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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41)화 (141/154)

141화 - 141화

라파엘의 인사가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

황제는 마치 실어증에라도 걸린 듯 입만 뻐끔거리더니 대뜸 날 잡고 늘어졌다.

“공녀! 공녀가 설명해 보게. 왜 짐이 여기 있고 샬럿과 후작은 왜 여기 있지?”

“폐하께선 마지막 경합 발표 직전에 계단에서 쓰러지셨어요. 그리고 세 달을 내리 잠들어 계셨다가 지금 깨어나신 거구요.”

달리아가 저주를 걸었단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말하면 달리아는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황제가 추린 범인은 단 한 명이었다.

“……율리시즈가, 그랬느냐?”

“네.”

“이 괘씸한!”

내가 대답하기 무섭게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짐을 깨워 줘서 고맙네, 공녀. 내 당장 율리시즈 이놈을…… 윽!”

쿵. 황제가 기세 좋게 일어났으나 역시 근손실이 있었던 모양인지 일어나자마자 꼴사납게 넘어지고야 말았다.

친자식이 여기 둘이나 있는데 아무도 받쳐 주지 않는 게 조금 웃겼다.

‘하는 수 없지. 나라도 나서야지.’

나는 하기 싫은 기색을 숨기고 황제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폐하?”

“고맙네, 공녀. 역시 나를 챙겨 주는 건 공녀밖에 없어.”

황제가 감동 받은 얼굴로 내 부축을 받고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미안하지만 내가 황제를 챙겨 준 이유는 불쌍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녀가 여기서 화병 나서 죽으면 우리의 계획이 틀어지기 때문이었다.

괜히 혼자 일어섰다가 어디에 머리라도 부딪치면 큰일이다. 사람은 재수 없으면 넘어지기만 해도 죽으니까.

그건 꿈에도 모르고 황제가 볼멘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후우. 내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망할 몸뚱어리.”

“황궁으로 돌아가셔서 뭘 어쩌시려구요?”

샬럿이 가만히 황제의 투덜거림을 듣다가 물었다. 황제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율리시즈 그놈을 쫓아내야지! 그리고 넌 뭐냐. 왜 돌아왔지? 너도 짐이 황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돌려보낼 테니 그리 알고…….”

“어마마마가 무슨 힘으로요?”

“……뭐?”

대놓고 비웃는 샬럿의 모습에 황제는 말문이 막힌 듯 멍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샬럿의 비웃음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율리시즈는 이미 새로운 황실의 막을 열 준비를 마쳤어요. 즉위식이 바로 일주일 뒤인데, 세 달이나 누워 있다가 이제 일어난 비실비실한 황제의 말을 누가 들어 줄까요?”

샬럿이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무릎을 굽혀 황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께서 처음에 절 유배 보내셨을 때 그러셨죠. 저처럼 정신도 몸도 고장난 자는 황제가 될 수 없다고 말이에요.”

톡, 톡. 샬럿은 마치 길거리에 있는 불쌍한 노인네를 보듯, 황제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어쩜 이렇게나 안목이 없으셔서야…….”

“이, 이것이……! 지금 말 다 했느냐!”

“아니, 다 못 했어요.”

샬럿이 냉소를 머금으며 황제의 실책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당신이 키운 아들이 한 짓을 보세요. 당신을 계단에서 떠밀어 버리고, 공녀를 흑마법사로 몰아 재판까지 열고, 그 어리석은 머리로 황제가 되려 하고 있어요. 이게 상드리움을 망치는 지름길이 아니면 뭘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황제 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은데?”

샬럿의 일침은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황제의 귀에 잘 들어갔는지, 그녀는 망연자실하게 샬럿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황제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힐난에 혼이 나가 있는데도 샬럿은 입을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당신은 자기 아들이 뒤바뀐 줄도 몰라. 어떻게 생판 남도 아니고 불륜남과 불륜녀의 자식을 좋은 옷 입히고 좋은 거 먹여 가며 키웠대요?”

“……!”

율리시즈에 뒷전으로 밀려 무시당하던 라파엘의 존재가 다시 황제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황제는 큰소리를 치며 항변했다.

“짐은 데미안의 불륜 상대까지는 몰랐다! 그 자식이 이미 자식까지 만든 걸 알았더라면 짐은 결코……!”

확실히 데미안의 불륜 상대까지는 몰랐다는 황제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황제가 알고 있었더라면 라파엘은 지금쯤 살아 있지 못했겠지. ……응?’

황제의 시선이 갑자기 내게 향했다.

나는 왜? 설마 나한테도 뭐라 하려고?

내 불안은 반은 맞았다. 이번에는 황제가 라파엘을 향해 씩씩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네, 설마 공녀에게 일부러 접근했나? 짐을 모욕 줄 심산으로 공녀의 약혼자가……!”

“송구하지만 망상이 심하시군요.”

라파엘은 마치 여태까지 긴장하고 심란했던 일들이 모두 사서 고생한 일들이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덧붙였다.

“알게 된 건 최근입니다. 게다가 당신께 모욕을 주어 내가 얻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여태껏 살아온 인생이나, 당신 밑에서 황자로 살아가는 인생이나 구질구질하기엔 똑같을 텐데.”

“뭐야? 구질구질?”

황제의 언성이 올라갔다. 저러다 또 쓰러지는 거 아닌지 조마조마했지만 라파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 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라파엘이 푸는 설움을 들었다.

“오죽하면 나 대신 당신 아들로 살아갔던 그자가 당신을 계단에서 쓰러지도록 했겠습니까. 차라리 후작으로 살아갈 수 있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녀석이 감히 짐을 모욕해!”

“모욕할 생각은 없었는데, 유감이군요. 그저 죄책감 좀 실어 주려 했을 뿐인데.”

라파엘은 분노에 차 뒷덜미를 잡는 황제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

그러다가 표정을 싹 굳히고는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일 없다! 이보게, 공녀. 짐은 이만 나가야겠네.”

황제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나를 붙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제가 대화를 거부하든 말든, 라파엘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분명 절 알아봤던 때가 있었지요. 그때 절 알아보고, 어떤 생각을 했지요?”

“……!”

황제는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당신이 친모라는 것도 모르고 당신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했습니다. 길러 주신 어머니께서 남긴, 네 출신은 떳떳하지 못하니 죽을 때까지 조용히 살라는 유언과 함께 남긴 이 쓸모없는 보석 때문에요.”

“그, 그 보석은…….”

라파엘이 푸른 벨벳 상자를 꺼내 달리아의 광채를 내보이자 황제는 그 보석을 아는 것처럼 당혹스러워했다.

“데미안 공이 선대 후작에게 준 선물입니다. 당신도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그 보석은, 내게 진상되자마자 데미안 놈에게 주었던 것이니.”

라파엘의 말에 황제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설마 저 보석의 원래 출처가 황제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마도 황제가 데미안에게 선물로 준 후, 데미안은 그 보석에 달리아의 광채라는 이름을 붙여 선대 셀레스티안 후작에게 주었던 것이리라.

지금 보니 막장이 따로 없다.

황제는 마치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눈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뭘 원하지?”

“율리시즈의 즉위식 날, 정식으로 공표해 주세요. 제국민들이 새 황제의 탄생을 알리는 날, 율리시즈가 한 짓을 모두 알리고 율리시즈가 어마마마의 친자가 아니며, 나 샬럿을 황제로 올리겠다고요.”

샬럿이 나서서 대답했다. 예상대로 황제는 우리의 요구 전부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마지막 부탁은 들어주겠다. 하지만 앞에 두 개만큼은 절대로 안 돼!”

“그렇다면 더한 꼴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라파엘이 비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황제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아십니까?”

“……?”

황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눈에 안 띄게 산 게 다지 않냐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라파엘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비웃으며 친히 가르쳐 주었다.

“저는 제 친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뒷세계에서 발을 담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불륜한 황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괴감에 시달렸죠.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인가? 나는 언제 황제에게 걸려 처리될까.”

잠깐의 침묵 후 라파엘은 서늘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암흑가를 모조리 씹어 삼켜 힘을 길렀습니다.”

“……네놈이 암흑가의 수장이었다고?”

설마 라파엘의 본업이 무엇인지는 생각도 못 한 듯, 황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라파엘은 협박을 마저 이었다.

“만약 당신이 우리의 뜻대로 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의 친자가 뒤바뀐 것도 모자라 암흑가의 수장이라는 걸 밝혀 버릴 겁니다. 그 완벽한 프레데리카 황제의 친자가 암흑가에서 더러운 일을 하고 있었다니. 이만한 불명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마치 연극을 보듯 라파엘은 평소보다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협박했다.

협박은 제대로 먹혔는지, 황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너희들 계획이 다 끝나면, 짐은 어떻게 되는 거지?”

“드와이로 모실게요. 어마마마가 저를 드와이에 보내신 것처럼.”

샬럿이 생긋 웃으며 알려 주었다.

딸을 유폐한 것과 같이 자신이 자식들에게 유폐당할 위기에 처해진 황제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황제는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이나 눈동자를 굴리며 샬럿과 라파엘을 번갈아 보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변명 하나만 해도 되겠느냐.”

“별로 와닿진 않을 테지만 해 보세요.”

샬럿이 조소를 띤 채 대답했다.

하지만 그 얄팍한 변명의 기회조차 황제에게는 간절했는지, 그녀는 호통은커녕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자랐어. 완벽하지 않으면 내 존재가 허락되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후회하지 않아. 그렇게 자란 덕에 나는 이런 황제가 됐으니까.”

솔직히 나는 황제가 사과부터 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황제는 생각보다 더 뻔뻔했다. 그랬기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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