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142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황제가 배신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그녀가 황제라고 해서 내 말을 조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나는 황제가 충격을 받든 말든 샬럿과 라파엘을 가리키며 물었다.
“폐하께서도 힘드셨다면서요. 힘드셨던 경험을 그대로 대물림하신 결과물이 여기 떡하니 있는데, 정말로 후회되지 않으세요?”
“공녀. 아무리 공녀라 해도 감히 짐을 향해…….”
“그러고 보니 폐하께선 저희 엄마를 동경해서 절 봐주고 계셨죠? 저희 부모님이 좋은 분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저한테는 좋은 엄마 아빠예요. 하지만 폐하께선 좋은 부모는 아니시죠. 그대로라면 우리 엄마 발끝도 못 따라가요.”
“……!”
내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황제가 충격에 빠졌다.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친자식도 아닌 놈이 폐하를 밀쳤어도, 그리고 친자식들이 폐하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폐하께선 하실 말씀이 없으세요. 폐하가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강하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죠.”
옆에서 샬럿이 거들었다.
빈말로도 황제의 지금 처지는 강자라고 할 수 없다. 생전 처음 약자가 되었다는 충격 탓일까. 황제는 색이 바랜 푸른 눈동자를 떨며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황제인데…… 왜 이런…….”
우리는 가만히 그녀의 미련 넘치는 혼잣말을 들어 주었다. 그것이 황제에게 있어 더 비참할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 역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푹 떨구고는 대답했다.
“……그래. 너희 뜻대로 하마.”
약육강식을 지향해 왔던 황제는 다행히도 자신이 한 말 정도는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샬럿은 혹시라도 황제가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워 당일에 말을 바꿀까, 단단히 경고했다.
“어기시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황제는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힘없이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다. 어차피 황위는 곧 누군가에게 물려줘야만 했고, 드와이에서 조용히 갇히듯 살든, 내 명예가 더럽혀지든 죽는 것보다 더하다는 건 똑같다.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내 친자와 공녀가 이어지게 되었으니 내게도 나쁜 일은 아니구나.”
아차. 그러고 보니 라파엘이 황제의 친자면 나는 정말 황제의 며느리가 되는 거다.
하지만 황제의 며느리는 죽어도 싫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라파엘이 차갑게 선을 그었다.
“꽤나 행복한 상상 속에 빠져 있군요. 저는 당신에게 아들로서 대해진 적이 없으니 이블린 역시 당신의 며느리가 아닙니다.”
“…….”
황제가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잘 대해 줬는데, 너마저 자신을 버릴 거냐는 얼굴이었다.
미안하지만 당연히 그럴 거였다.
“라파엘이 싫어하는데 폐하와 가족이 되는 건 좀 무리 같네요. 물론 저도 싫고요.”
“…….”
황제는 마지막 지푸라기마저 놓친 불쌍한 얼굴을 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옥좌에 앉았던 황제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저주에 당해 누워 있을 때보다 지금의 황제가 더 초라해 보였다.
“이렇게 모든 걸 잃게 되는구나…….”
황제는 초라해지더라도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사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황제가 사과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황제가 타인에게 사과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혹시나, 하고 기대한 내가 역시 바보였다.
황제는 우리 엄마 아빠와는 다르다.
곁눈질로 라파엘을 훔쳐보니 놀랍도록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반성 없는 태도에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닐 거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나는 좋은 부모를 두고 있는 처지니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기만으로 들릴 거다.
그래서 나는 라파엘의 손을 잡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하고 황제에게 인사를 고했다.
“그럼 즉위식 날 다시 모실게요. 쉬세요.”
쿵.
우리는 방 밖으로 나와 문 앞에 무거운 자물쇠를 걸었다.
자신이 내려올 때를 자신이 정하지 못한다는 충격 때문인지, 자식들에게 목을 물렸다는 충격 때문인지, 황제는 감금과 다름없는 자신의 처지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 * *
1층 홀로 내려오니 벌써 밤이 깊어 있었다.
설마 황제와 이 시간까지 얘기하다니. 나야 몇 마디 거든 것밖에 없으니 졸리다는 것 빼고는 괜찮았지만 라파엘은 아니었다.
무표정했던 라파엘의 얼굴은 황제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니 멍해 보였다.
나는 부쩍 피곤해 보이는 라파엘의 팔짱을 끼고 물었다.
“라파엘, 괜찮아? 피곤해 보이는데.”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라파엘은 잠깐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더니, 아까보다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내뱉었더니 속이 시원해요.”
“고생했어.”
나는 라파엘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솔직히 나는 라파엘이 황제를 용서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럴 틈도 없이 황제가 반성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게 천운이었지.’
아니, 그걸 천운이라 해야 하나. 어쨌든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이 풀린 것 같았다.
내가 라파엘만 걱정하니 샬럿이 샘났는지 투덜거렸다.
“어머? 나는 걱정 안 해 주니?”
“걱정하기엔 너무 쌩쌩해 보이는데.”
그리 말하며 라파엘을 품에서 떼어 내려던 순간이었다. 라파엘이 샬럿의 눈치를 보더니 작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 그보다 이블린. 할 말이 있는데…….”
라파엘은 말을 끌며 샬럿에게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샬럿이 웬일로, 일부러 하품하는 소리를 크게 내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하아암. 언니는 졸려서 차 한 잔만 마셔야겠다. 둘이 얘기하고 있어.”
샬럿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게 어쩐지 이상했다. 거기다 눈을 이상하게 휘며 내게 눈을 연신 찡긋거리기까지.
하지만 응접실로 향하는 샬럿을 붙잡는 것보다는 라파엘이 왜 이러는지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던 나는 라파엘과 마주서고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라파엘은 차마 나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서두를 장황하게 시작했다.
“……듣다가 영 아니시면 바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편하게 들어 주세요.”
“알겠어. 내가 언제 불편한 얘기 참는 거 봤어?”
안 참는 사람 하면 바로 나, 이블린 프라비체다.
도대체 무슨 얘기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냐고 투덜거리려던 순간이었다.
‘목덜미가…….’
그 순간, 새빨개진 라파엘의 목덜미를 발견한 동시에, 라파엘이 본론을 무겁게 입에 담았다.
“정말로 그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간신히 나와 눈을 마주친 라파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수줍었고, 긴장했으며, 초조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
감정도 전염병처럼 옮는 걸까? 덩달아 얼굴에 열이 오른 나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러자 라파엘의 얼굴이 희망으로 한층 밝아졌다.
라파엘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못해, 장갑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손에는 열이 가득했다.
“이블린.”
라파엘이 평소보다 더 떨리고, 열이 오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바보라도 알 수 있다.
라파엘이 지금 내게 프로포즈 하려는 걸.
두근두근. 지금 이 심장 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누가 아까 비혼주의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이런 미남을 두고 그런 생각을 했던 멍청한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다.
라파엘은 어느새 목덜미로도 모자라 귀며 볼까지 잔뜩 붉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뜨거워 보이는 건 라파엘의 눈동자였다.
“이블린. 저와…….”
그렇게 라파엘이 내게 프로포즈 하려던 순간이었다.
“밀지 좀 마요, 카밀라 님. 황녀 전하.”
“우리가 어디서 이런 구경 하겠어요. 좀 더 숙여 봐요.”
“맞아, 조금만 참아 보렴. 에잇, 안 들리네. 딱 봐도 프로포즈 할 것 같은데.”
“만약 둘이 진짜로 결혼하면 모셔야 될 까칠한 상사가 두 명 되는 거 아니에요?”
“큰일났네요, 유다. 우리 각오 단단히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홀 가운데였다.
그 바로 맞은편으로 응접실이 있었는데, 문틈이 아주 살짝 열려 있었고 틈 사이 직렬로 형형색색의 눈동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것들이 진짜.’
살면서 겪은 큰 분노 랭킹이 방금 갱신되었다.
내가 빼액 소리를 지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저것들이…….”
방금 말한 건 내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파엘도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가 나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라파엘은 척척 응접실로 걸어가더니, 문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다들 뭘 훔쳐보고 있는 겁니까!”
다섯 명의 인간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바닥에 엎어졌다. 나 역시 방금 그 장면을 들킨 게 왠지 창피해서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맞아! 뭘 훔쳐보고 있어, 교양 없게!”
진즉 차 마시고 갔어야 될 카밀라와 달리아, 지하 감옥으로 심부름 보냈던 유다와 조슈아, 거기에 아까 피곤하다며 응접실로 간 샬럿까지.
라파엘이 내게 프로포즈 하려는 모습을 이 다섯 명이 훔쳐보고 있었다.
“에이, 들켰네.”
샬럿이 선두로 투덜거렸다.
라파엘에게만 보여 주고 싶은 내 수줍은 얼굴을 이 인간들에게도 들키다니! 나는 수치로 물든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뭐야, 너희! 왜 다 거기 모여 있어!”
“지하 감옥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 분과 마주쳐서요.”
조슈아와 유다가 다소 뻘쭘한 미소로 이 상황을 무마하려 했고,
“넷이서 얘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거 모르겠는 거 있죠?”
호호, 카밀라가 얄밉게 웃었다.
“저는 폐하와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궁금해서…….”
여기서 납득 가능한 정상적인 답변을 한 건 달리아뿐이었다.
나는 이제야 아까 샬럿의 웃음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그 인간, 라파엘이 프로포즈 할 거 나보다 먼저 눈치챘구나!’
그래서 사람들 모아서 구경하자고 선동한 거구나!
나는 배신감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샬럿을 노려보았지만 샬럿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자리 비켜 주면 하던 거 마저 할래?”
“웃기지 마십시오. 또 숨어서 훔쳐볼 거잖습니까.”
“웃겨? 속고만 살았나.”
샬럿이 대놓고 실망한 티를 냈다. 지금만큼 샬럿이 가증스러워 보일 때는 없을 것이다.
실망을 해도 내가 더 했다.
‘내심 프로포즈 기대했는데!’
불청객들에게 화를 내면서도 내가 실망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있는 건 또 어떻게 봤는지, 라파엘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방금 건 잊어 주세요. 다음에 제대로 다시 할 테니까.”
“……!”
라파엘의 의도대로 내 눈은 금방 기대로 부풀었다.
다음에는 불청객들이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자. 나는 또다시 방해 받을 수 없다는 다짐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