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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43)화 (143/154)

143화 - 143화

“그것보다 황태자비 전하가 우리 얘기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댔잖니. 자, 얼른 들어가자.”

나와 라파엘의 원망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샬럿은 태평하게 우리를 응접실 안으로 처넣었다.

“언제부터 황태자비를 그렇게 존중했다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기억에 의하면 황태자비의 뺨을 친 건 샬럿이었는데 말이다.

“난 항상 우리 황실 사람들 존중한단다.”

“방금 그 황실 사람 중 최고봉 협박하고 오지 않았나.”

내 비꼼에도 샬럿은 타격 하나 받지 않았다. 이 인간에게 우리의 당부가 씨알이나 먹히지 않을 건 알고 있지만, 라파엘이 추가로 경고했다.

“……다음에 또 훔쳐보기만 하십시오.”

“쳇.”

샬럿이 아쉬운 얼굴로 혀를 찼다.

아무튼 결과를 궁금해하는 이 인간들에게 이야기도 해 줄 겸, 우리는 응접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라도 한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폐하께선 순순히 협조해 주시긴 했어.”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달리아는 안도하는 얼굴로 한 마디 했다.

“폐하께서 협조해 주신다니, 황태자 전하를 물러나게 하는 것도 쉽겠네요.”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왜요?”

달리아가 설마 또 뭐가 있냐는 듯 불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내 기억에 나와 내 가족은 이미 한 번, 율리시즈로 인해 죽었다.

내가 살려 준 목숨으로 살아가고 있는 주제에 말이다.

‘내가 준 목숨 다시 거두어야 진짜 일이 해결되는 거지.’

사람을 죽이는 건 이블린의 자아를 찾고 난 지금도 여전히 무섭다.

그렇지만 흑마법의 대가는 언젠가 돌아오는 법. 그건 흑마법으로 살아난 자 역시 피해 갈 수 없다.

나는 대가를 치렀다. 그러니 이번에는 율리시즈의 차례였다.

생각을 마친 나는 유다를 향해 서두를 꺼냈다.

“유다. 진짜 마지막 일인데 말이야.”

“또, 또 뭘 시키시려고요?”

유다의 눈이 불안함으로 물들었다.

내가 시키는 일은 항상 개고생이 따르는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다시 부려 먹는 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얘밖에 인재가 없다.’

오베론은 지난번 샬럿으로 변해 대신 감옥에 갇힌 적이 있을 정도로 변신 마법에 능했다. 그랬기에 나는 그에게 부탁했다.

“네가 오베론 흉내 좀 내서 흑마법 심판 좀 벌여 봐.”

“네?”

당연히 유다는 차를 마시다 말고 벌떡 일어나 반발했다.

“마, 말이 되는 명령을 하세요! 제가 그걸 어떻게…….”

“그렇네요. 어차피 오베론 마탑주가 여기 있는 이상 황태자는 그를 찾을 테고, 소란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유다가 수고해 주는 게 좋죠.”

반발하는 유다에 반대로 라파엘을 포함한 모두가 납득했다.

유다는 억울해서 미칠 지경으로 보였다. 아무리 나라도 이쯤 되면 유다한테 미안해진다.

나는 유다를 열심히 올려쳐 주며 그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유다, 괜찮아! 이번엔 위험한 일 아니야. 네 변신 마법이면 다들 깜빡 속을걸? 너 샬럿 대신 감옥에 갇힌 전적도 있잖아.”

“하, 하지만!”

솔직히 오베론을 상대하는 일에 비해 쉬운 일이었지만 유다는 완고했다.

물론 그러는 그의 반응도 이해되긴 했다. 10년 치 연봉 일시불 수령 하느라 개고생했는데 또 개고생하라고? 나였으면 대표 얼굴에 사직서 던지고 일 때려치웠다.

하지만 아직 협상거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협상 카드를 내밀었다.

“이번 일만 끝내면 라파엘이 퇴직금 화려하게 쏜대.”

내 말에 유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말을 더듬었다.

“퇴, 퇴직, 퇴직금이요?”

“이블린?”

라파엘이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뻔뻔하게 부탁했다.

“아, 왜애. 이제 더 이상 협상할 거리도 없잖아. 돈도 넘치게 줬는데. 쟤 한 번만 퇴직시켜 주라.”

“하지만…….”

나는 라파엘의 목에 찰싹 매달려 귓가에 속삭였다.

“이 부탁 들어주면 결혼 이야기 좀 더 해 봐도 되고.”

“……!”

라파엘의 허락을 구하는 건 아주 쉬웠다. 내 속삭임 하나에 라파엘은 벌건 목덜미를 하곤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래. 이번 일만 잘해 내면 바로 퇴직금 정산해 주도록 하지.”

역시 우리 라파엘. 내 말이면 다 잘 들어서 마음에 든다.

나는 씨익 웃으며 유다에게 다시 한번 물었고,

“어때, 할…….”

“네네! 저 할게요! 시켜 주세요!”

유다는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번쩍 들어가며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이는 모습으로 답해 주었다.

파그라시움 최초로 본인이 퇴직금을 수령하는 사람이 유다일 줄이야.

퇴직하지 못하고 파그라시움에 남아야 하는 조슈아의 눈이 배신으로 가득 찬 건 덤이었다.

* * *

달리아는 오베론으로 변한 유다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갔고, 카밀라와 조슈아 역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곧 있으면 새벽 동도 틀 모양인지 바깥이 어슴푸레했다.

슬슬 피곤했지만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바로 잡아온 오베론의 뒤처리 말이다.

“라파엘. 나 잠깐 지하 감옥 좀 갔다 올게.”

“혼자서요?”

같이 산책 나가고 싶은 강아지처럼 라파엘이 낑낑거렸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너까지 가면 오베론 걔, 질투에 미쳐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질투에 미친 남자는 무섭다니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자 라파엘이 뜨끔했다.

설마 방금 질투했나? 내가 외간남자랑 단둘이 대화하고 온다고?

‘뭐야, 엄청 귀여워.’

질투에 미친 남자는 무섭지만 그게 라파엘이라면 귀엽다.

나 은근 귀여운 남자한테 약할지도. 나는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라파엘의 양 볼을 문질렀다.

“금방 올 거야.”

“……뭘 하고 오실 건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음, 실직 시키러?”

나는 직접 말해 주기보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라파엘이 아리송한 얼굴을 하다가도 금방 이해해 주었다.

라파엘은 걱정되는 얼굴을 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끝내 막지는 않았다. 대신 품에서 작은 구슬 모양 아티팩트를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이 오면 바로 절 부르십시오.”

“이제 이런 거 안 써도 나 이제 짱 센데.”

“혹시 모를 상황이 있는 거니까요. 공녀님께서 마법을 쓰지 못하실 수도 있고.”

라파엘의 말대로 대비해 둬서 나쁠 일은 없지.

역시 믿음직하다. 내가 생각 못 하는 부분은 항상 라파엘이 챙겨 준다.

‘이런 사람과 하는 결혼 생활이라면 분명 행복할 거야.’

아직 프로포즈를 제대로 받은 건 아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나는 라파엘을 꼬옥 끌어안고는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요즘 계속 붙어 다녀서일까, 아니면 프로포즈 직전의 상황까지 가서일까.

잠깐이라도 헤어지는 게 아쉬운 마음에 나와 라파엘은 인사도 했으면서 서로를 놓지 못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나는 박하향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엄청 좋아했나 보다.

* * *

지하 감옥은 무척이나 습했다. 습한 거 딱 질색인데, 라는 사소한 투정과 함께 계단을 내려간 나는 오베론이 갇혀 있는 방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창살 사이로 내가 보이자 모로 누워 있던 오베론이 꿈틀꿈틀 날뛰기 시작했다.

“읍읍!”

“어머. 이미 깨어 있었네? 깨울 필요도 없이 잘됐다.”

“읍읍읍!”

“뭐라는지 모르겠네. 기다려 봐.”

나는 손가락을 휘릭 움직여 오베론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렸다.

“푸하.”

오베론은 숨을 크게 뱉으며 헉헉거렸다. 그러고는 흘리던 침도 닦지 못하고 증오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이블린. 도대체 날 어디로 끌고 온 거야?”

“내 애인 직장 아래에 있는 감옥.”

“뭐?”

오베론이 놀라든 말든 나는 그의 앞에 서서 뺨을 짚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은 다 어떻게 처리할지 감이 오는데 말이야. 너만큼은 감이 안 와.”

꿀꺽. 오베론이 긴장하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 힘이 없으면, 너도 좀 얌전해지지 않을까.”

“……힘을 빼앗아? 내 마력을 빼앗겠다는 소리야, 지금?”

“정확히 맞췄어.”

오베론의 숨이 한순간 멈춘 것 같았다.

이런 게 바로 진짜 포식자의 기분일까. 어디 가서 무력으로 당할 걱정에 벌벌 떨었던 나날은 이제 정말 안녕이구나, 싶었다.

오베론의 협박 같지 않은 협박도 귀엽게 들릴 정도니 말이다.

“그만한 흑마법을 쓰면, 네가 무사하지 못할 텐데?”

흑마법은 쓰면 쓸수록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대가가 무엇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큰 마법일수록 대가가 커지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가설을 하나 세워 봤다.

“내가 저주로 인해 이득을 취하는 게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뭐?”

“네 마력을 빼앗은 다음에 다 없애 버릴 거라고.”

“……!”

오베론은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이게 제일 확실하게 오베론을 치우는 방법인 것 같았다.

나는 찬찬히 오베론이 처할 미래를 읊어 주었다.

“너는 힘도 잃고, 마탑주의 지위도 잃겠지. 작위는 남겠지만 그것 가지고는 라파엘과 나를 해하지 못할 것 같고.”

“……차라리 죽여!”

오베론이 악에 받쳐 소리쳤지만 그는 내게 위험한 존재가 아니게 된 지 오래였다.

“싫어. 내가 왜 내 손에 피를 묻혀야 돼? 저주를 쓰면 반동이 나한테 오고, 직접 찌르는 건 악몽 꿀 것 같단 말이야.”

나는 그가 약오르도록 호호 웃으며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가까이 갈수록 오베론은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오베론이 손발이 묶인 채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는 오베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에게서 처음 마력을 빼앗을 땐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의 마력이 참 조그맣게 느껴졌다.

오베론의 마력을 모조리 소멸시키는 건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듯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는 오베론의 마력을 남김없이 소멸시킨 후, 눈을 떴다.

“이제 작위만 남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

내가 생긋 웃으며 묻자 오베론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원망스럽게 중얼거렸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물론 네가 나를 다시 불러 준 건 고맙게 생각해. 라파엘과, 가족들과 다시 만나게 됐으니까. 그런데 거기까지만 했어야지. 왜 날 곤란하게 만들어?”

내 마력을 제때 돌려주기만 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욕심이 과하면 독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차가운 얼굴로 흑마법사들이라면 늘 알고 있는 사실 한 가지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너도 알잖아. 흑마법의 대가는 잔인한 거. 그 대가를 지금 받았다고 생각하자.”

“……!”

내 말에 오베론의 눈동자에 지독한 절망이 퍼져 나갔다.

이제 할 일은 전부 끝났다.

읏차.

그리고 그 순간, 오베론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쫓아 몸을 꼴사납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가지 마. 돌려줘.”

그러나 나는 빙글 몸을 돌려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오베론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럼 즉위식 끝나고 풀어 줄게. 그때면 황제가 바뀌었을 테니 마탑에서 방 바로 빼 줬으면 좋겠어. 안녕.”

“아, 안 돼! 돌려줘, 내가 잘못했어, 이블린! 이블린!”

오베론이 애타게 날 부르든 말든 나는 지하 감옥의 출구 계단을 올라갔다.

벌써 새벽 동이 텄는지 바깥에서부터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빛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감상에 젖었다.

‘슬슬 끝이 보인다.’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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