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140화
달리아는 라파엘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유다, 조슈아와 함께 마중을 나온 라파엘은 우리가 정말 황제를 데리고 온 것도 모자라 오베론까지 기절시켜서 끌고 온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다친 데는 없으신 거 맞습니까?”
라파엘이 물었다.
오베론을 제압하고도 상처가 없는 게 믿기지 않는지 벌써 세 번째 질문이다.
슬슬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아 나는 뒤를 가리키며 짜증을 냈다.
“정말이라니까? 그보다 슬슬 좀 가자. 쟤 팔 떨어지겠어.”
“맞아요, 보스. 저 의외로 연약하다구요~”
카밀라가 얄밉게 맞장구치며 자신의 품 안에 공주님처럼 안겨 있는 황제를 떨어뜨릴락 말락, 했다.
라파엘은 마치 못 볼 꼴이라도 본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일단 유다부터 가둬 놓도록 하겠습니다. 조슈아, 유다.”
“예, 보스.”
나는 조슈아와 유다에게 오베론의 재갈줄을 넘겨 주었다. 그러고는 오베론의 구속된 팔다리를 가리키며 그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손목이랑 발도 확실하게 묶어 놨으니 너무 쫄지 마. 특히 유다 너.”
“제, 제가 언제요!”
유다는 마치 뭔가를 훔치다 걸린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한사코 부정했지만, 내 눈에는 다 보였다.
파그라시움 최고 흑마법사라도 한 번 데인 사람한테는 쪼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후후.”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달리아의 웃음소리였다.
‘요거요거, 딱 걸렸어.’
남의 연애사는 왜 이렇게 재밌을까. 달리아가 지금 유부녀이건 말건 나는 은근하게 눈꼬리를 휘며 달리아의 옆구리를 찌르듯이 물었다.
“너 왜 웃어?”
그러자 달리아는 화들짝 놀라더니 제 입가를 매만지며 더듬거렸다.
“네, 네? 제, 제가요?”
“그래, 너. 왜 웃냐니까?”
“제, 제가 언제 웃었다고!”
“참 나, 나 빼고 다 봄이야.”
달리아의 항변은 조슈아의 작은 투덜거림에 잡아 먹혔다.
라파엘을 거의 24시간 보좌하는 조슈아의 눈에 연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울까. 나는 슬쩍 미끼를 던져 보았고,
“왜, 사람 좀 소개시켜 줘?”
“저, 정말요?”
조슈아가 덥석 물었다.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뒤를 가리켰다.
“카밀라 모건이라고 있는…….”
“괜찮습니다! 안 외로워요!”
조슈아는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개를 서둘러 저으며 뒤로 물러났고, 가만히 듣고 있던 카밀라가 상처받은 얼굴로 조슈아에게 다가갔다.
“당사자 앞에서 너무하네. 내가 그렇게 별로예요, 조슈아?”
“아뇨, 훌륭하신 분이죠.”
음, 연쇄 살인마를 훌륭하다 해도 되나.
파그라시움 기준 훌륭한 사람은 맞지만.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어진 건지 조슈아는 도망치듯 말했다.
“아무튼 저희는 이만 감옥으로 가겠습니다.”
조슈아와 유다가 오베론을 인도받고 지하 감옥으로 떠나자 라파엘은 미리 비워 둔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방입니다.”
제일 좋은 방은 내가 쓰고 있으니 아마도 그다음으로 좋은 방일 것이다.
라파엘이 문을 열자마자 존재감 자체로도 시끄러운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내 귀에 꽂혔다.
“왔구나, 이쁜이!”
말해 뭐해, 목소리의 주인은 샬럿이었다.
샬럿은 한달음에 달려와 은근슬쩍 나를 품에 껴안으려 했지만 라파엘이 막아 버렸다.
“허락도 없이 누구 몸에 손댑니까.”
“치사해. 우리 이쁜이가 네 거니? 이쁜이 거지.”
“그러니까 이블린 허락을 받고 안으시라고요.”
샬럿이 얼굴은 웃는 모습 그대로 입술을 비죽 내민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저러다 삐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나는 라파엘의 팔을 조심히 치우고 샬럿에게 물었다.
“뭐야, 벌써 와 있었어?”
“그럼. 누가 오는 날인데.”
샬럿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웃는 얼굴이어도 알 수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나는 라파엘에게 물었다.
“라파엘. 폐하는 저기다 눕히면 돼?”
“아, 예. 저기다 눕히시면 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밀라는 조심스럽게 황제를 눕힌 다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치 6시만 되면 칼퇴하는 직장인처럼 산뜻하게 내게 통보했다.
“그럼 제 할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 볼게요.”
“아, 그럼 저도……!”
달리아가 허둥지둥 말을 얹었다. 아무리 둘이 호기심 대마왕이라 해도 황제가 깨는 순간에는 있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 심정을 이해하기도 했고, 뭣보다 자리를 피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먼저 말을 꺼내 준 게 나름 고마워 나는 드물게 둥근 말투로 대답했다.
“응. 수고했어. 밑에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
카밀라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양 않고. 가요, 달리아.”
“네, 카밀라 님.”
달칵. 카밀라와 달리아는 방을 나갔다.
그제서야 나는 황제를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초라하네.’
화려한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엔 몰랐는데 이렇게 소박한 침대에 눕혀 놓으니 평범한 중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슬며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복잡하고도 한심하면서도 측은한 얼굴로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예,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라파엘 바로 옆에 있는 내게도 간신히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아마도 그도 모르게 새어 나온 말이었을 거다.
나는 라파엘의 팔에 손을 올리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말했다.
“라파엘. 황제 좀 깨워도 될까?”
“…….”
그러나 라파엘은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대답하질 않았다. 나는 재차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
“아, 예. 부르셨습니까?”
두 번째 부름에서야 라파엘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얼빵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어지간히 심란한가 보네.’
하긴, 저주를 풀면 황제는 바로 깨어날 거다. 황제와 대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라파엘의 손을 꼬옥 잡고 그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아.”
“…….”
별말도, 별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라파엘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저 기분은 나도 안다.
기분이 복잡미묘할 때 누군가 어깨를 다독여 주면 금방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
라파엘이 젖은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분명 생물학적 친모일 뿐, 제게 변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마주 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돼. 안 괜찮으면 뭐 또 어때. 내가 있는데.”
잡은 손에 힘을 더하자 라파엘과 눈이 마주쳤다.
호수 같은 눈동자가 물에 젖으니 더 반짝거렸다. 마치 별빛 같았다.
라파엘을 웃게 해 주고 싶어진 나는 장난삼아 그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그리고 나도 저런 미친 인간이 친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 같은 심정일 것 같아.”
“푸흡.”
다소 패륜적인 내 말에도 라파엘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건 내 의도대로 라파엘은 웃었다. 라파엘이 두 손으로 내 손을 조심스레, 하지만 힘주어 잡더니 제 이마에 갖다 대었다.
“고맙습니다, 이블린. 정말로요.”
“알면 결혼으로 갚아.”
“그럴까요?”
“……농담이거든.”
사실 난 아직도 비혼주의자였다. 나와 결혼은 아직 다른 차원에 있는 단어 같았으니까.
내 농담 소리에 라파엘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 샬럿이 깐족거렸다.
“나도 심란한데 위로해 줄래? 이쁜아.”
“언니 멘탈은 튼튼해 보이니까 알아서 하시고요.”
“어머! 지금 나 언니라고 불렀니?”
“진짜 무슨 말 한 마디를 못 하겠네.”
솔직히 말은 이렇게 툴툴거려도 샬럿이 평소대로라서 안심했다.
일전에 샬럿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제 잡담할 시간은 없다. 나는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 라파엘과 샬럿에게 말했다.
“그럼 깨운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감고 황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달리아가 걸어둔 저주가 황제의 영혼을 어지럽게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엉켜 있는 실을 하나하나 풀어야 했겠지만 나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무엇보다 저주를 건 마력의 당사자였으므로 가위로 자르듯 황제에게 얽힌 저주를 싹둑싹둑 끊어 냈다.
‘이제 마지막.’
마지막 한 줄까지 끊어 내고 나는 눈을 떴다.
황제는 아직도 곤히 자고 있었다.
“왜 안 일어나지?”
샬럿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내 이마에서 땀이 삐질 흘렀다.
‘설마 실패했나?’
만약 실패했으면 쪽팔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만만하게 내가 저주 풀겠다고 다 말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내가 죽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뒤에서야, 황제의 무거운 눈꺼풀이 열렸기 때문이다.
“으으…….”
작은 신음과 함께 눈을 뜬 황제는 눈을 한참이나 깜빡거리더니 나를 발견했는지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공녀?”
아이러니하게도 황제가 가장 먼저 부른 건 친자식들이 아닌 나였다.
나는 한숨을 감추고 황제에게 물었다.
“정신이 좀 드세요?”
“공녀가 왜……. 분명 경합 중이었을 텐데…….”
어쩐지 황제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기억상실까지 안 간 게 다행인가. 경합 중이라는 것까지 기억하는 걸 보니 기억은 온전한 것 같았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황제에게 주변을 가리켰다.
“여기 또 누가 있나 보실래요, 폐하?”
“……?”
황제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샬럿을 발견하자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샤, 샬럿!”
“한참을 주무셨는데도 아직도 팔팔하셔라. 오랜만이에요, 어마마마.”
“네가 어떻게 여길! 여기가 어디라고!”
“외람되옵지만 제 자택입니다, 폐하.”
노여움에 찬 황제의 고성에 라파엘이 샬럿 대신 담백하게 대답했다.
“너, 너는…….”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황제의 고개가 바로 돌아갔고, 그녀의 두 눈에 라파엘이 담기자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아까 내 응원이 효과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황제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파엘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황자와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다시 허리를 천천히 올리며, 하나도 반갑지 않은 얼굴로 황제를 향한 인사를 건넸다.
“당신의 생물학적 친자가 처음 정식으로 당신께 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