달리아는 이제 완전히 깨달았다.

자신은 황태자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은 황후로서 나라를 꾸려 나갈 그릇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또 죄를 짓고 싶지 않아.’

달리아는 고개를 돌려 유다를 바라보았다. 유다는 여전히 제 표정을 매만지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달리아가 유다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보다 유다 님.”

“예, 예!”

갑자기 말이 걸린 유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과하게 반응했다.

역시 재밌는 사람이네. 달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부탁을 꺼냈다.

“전하께 기억 조작 좀 걸어 주실 수 있나요?”

“예?”

당황했는지 유다가 되물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달리아가 말했다. 기억 조작 마법은 흑마법에 속하므로 자신을 걸 수 없었으니까.

“어제 절 죽이려 하더라구요. 깨서 또 난리 피우기 전에 기억 좀 조작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그런! 빨리 걸어 두겠습니다!”

허둥대는 유다의 모습에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추억에 잠겼다.

율리시즈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제 말 한 마디에 어쩔 줄 몰라 쩔쩔매던 때가.

어쩌다 사람이 저렇게 되었을까, 혹시 자신과 만났기 때문에 저렇게 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달리아는 입안이 썼다.

기억 조작 마법이 걸린 탓인가, 율리시즈는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달리아……?”

“어머. 일어나셨어요, 전하?”

“내가 왜…….”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드셨어요.”

“내가? 으윽.”

머리가 울리는지 율리시즈는 의문을 표하다가도 머리를 쥐어싸 맸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율리시즈는 강자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설마 달리아가 자신의 술에 약을 탔을 거란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지만, 의심은 없을수록 좋았다.

달리아는 아직도 바닥에 누워 있는 율리시즈를 부축해 주며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아직 피곤하신 것 같아요, 전하.”

“그런 것 같군……. 망할, 왜지? 그보다 오베론 마탑주는 왜 여기 있나?”

“마탑주께서 전하를 발견하셨어요.”

“그랬군. 고맙네, 마탑주.”

“당연한 일인 것을요.”

유다는 완벽하게 오베론을 연기했다.

달리아가 걱정스레 율리시즈에게 물었다.

“물 좀 드릴까요?”

“아니, 됐어. 그보다 난 모황을 찾아뵈어야겠어. 달리아, 그대도 가겠나?”

“네, 전하.”

달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싫다 해도 끌려갔을 게 분명하니까.

율리시즈와 달리아는 황제의 침실을 찾았다.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율리시즈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뭔가 이상한데?”

침대 휘장에 그 어떤 것도 비치지 않았다. 인기척 역시 없었다.

“설마.”

율리시즈는 침대로 달려가 휘장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율리시즈는 텅 빈 침대를 보고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모황이…… 사라졌어.”

율리시즈의 고개가 저절로 달리아에게 돌아갔다.

“네 짓이지!”

“윽……!”

쿵! 율리시즈가 달리아의 목을 팔로 제압한 채 벽으로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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