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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37)화 (137/154)

137화 - 137화

“그, 그거 라파엘한테 있었어?”

말도 안 돼. 언제부터? 내가 사기 당할 땐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더니!?

나는 배신당했다는 얼굴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 역시 그게 찔리는지 면목이 없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더니 한참 후, 착잡한 얼굴로 내게 대답해 주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건 죄송합니다. 애초에 모친이 돌아가실 때 억지로 떠맡기고 간 물건이어서요. 조용히 살고 싶으면 그 보석을 끝까지 숨기라는 말도 남겼기에…….”

“아.”

선대 셀레스티안 후작이 떳떳하지 못한 인물인 건 라파엘에게 들어서 잘 안다.

그런 사람이 남긴 물건이니 찝찝해서라도 밝히지 못했을 거다.

다짜고짜 화를 낼뻔한 것이 미안해져 저절로 숙연해졌다.

우리의 어색한 공기를 깬 건 샬럿이었다.

“참고로 달리아의 광채는 곧 내 것이 될 거야. 전에 거래를 좀 했거든.”

그건 안 물어봤는데,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니, 잠깐만. 거래?”

“응. 이쁜이 재판 도와주는 것에다가, 내가 황실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모친이 숨기라 했다며. 그거 막…… 남한테 줘도 돼?”

“남이라니? 엄연히 이복남매인데. 뭣보다 누가 그런 인간들 말 들을까 봐?”

내 황당한 물음에 샬럿이 뭐 걸릴 게 있냐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폈고, 역으로 난 할 말이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남도 아닌 데다가 라파엘이 왜 그딴 부모의 유언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바꿨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보석이 보수인데?”

“율리시즈 놈을 몰아내고 내가 황제가 되려면 그게 필요하단다. 그래서 내가 탐내고 있었지.”

“필요하다니?”

“달리아의 광채는 데미안 공이 셀레스티안 후작에게 사랑의 증표로 선물해 준 거거든. 웃기지도 않지. 불륜한 게 뭐 자랑이라고.”

샬럿의 비아냥에 여태 모든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달리아가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팔을 문질러 댔다.

“그, 근데 왜 하필 이름이 달리아의 광채예요? 기분 나쁘게……!”

“셀레스티안 선대 후작의 이름이 달리아거든. 달리아 셀레스티안.”

샬럿의 대답에 달리아가 작게 구역질을 했다.

율리시즈 놈이 저 보석을 달리아에게 주겠다며 얼마나 꼴갑을 떨었는가.

제 친부모의 불륜의 증거를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물로 준다니, 제정신이 아닌 거다.

나 역시 토 나온다는 얼굴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토 나오는 우연이 다 있어…….”

달리아의 기분에 공감하던 나는 문득 모순을 느꼈다.

“잠깐. 근데 그건 두 사람의 불륜 증거일 뿐, 율리시즈 놈이 그 둘의 아들이란 증거는 되지 않잖아. 그걸로 어떻게 율리시즈를 쫓아낸다는 거야?”

내 질문에 달리아 역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샬럿에게 물어보았다.

샬럿은 대답 없이 가만히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마마마께선 자기 자식이 뒤바뀌었단 사실을 모르셔.”

“뭐?”

나는 정말이냐는 얼굴로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라파엘 역시 자신이 황제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답을 내어줄 수 있을 리 만무한데도, 그가 걱정되어 볼 수밖에 없었다.

샬럿 역시 라파엘을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만 알고 있던 거야. 어마마마는 그저 바람난 남편의 아이를 낳았다고만 생각하고 계셔.”

“어떻게 그럴 수가…….”

“데미안 공, 보통 작자가 아니었거든. 아주 지긋지긋한 인간이었어.”

샬럿은 옛날 일이 떠오르는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질문했다.

“이쁜이랑 다니면서 라파엘이 어마마마께 눈도장을 많이 찍었지?”

“그랬죠. 절 불러 세운 적도 있습니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라파엘이 겨우 대답했다.

라파엘의 심정을 알고 있을 텐데도 샬럿은 사람 속 긁는 성격을 죽이지 못하고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럼 눈치채셨겠네. 라파엘, 너 용케 안 죽고 살아 있다? 아니면 어마마마께서 널 죽일 타이밍을 재기도 전에 율리시즈에게 당하신 걸까?”

마치 세상에서 제일 우스꽝스러운 희극을 다 보겠다는 듯 샬럿이 킬킬댔다.

하지만 여기서 그 누구도 샬럿에게 동조하며 웃을 수 없었다.

장례식 분위기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달리아 역시 나와 같은 점이 신경 쓰이는지 입술을 옴짝달싹거리고 있었고, 라파엘은 더는 듣기 괴로운지 아예 고개를 샬럿으로부터 돌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묻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럴 때 내가 나서야지 누가 나서겠나. 나는 모두를 대신해 물었다.

“샬럿.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이쁜이.”

“라파엘이 친아들인 걸 알아챘는데, 왜 폐하가 라파엘을 죽인다는 거야?”

내 나름대로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비장한 각오를 하고 한 질문인데, 예상한 질문인지 샬럿은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데미안 공이 선대 셀레스티안 후작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유, 알고 있니?”

“……아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내가 생각한 황제는 자기를 욕보인 사람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데미안 공과 선대 후작의 불륜 사실을 모르지?’

두 사람은 죽었다. 황제가 처리한 게 확실한데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있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샬럿이 대답했다.

“어마마마는 황제란 누구에게도 얕보여선 안 되고, 누가 보더라도 가장 완벽한 사람이어야 해. 그러니까 그 똑똑하신 분이 제 친아들이 뒤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외면하시고 지금까지 일을 덮어 두셨지. 첫 번째 남편은 일찍 죽고, 두 번째 남편은 바람이 난 것도 모자라 제 아들까지 바꿔치기 당했다는 동정을 받는 것보다 나으니까.”

샬럿이 기가 차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기에 우리는 그 어떤 말도 함부로 건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보석을 가지고 어마마마를 협박할 거야. 당장 율리시즈를 내쫓지 않으면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완벽한 이미지를 다 망가뜨리고,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불쌍한 여자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

우리가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건가, 샬럿이 여느 때와 같은 활기찬 얼굴로 박수를 짝 치더니 화제를 돌렸다.

“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아. 어마마마를 깨우는 것이 먼저란다. 어마마마를 데려와 준다면 이야기는 내가 해볼게. 여기서 해산.”

“…….”

“응? 해산하라니까, 다들 안 가고 뭐하고 있니?”

샬럿이 재차 말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일어서지 않았다.

다들 이유는 똑같을 것이다. 샬럿과 황제를 대면하게 두어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감정이 고장난 것처럼 항상 싱글벙글 웃던 샬럿의 얼굴이 방금 무척 슬퍼 보였으니까.

“아무도 안 일어나면 나 먼저 일어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샬럿이 먼저 일어나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내 기분 탓일까, 샬럿의 뒷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 * *

달리아가 황궁으로 돌아온 건 새벽 해가 뜰 무렵이었다.

“다녀왔어요, 전하.”

“어서 와, 달리아. 어땠지?”

이미 상황을 다 알면서도 율리시즈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물었다. 달리아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는 척,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공녀가 그 보석을 부쉈어요.”

“그렇군.”

“죄송해요, 전하. 소중한 물건이라 하셨는데…….”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소중한 물건이니 꼭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 치고 율리시즈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진상을 아는 달리아는 율리시즈의 모습이 역겨웠다.

‘감히 그딴 걸 나한테 주려고 했었단 말이지.’

발푸르기스의 밤 때를 떠올린 달리아는 소매가 긴 옷이 팔에 오소소 돋은 닭살을 숨겨 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는 율리시즈나 이블린이나 똑같이 돈 많은 것들이 가지가지 한다며 눈꼴 시려웠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블린이 그 보석을 가로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하마터면 제 왼쪽 약지 손가락에 불륜의 증거가 자리할 뻔하지 않았는가.

‘그보다 내 배신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다는 건, 대관식 날 나를 처리하겠다는 뜻이겠지.’

분명 흑마법 심판으로 자신을 죽일 것이다.

흑마법 심판의 주체가 되는 돌 따위, 오베론이 얼마든지 가짜로 바꿔 누명을 씌울 수 있으니까.

이제 둘 사이에 전과 같은 사랑은 없었다.

그저 언제든지 서로의 목을 물기 직전의 살벌함만 있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볼게요, 전하.”

“그래, 들어가서 쉬어. 대관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

달리아는 아무것도 모르고 속 편하게 웃는 율리시즈를 속으로 비웃었다.

‘끝나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될걸.’

달리아는 율리시즈를 향해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율리시즈는 그 웃음에 의구심을 품지 못했다.

그건 달리아가 황제를 깨워 가며 자폭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기에 느끼는 여유였다.

* * *

달리아가 돌아가자마자 율리시즈는 커다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공녀가 그걸 제 손으로 부숴 줬을 줄은! 괜히 걱정했어.”

하지만 오베론은 찝찝한 얼굴로 율리시즈에게 첨언했다.

“전하. 기뻐하시긴 이릅니다. 공녀 역시 흑마법사입니다.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이 세상에 그대가 건 흑마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다고?”

오베론의 충고는 율리시즈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율리시즈 역시 그 보석을 부숴 버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바라 마지않던 일이 이렇게 잘 풀리니 다른 방해물 따위가 율리시즈의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다.

생각 없이 기뻐 날뛰는 율리시즈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오베론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블린의 짓이야. 이블린이 내 마법을 알아채고 수작을 부린 거야.’

하지만 어느새 그렇게 성장한 거지?

아무리 이블린이 모든 힘을 되찾았다고 한들, 제가 건 마법을 교란시킬 수가 있나?

오베론은 폼으로 마탑주가 된 게 아니다. 이블린이 오베론보다 한참 마법 응용력이 떨어지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다.

문득 이블린이 율리시즈를 살리지 못해 엉엉 울던 그때가 생각났다.

‘도와줘, 오베론!’

……사람을 살리는 흑마법은 확실히 직접 찾아보지 않는 이상 알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블린은 처음부터 오베론을 믿지 않고 자신의 모든 실력을 보여 주지 않았던 걸까?

‘젠장할.’

오베론이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이블린, 이블린, 이블린!’

이블린 너만큼은, 날 완벽히 이해하고 구해 준 나만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블린은 처음부터 오베론을 믿지 않았다.

오베론은 이제야 깨달았다.

라파엘을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이블린의 배신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용서 못 해.’

남자 때문에 자신을 버린 거라면 언젠가 다시 제게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지금 산산조각나다 못해 가루가 되어 버렸다.

오베론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대관식까지 앞으로 이틀.

이블린은 율리시즈의 대관식을 망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다.

오베론은 지금도 철없이 신나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율리시즈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전하. 황태자비 전하는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응?”

“이미 공녀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황후의 자리에 앉혀 두실 거냔 말입니다.”

“아아.”

율리시즈가 이해했다는 듯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재판 때 차마 하지 못했던 흑마법 심판을 벌여 쫓아낼 거야. 감히 날 배신했는데, 정상에 올랐다가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 정도는 내 줘야 하지 않겠나?”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같은 의견에 오베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이블린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며, 오베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고 봐, 이블린. 날 버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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