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134화
파그라시움으로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유다를 치료한 것이었다.
유다의 몸에 남아 있는 오베론의 저주는 아주 쉽게 풀렸다.
눈을 뜬 유다는 내가 모든 힘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 그럼 저 이제 10년 치 연봉 일시불 수령하는 거예요!?”
이 새끼가 진짜.
하지만 내가 힘을 모두 되찾은 데에는 파그라시움의, 특히 유다의 공이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라파엘에게서 손을 척 내밀었다.
그러자 라파엘이 미리 준비해 둔 돈주머니를 내게 건네주었고, 나는 그걸 그대로 유다에게 척 내밀었다.
“자. 고생 많았어.”
“공녀님……!”
왈칵, 유다는 묵직한 돈자루를 혹여 빼앗길세라 품에 꽈악 붙들고는 감동의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진짜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그래. 네 건 특별히 다른 흑마법사들보다 더 넣었어. 감옥 가랴, 저주 걸리랴, 네가 특히 고생 많았으니까.”
“공녀님…….”
유다는 여차하면 내 발닦개라도 자처할 기세로 충성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이상은 안 된다고 느꼈는지 라파엘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나와 유다의 아이컨택을 막았다.
“그만 봐.”
눈이 가려졌는데도 유다가 굴하지 않고 물었다.
“공녀님. 뭐 또 시키실 일 없으세요?”
“없어. 있어도 내가 할 테니 네 도움은 필요 없어.”
라파엘이 딱 잘라서 단호하게 대답하자 유다가 화색이 되어 덥석 미끼를 물었다.
“어, 그럼 저 퇴사해도 되는 부분인가요?”
이 새끼가? 큰 그림 잘 그리네?
그 순간, 나와 라파엘의 어이가 동시에 탈출했다.
한번 입사하면 죽을 때까지 퇴사하지 못하는 불지옥 직장에서 이렇게 탈출할 생각을 하는 건 유다밖에 없을 거다.
라파엘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너는 진짜…….”
“저 쓸모 없다며요, 보스.”
“누가 그렇게까지 말했어. 공녀님에 대한 일에만 신경 끄라 했지.”
“쳇, 쪼잔하시긴.”
유다 이 자식, 죽고 살아난데다 평생 놀고먹을 돈을 일시불로 수령해서 그런지 간덩이가 부었다.
나조차 이렇게 생각하는데 라파엘은 오죽할까.
슬쩍 옆을 보니 라파엘이 싱긋 웃으며 유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다는 불안을 감지했지만 이미 늦었다.
“저, 저 보스.”
“그래. 다 죽어 가서 피범벅이 된 너를 부축하느라 내 옷을 버리게 된 데다, 비록 자의는 아니더라도 어쨌건 네가 휘두른 칼에 나까지 저주에 걸리게 됐지만 나는 네 퇴사를 허락하지 못하니 쪼잔한 보스가 맞지. 그렇지?”
“아, 아니. 그게요, 보스.”
“왜. 나 쪼잔하잖아. 길바닥에서 다 죽어 가는 거지 소년의 재능을 발견하고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놓고 큰돈 주고 고용까지 시켜 줬더니만, 내 약혼녀께 더 큰돈을 받자마자 은혜고 뭐고 바로 일 그만두고 한적한 시골에 저택이라도 사서 탱자탱자 놀고먹을 생각을 하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정도로 쪼잔하지. 그렇지?”
큰돈으로 팽창했던 간덩어리가 다시 원래의 조그마한 크기를 되찾은 듯 유다의 입이 꾹 다물렸다.
라파엘은 제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유다의 턱을 잡고 말을 이었다.
“정 네가 퇴사하고 싶으면 하든지. 대신 그동안 내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키운 값은 그대로 돌려주고 가야 할 거야. 그러면 네 노후 연금도 상당히 줄어들겠지, 그치? 파그라시움의 귀한 인력을 사용해 별 볼 일 없던 거지 소년에게 흑마법을 가르쳐 준 값은 상당히 비싸…….”
“누누누, 누가 퇴사한다고요!”
어느새 유다는 평범한 소시민 직장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됐어, 통했네.
혹시라도 라파엘에게 빼앗길세라 내가 준 돈주머니를 아까보다 더 세게 껴안은 채 유다는 아까보다 더 굳은 충성을 입에 담았다.
“제가 태어난 곳은 파그라시움이고 묻힐 곳도 파그라시움이라고요! 그런 제가 무무무, 무슨 퇴사를! 진짜 당치도 않아요, 보스!”
"응? 아까 퇴사해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았나?”
“그, 그건…….”
유다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누가 내 약혼녀한테 시선을 줘도 된다고 했지?”
라파엘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 스산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흡. 둘이서 뭐하는 거야, 진짜. 유치해서 못 살겠네.”
“제가 유치하다고요?”
라파엘은 그런 말을 살면서 생전 처음 들어 봤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물었다.
뭘 처음 안 것처럼 말하지?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유다. 너한테 인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대.”
“저한테요?”
유다가 별 생뚱맞은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자신을 가리켰다.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유다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쾅! 하고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은발의 미인이 헐레벌떡 치료실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유다를 애타게 불렀다.
“유다 님!”
“헤, 헤베 영애?”
그랬다.
유다를 찾아온 사람은 바로 달리아였다.
사실 유다를 치료하기 전, 달리아에게 몰래 연락을 넣었었다
오베론에게서 힘을 빼앗아서 유다를 치료해 뒀으니 걱정 말라고 말이다. 그 소식에 달리아는 감격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 당장 갈게요!’
‘너 율리시즈 감시는 어쩌고?’
‘요즘 하루 종일 폐하의 침실에 틀어박혀 있어서 잠깐 정도는 괜찮아요!’
나는 달리아의 성질 급했던 전보를 떠올리며 몰래 킥킥 웃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달리아는 어느새 침대에 엎어져 눈물을 콸콸 쏟아 내고 있었다.
“저는 저 때문에 유다 님이 어떻게 되시는 줄 알고…… 정말 그렇게 된다면 공녀님을 뵐 면목이 없어져서……! 으흑윽!”
“헤, 헤베 영애! 울지 마세요! 저, 저 그러니까…….”
“그러게 도망치시라니까, 왜 굳이 싸우겠다 그러셨어요! 흐어엉!”
유다가 허둥지둥 달리아를 달래려 했지만 그녀의 울음은 그치질 않았다. 유다에게서 또 도움을 바라는 눈빛이 우리에게 닿았다.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대놓고 말했다.
“라파엘, 우린 비켜 줄까?”
“예, 그러죠.”
“보스! 공녀님!”
우리는 유다의 절박한 외침을 뒤로하고 멋지게 퇴장했다.
어쩐지 유다의 얼굴이 시뻘건 게, 모든 일이 끝나면 조만간 재밌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 * *
그 시각,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말대로 황제의 침실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황제의 머리맡에 걸터앉아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어마마마.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제가 황제가 되고 당신이 고인이 될 날이 말이에요.”
“…….”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하필 어마마마가 이런 상태라 못 묻는다는 게 한이네요.”
“…….”
“정말로 제가 공녀와 약혼을 하려 했나요? 우리가 어려서부터 친한 사이가 정말 맞았는지…….”
“…….”
아무리 혼자 떠들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율리시즈는 이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잠깐 스스로가 한심해졌으나, 어차피 한 달 후면 못 볼 사람을 상대로 말 몇 마디 걸어 줬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못 보일 꼴도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 봐야겠습니다. 그럼.”
“…….”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 편했다. 황제가 여태 제게 좋은 말이나 해 준 적이 있던가.
제 방으로 돌아온 율리시즈는 곧바로 책상을 등지고 있는 넓은 창가에 서서 율리시즈는 곧 제 것이 될 제국을 내려다보았다.
‘율리시즈 황자는 아무리 그래도 황제 감은 아니지.’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르는 샬럿 황녀보다도 확연이 뒤처져.’
‘황제 폐하처럼 완벽하신 분에게서 어떻게 저런 아들이 나왔을까.’
율리시즈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향한 조롱과 멸시가 익숙했다.
샬럿과 황제를 추켜세우는 말들도.
이제 자신이 황제가 되면 그 누구도 율리시즈에게 찍소리 하나 못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황제가 된 자신을 추켜세우기 위해 샬럿과 어머니를 깎아내리겠지.
상상만 해도 온몸에 전율이 감돌았다.
‘그리고 프라비체 공작가가 쥐고 있는 그 권력도, 자신이 황제가 되면 모조리 짓밟아 놓을 거야.’
내가 이블린을 죽이려 했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오히려 악랄한 인간들의 딸인 이블린이 자신을 죽이려 했으면 몰라, 자신이 그럴 리가 없다.
‘그 콧대 높은 공녀가 내게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고 싶어 미치겠군.’
얼마나 짜릿할까.
그동안 나를 깔보고 함부로 대한 만큼 자신도 똑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주리라.
율리시즈가 한창 행복한 상상에 젖어 있는 그때, 문밖에 있던 시종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고했다.
“저, 황태자 전하. 오베론 마탑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마탑주가?”
율리시즈는 의아해했다. 오베론이 달리아를 찾는다면 몰라, 자신을 왜 찾지? 분명 자신과는 딱히 접점이 없을 터인데.
“들라 하라.”
어쨌건 그가 찾아온 의도가 궁금하여 율리시즈는 명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문이 조용히 열리고 마탑의 로브를 뒤집어쓴 은발의 미남이 당당히 들어왔다.
자리조차 권하지 않고 율리시즈가 오만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오베론 마탑주?”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길래 이 야심한 시간에 언질도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오지?”
율리시즈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한가한 한량이라고 여겨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황제가 불러도 바쁘다 바쁘다 핑계를 대며 대담하게 굴던 이기에 반발심은 더했다.
하지만 이어진 오베론의 말에 방금까지의 불만이 싹 휘발되었다.
“전하의 편이 되어 드리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