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136화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막 잠자리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편지 모양 빛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반쯤 누운 자세로 멀뚱멀뚱 의문의 편지를 바라보다 이내 떠올랐다.
“이거 달리아가 쓰던 마법이잖아?”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나는 허공에 떠오른 편지 모양 빛을 가볍게 터치하며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달리아의 메시지가 머릿속에 흘러 들어왔다.
[황태자와 마탑주가 손을 잡았어요. 그리고 공녀님이 갖고 계신 물건을 탐내고 있어요!]
상당히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아오, 망할. 대관식 전까지는 마음 놓고 잘 수도 없는 거냐고. 나 같은 잠꾸러기 미인한테 수면 부족은 악재인데!
‘그래도 어쩌겠어. 율리시즈 놈이랑 오베론 놈 족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 둘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 그때까지만 참자며, 나는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외출복을 걸쳤다.
답장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파엘의 저택으로 와.]
라파엘, 너네집 좀 아지트로 빌릴게.
물론 라파엘의 허락은 받지 않았지만 라파엘 집이 내 집이고 그런 거지 뭐.
나는 그런 뻔뻔한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나는 이동 마법으로 순식간에 라파엘의 집에 도착했다.
‘이블린 때 기억이 다 돌아오니 이건 좀 편하네.’
예전에는 마법? 그거 어떻게 쓰는 건데, 이런 식으로 마법을 쓰는 것이 막막했다면 지금은 아, 이게 하고 싶다, 라고 생각한 동시에 어떻게 마법을 쓰면 될지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와 똑같이 마법을 써 도착한 달리아가 내가 있는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달리아는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던 모양인지 잠옷 차림에 외투 하나만 걸친 나와 다르게 달리아는 아까 치료실에 찾아왔을 때 옷차림 그대로였다.
“갑자기 죄송해요, 공녀님.”
“아니야. 얼른 앉고 아까 얘기나 계속…….”
잠깐. 이게 뭐지? 달리아를 둘러싼 공기가 이상했다.
문득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달리아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뺨이라도 때리는 줄 알았는지 움츠러든 달리아는 기다리고 있던 따끔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뜨며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고, 공녀님?”
“쉿.”
나는 가만히 집중하고 달리아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조사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달리아에게 오베론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도청에 감시……? 가지가지 하잖아, 진짜?’
혹시 몰라 파그라시움으로 부르지 않고 라파엘의 저택으로 부르길 잘했다.
바로 오베론의 마법을 치워 버리려던 순간, 나는 멈칫했다.
‘오베론 그 새끼가 달리아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일단은 이렇게 해 두기만 할까.’
무작정 치워 버리는 것보다는 복잡했지만 이블린의 기억 버프로 어떻게든 됐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달리아의 표정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놀란 토끼처럼 떨고 있는 달리아의 뺨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미안. 오베론이 널 제대로 감시하려는 것 같아서 잠깐 손 좀 써 놨어.”
“가, 감시요?”
“그래. 지금은 괜찮으니까 마음 놔.”
“…….”
그런데 달리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안심했다기엔 묘한 얼굴이었다.
내 얼굴이 예쁜 건 인정하지만 그렇게 보고 있으면 닳는다. 나는 괜히 까칠하게 물었다.
“뭘 그렇게 봐?”
그러자 달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 아니…… 왠지 오베론 마탑주의 마법을 알아챈 게 의외라 해야 할지 대단하다 해야 할지…….”
“나 무시하니? 이래 봬도 옛날에는 내가 꽤 대단한 흑마법사였거든?”
“하긴, 그래서 제가 공녀님의 힘을 탐냈었죠.”
멋쩍게 웃으며 달리아가 납득했다.
아무튼 방해꾼은 이제 없다.
나와 달리아는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서 율리시즈 놈이 뭘 탐낸다고?”
“달리아의 광채요. 자기에게 있어 중요한 물건이라면서 저보고 빼앗아 오랬어요.”
“하여튼 음침한 새끼들.”
내가 짜증난다는 듯 중얼거리니 달리아가 또 풋 하고 웃었다.
뭐가 웃겨? 그런 식으로 노려보니 달리아가 헤실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공녀님께서 욕도 쓰시는구나, 하고.”
“…….”
뭐야, 이 분위기. 내가 달리아를 도와주기로 했지만 이건 너무 친해 보이잖아.
이런 낯간지러운 기분은 질색이다. 나는 남아 있던 싸가지를 탈탈 털어내고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런데 어쩌나. 달리아의 광채는 나한테 없는데.”
“네?”
태평하게 웃고 있던 달리아의 입가가 싹 굳었다.
나는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도박장에서의 그날을 떠올리며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애초에 경매에 나왔던 게 가짜였거든. 부쉈어, 그래서.”
“부쉈다고요? 분명 400골든을 주고 사지 않으셨…….”
달리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입을 틀어막다가도 내 성깔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이해했다.
“공녀님이라면 그럴 수 있죠.”
어쩐지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나는 뒤늦게 아차 했다.
‘맞다. 그러고 보니 달리아가 돈으로 꽤나 고생 좀 했지.’
거지 앞에서 돈자랑 하는 브루주아의 말로는 항상 참수였다.
“아, 아무튼. 율리시즈가 그렇게 악을 쓰고 찾으려고 한다면, 달리아의 광채가 율리시즈의 약점이라는 건가?”
내가 아까 털어 없애 버렸던 싸가지를 다시 주워 담고 말을 돌린 순간이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와 달리아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는 설마 하며 목소리가 들린 응접실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예상 안의 인물 한 명과 예상외의 인물 한 명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샬럿이랑, 라파엘?”
“안녕, 이쁜이. 그리고 달리아.”
“좋은 밤입니다, 이블린. 저택에 이블린 말고 다른 한 사람이 더 있다는 보고를 받아서 와 봤습니다.”
라파엘은 대놓고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는 듯 다소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보나마나 뻔했다.
응접실에 나 말고 누가 있는지 살짝만 엿보려던 라파엘을, 야식을 찾아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샬럿이 발견하고 무작정 쳐들어온 거겠지.
샬럿은 척척 다가와 달리아의 맞은편에 앉더니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얘기 계속해 봐. 율리시즈가 달리아의 광채를 찾는다느니,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말이야.”
“아, 그거.”
딱히 라파엘과 샬럿에게 비밀로 할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라파엘에게도 앉으라고 한 순간이었다.
“그럼 세 분이서 이야기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라파엘이 조금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라파엘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라파엘! 안 들어도 돼?”
라파엘은 안색이 순식간에 좋지 않아져서는 내 시선을 회피했다.
“죄송합니다, 이블린. 저는 듣고 싶지…….”
“라파엘. 너도 들어야지.”
라파엘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샬럿이 조용히 타일렀다.
“너와 관련된 이야기잖아.”
“어?”
달리아의 광채랑 라파엘이 왜 관련돼 있어? 의아해하는 나와 달리아를 보며 이해한다는 듯 샬럿은 라파엘의 의사를 깡그리 무시하고 나불나불거렸다.
“너희한테 숨겨서 뭐하겠니. 달리아의 광채는 말이야.”
“샬럿 황녀. 그만하시지요.”
라파엘이 살벌한 눈으로 샬럿을 째려보았다. 그녀는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치더니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 그 보석이 왜 율리시즈에게 중요한 건지 아니?”
“샬럿 황녀.”
얘네 남매 맞아? 이러다 여기서 살인나게 생겼다.
도대체 달리아의 광채와 라파엘에게 무슨 연관이 있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그냥 보내고 싶지만 왠지 샬럿의 말을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샬럿이 또라이처럼 행동은 해도 나름 생각이 있는 또라이니까.
“라, 라파엘. 일단 얘기만 들어 보자. 응?”
나는 라파엘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의 팔을 흔들며 설득했다.
라파엘은 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물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이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결국 라파엘도 이 이야기에 끼는 것이 되었다.
그에 샬럿은 흡족하게 웃으며 아까의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없니?”
그러자 달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실례지만 그 전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그래, 말해 봐.”
샬럿은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달리아는 라파엘의 눈치를 보더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비장하게 물었다.
“……혹시, 후작님께서 폐하와 데미안 공의 친자인가요?”
“어머.”
샬럿이 입을 가리고 살짝 놀랐다. 나와 라파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결코 달리아에게 그 사실을 말해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낸 거지? 샬럿이 우리를 대신해 물었다.
“누가 말해 줬니?”
“아뇨. 데미안 공의 액자를 우연히 봤거든요. ……황제 폐하와 데미안 공을 나란히 놓고 보니, 후작님이 떠올랐어요.”
이게 여주인공 버프라는 건가? 아니지. 내가 알던 원작은 사실 과거였으니 그저 달리아의 관찰력이 좋은 것 같았다.
‘만만히 보면 안 되겠네, 마탑 출신 마법사…….’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샬럿이 대놓고 달리아를 칭찬했다.
“예리하네. 사실 라파엘이 데미안 공을 많이 닮은 건 아닌데.”
어쩐지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나만 데미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라파엘한테 불륜 저지른 친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볼 수도 없고.’
나만 데미안의 얼굴을 모르는 게 달리아의 눈에도 훤했나 보다. 달리아는 마법으로 어떤 남자의 사진을 띄워서 보여 주었다.
“이 사람이 데미안 공이에요.”
“…….”
데미안 공은 곱슬거리는 파란 머리에 금안을 가지고 있었다.
입가에는 고집이 세 보이는 주름이 많았고, 눈꼬리는 매섭게 올라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심술 궂어 보인다는 인상이었다.
정말로 라파엘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그렇다고 라파엘이 황제와 닮은 것도 아니니, 황제와 같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율리시즈가 황제와 데미안의 친자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라파엘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며 샬럿에게 물었다.
“그래서 달리아의 광채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데?”
샬럿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율리시즈가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물이야. 지금은 라파엘이 갖고 있지.”
나와 달리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