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138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대관식까지 앞으로 이틀 전날 밤. 나는 카밀라를 불렀다.
“공녀님, 오랜만이에요~”
카밀라는 내 부름을 받자마자 거의 날아오듯 파그라시움에 도착했고, 곧바로 살랑거리며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아이참,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나 공녀님 기다리다가 목 빠져 죽을 뻔했잖아.”
나한테서 미친 인간들을 끌어당기는 페로몬이라도 나오나?
라파엘부터 시작해서 오베론, 샬럿, 카밀라까지. 내가 아는 모든 미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날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부채 끝으로 카밀라의 이마를 꾹꾹 밀어내며 질색했다.
“웃기지 마. 맨날 살롱 열면서 잘만 놀더라, 마그리타랑.”
“앗, 들켰네? 호호, 그 친구가 알고 보니 참 재밌는 친구예요.”
언제 내게 찰싹 달라붙었냐는 듯 떨어진 카밀라는 입을 가리며 재잘거렸다.
그리고 느슨하던 눈빛을 날카롭게 바꾸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귀찮고 위험한 일을 시키려고 절 부르셨어요?”
역시 자기가 맡을 일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고 있구나.
그래도 나는 뻔뻔하게 시장에 가서 대파나 사 오라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 좀 납치해 오라고.”
“어머.”
아무리 카밀라라도 놀라긴 했는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역시 조금 무리한 명령이었나? 싶기도 잠시, 카밀라가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물었다.
“아무리 내가 능력 있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 위험한 일 시키는 거 아녜요?”
“하기 싫다고?”
“설마. 공녀님한테 빚을 지울 수 있는 일인데 내가 왜 마다해요?”
호호, 하고 카밀라가 얄밉게 웃었다.
‘성공하면 그걸 빌미로 나한테 귀찮은 걸 요구하겠네. 각오해야지.’
다른 일을 명령했다면 무시했을 테지만 황제 납치라는 중요한 일을 성공시켰는데 입 싹 닦을 순 없지.
내가 한숨을 쉼과 동시에 카밀라도 제 뺨에 손을 얹더니 아쉬움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나저나 아쉬워요. 내가 황태자비가 됐으면 지금쯤 공녀님이랑 하하호호 티파티나 하고 있었을 텐데.”
“그럴 일 없을걸? 안 갔을 테니까.”
“쌀쌀맞긴! 그래서 좋은 거지만!”
카밀라의 앙탈에 나는 질린 얼굴로 응수했다.
“새삼 네가 황태자비가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황태자비 하라고 시킬 땐 언제고!”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지.
본론은 3분 만에 끝났는데 어째 잡담은 한 시간째 이어질 것 같다. 급격하게 피곤해진 나는 카밀라를 내쫓기 위해 슬슬 본론을 마무리했다.
“아무튼 황궁에선 달리아가 도와줄 거야. 잘할 수 있지?”
“황태자비는 언제 또 편으로 끌어들이셨대?”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카밀라에게 이래저래 설명하기는 귀찮아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카밀라도 그닥 궁금하진 않은지 내 성의 없는 대답은 신경 쓰지도 않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의 믿음직한 등 뒤에 대고 나는 말했다.
“그럼 믿고 있어, 카밀라.”
“저만 믿어요, 공녀님.”
카밀라가 뒤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역시, 카밀라를 파그라시움으로 끌어들이자는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부릴 수 있는 악당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라니까, 정말.
* * *
그날 새벽이었다.
달리아는 찰랑거리는 황금색 술 한 병을 들고 율리시즈의 방에 찾아왔다.
“전하, 계세요?”
책상 의자에 눕듯이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율리시즈는 뜻밖의 손님에 살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달리아인가?”
“네, 저예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달리아는 문을 벌컥 열고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죄송해요, 전하. 조금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
“물론 빈손은 아니에요. 한잔하시겠어요?”
율리시즈는 의심의 눈초리로 달리아를 바라보길 잠시, 그녀가 가지고 온 술에 눈길을 빼앗겼다.
겔라 50년산. 율리시즈가 좋아하는 술, 심지어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술이다.
‘저걸 달리아가 어떻게 구했지? 돈도 무엇도 없는 달리아가 구할 수 있는 술이 아닐 텐데.’
하지만 의심하느라 달리아를 돌려보내기엔 너무나도 귀한 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즉위식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축하하기에 딱 좋은 술이었다. 달아 보이는 술에 홀랑 넘어간 율리시즈가 자리를 권했다.
“앉아.”
“네, 전하.”
율리시즈는 찬장에서 손수 술잔을 두 잔 가져왔다.
달리아는 바로 술병을 따서 율리시즈에게 내밀었다.
“일단 한잔 받으세요.”
“…….”
율리시즈는 일단 잔을 내밀어 술을 받았다.
귀한 술이라 당장 마시고 싶었지만 아직은 성급했다. 율리시즈는 직접 달리아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권했다.
“달리아 네가 먼저 마셔 봐.”
“…….”
달리아는 조용히 술잔을 든 채 씨익 웃더니 단숨에 술을 들이켜 버렸다.
“하아.”
쓴 술을 눈 하나 찡그리지 않고 한입에 마셔 놓고, 달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가를 닦더니 싱긋 웃었다.
“어때요, 이러면 좀 믿음이 가나요?”
“……그렇군.”
달리아가 스스로 저주를 건 차를 직접 마실 정도로 독하다는 걸 모르는 율리시즈는 그제야 모든 의심을 버렸다.
그러기엔 너무 귀한 술이었기도 했고 말이다.
율리시즈는 드디어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향이 율리시즈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율리시즈가 피식 웃으며 달리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귀한 걸 잘도 구했군.”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달리아는 다시 율리시즈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율리시즈가 세 번째 잔을 비웠을 때, 달리아가 입을 열었다.
“전하를 배신한 것처럼 보였다면 죄송해요.”
“갑자기?”
취기가 오른 율리시즈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눈썹을 까딱였다. 달리아는 조금 서글픈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절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쪼로록, 달리아는 율리시즈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 주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전하를 배신한 적이 없어요.”
“또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군.”
벌컥벌컥. 율리시즈는 또다시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비웃었다. 그리고 달리아에게 척 빈 잔을 내밀었다.
“……오베론 마탑주 때문이죠? 절 의심하는 건.”
달리아는 술을 다시 채워 주며 말했다.
“제가 더 이상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숨긴 걸로 전하를 배신했다며 속살거렸겠죠. 하지만 저는 무서워서 차마 말을 미리 하지 못한 거예요. 제 쓸모를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그래서 용서해 달라?”
탁. 율리시즈가 빈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더니 벌게진 얼굴로 사납게 물었다.
술 취한 건장한 남자는 달리아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꿀꺽, 달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율리시즈는 그녀가 겁먹은 모습을 즐기며 달리아의 턱을 거칠게 붙잡았다.
“달리아. 나는 내 뒤통수를 치는 것들을 아주 싫어해.”
“읏.”
“웬만하면 대관식 날까지는 참아 주려 했는데 제 발로 이렇게 온 걸 갸륵하다 해야 할지, 어리석다 해야 할지.”
율리시즈가 술병을 낚아채더니 제 잔에 술을 한가득 채우며 달리아를 스산하게 노려보았다.
“달리아. 용서를 빌러 온 모양인데, 아쉽게 됐어. 난 그대를 살려 둘 생각이 없거든.”
꼴꼴꼴. 술이 잔에 넘쳐 흐를 때가 되어서야 율리시즈는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인생이 쓰다는 듯 아까보다 더한 기세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크으. 뭣도 없이 얼굴 반반한 것 하나 좋게 봐 줘서 황태자비로 삼아 줬더니 날 배신하고 말이야.”
그 많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켠 탓에 율리시즈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빨개졌고, 혀도 꼬여 있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마실 줄은 몰랐던 달리아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율리시즈를 말리려 했다.
“저, 전하. 너무 마셨어요. 이제 그만…….”
“시끄러워!”
율리시즈는 자신을 저지하려는 달리아에게 윽박을 지르고는 병째로 술을 다시 들이켜기 시작했다.
한 병을 전부 해치운 율리시즈는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검이 장식된 벽을 향해 걸어갔다.
“절대로 용서 못 해. 대관식까진 참으려 했는데 역시 안 되겠어.”
스르릉. 장식용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은색 검날을 자랑했다. 갑작스럽게 칼을 빼든 율리시즈에 당황한 달리아가 말을 더듬었다.
“저, 전하. 지금 무슨…….”
“달리아. 네 죽음에 대해서는 공녀에게 뒤집어씌워 줄 테니 너무 걱정 말아. 네가 거짓말을 한 전적 덕에 아무도 네 죽음을 의심하지 않고 수월하게 넘어가겠군.”
율리시즈가 검을 높이 쳐들었다.
달리아가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이었다.
쿠당탕, 챙그랑.
고통 대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달리아는 눈을 뜨고 율리시즈를 내려다보았다.
율리시즈가 갑자기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달리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전하의 말씀대로 전 거짓말쟁이가 맞아요.”
달리아는 살풋 웃으며 한쪽 발로 율리시즈의 머리를 짓밟았다.
“배신하지 않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니까요.”
머리를 잘근잘근 짓밟히고 있는데도 율리시즈는 깨어나지 않았다.
파그라시움에서 가져온 약 덕이었다. 무색무취의, 독으로 쓰일 정도로 아주 강한 수면제.
달리아는 미리 해독제를 먹어 두었기 때문에 잠들지 않았다.
원하는 만큼 율리시즈의 머리를 밟은 후, 달리아는 속 시원하게 웃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살짝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카밀라 님, 여기예요.”
그러자 평소의 화려한 드레스 차림 대신, 수수한 셔츠와 바지 차림의 카밀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리아는 흔쾌히 창문을 열었고, 카밀라는 가볍게 방 안에 들어와 상쾌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황태자비 전하. 아니, 그냥 달리아라고 불러 드릴까?”
“그래 주면 좋고요.”
달리아와 카밀라가 마주 보며 웃었다. 문득 카밀라는 바닥에 엉덩이를 치켜들고 엎어져 있는 율리시즈를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황태자 꼴 좀 봐. 술 잘 먹였나 봐요.”
“하아. 약효가 생각보다 늦게 돌아서 심장 좀 졸였어요.”
달리아가 우스갯소리처럼 내뱉었고 카밀라는 본론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선 어디 계세요?”
“본궁 꼭대기 층예요.”
“좋아. 그럼 갈 준비를 할까요?”
카밀라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목걸이를 꺼내 달리아의 목에 걸어 주었다. 달리아가 물었다.
“이건 뭐예요?”
“유다가 줬어요. 달리아가 거는 마법이 마탑에 잡히지 않도록 도와주는 교란 마법 아티팩트래요.”
“새삼스럽지만 정말 대단하시군요, 유다 님은.”
달리아가 홀린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카밀라가 두 팔을 번쩍 벌리고 달리아에게 말했다.
“자, 부탁해요.”
“네, 카밀라 님.”
달리아가 역시 두 손을 카밀라에게 뻗었다.
카밀라의 발밑으로 작은 빛이 떠오르더니 머리끝까지 집어삼켰다.
카밀라는 순식간에 율리시즈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제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준비물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남은 게 있었다. 달리아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본궁에 들어가기 위해선 암호가 있어야 해요.”
“달리아도 모르나요?”
“매번 바뀌어서요.”
“흐음. 그럼 이걸 써 볼까.”
“뭐죠?”
카밀라는 허리에 찬 작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의아하다는 달리아의 눈앞에 풀가지를 들이밀었다.
“짜잔, 수면초.”
누가 파그라시움의 사람 아닐까 봐, 카밀라는 온갖 도구들을 다 이고 황궁에 들어왔다.
아무튼 준비가 확실하니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는 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카밀라가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달리아에게 말했다.
“자, 그럼 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