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133화
며칠 지나지 않아 이블린은 가족들에게는 부티크에 간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아무도 몰래, 매그너스 후작저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후작.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어서 와요,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그너스 후작은 밝은 얼굴로 이블린을 반갑게 맞이했다.
마탑 로브를 걸칠 땐 몰랐는데,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매그너스 후작은 참으로 친절하고 우아해 보이는 귀족이었다.
그랬기에 이블린의 경계심은 가랑비에 젖듯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갔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매그너스 후작이 등 뒤에 숨은 누군가를 끌어당겼다.
“앗……!”
등 뒤에 숨어 있던 건 자신보다 훨씬 더 어른처럼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등 뒤에 누가 있었어? 그것보다 저렇게 막 끌어당겨도 되는 거야?
이블린이 느끼는 사소한 의문들은 마치 일상인 듯 매그너스 후작은 개의치 않고 남자아이의 어깨를 잡고 생긋 웃었다.
“전에 말한 제 아들이에요. 인사하렴.”
“……오베론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공녀님.”
마치 한참이나 윗사람을 대하듯, 오베론은 허리를 깍듯하게 숙이며 인사했다.
이블린은 위화감을 느꼈다.
이블린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난 이블린 프라비체. 잘 부탁해.”
“……?”
오베론은 설마 누군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이블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래는 오늘 하루만 얼굴을 보고 말 작정이었다. 하지만 오베론이라고 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사자처럼 부스스한 백발, 생기라고는 없는 붉은 눈동자, 세상 모든 불행을 끌어안고 있는 표정.
이블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아이에겐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다섯 살이면 다 컸으니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나이야.’
정작 오베론은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은 많아 보였지만 이블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매그너스 후작의 말에 이블린은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다.
“뭐해? 나 팔 아파.”
“아……!”
이블린의 엄살에 오베론은 우물쭈물, 이블린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게 이블린 프라비체와 오베론 매그너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이블린이 매그너스 후작이 생각보다 약하고, 오베론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블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몰래 매그너스 후작저에 놀러온 이블린은, 검은 고양이 인형을 괴롭히듯 주무르고 있는 오베론을 향해 물었다
“오베론. 너는 네 엄마보다 강한데 왜 네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살아?”
“어, 어?”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인지 오베론은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인형을 떨어뜨렸다.
그 탓에 옷이 흘러내려 어깨에 있는 시퍼런 멍이 드러났다. 이블린은 질린다는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또 맞았구나? 나였으면 진작 죽였겠다.”
“그, 그런 말 마!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아니, 그 전에 내가 어머니보다 강하다니! 어머니는 나 따위보다 훨씬 강한 분…….”
“내가 보기엔 별 볼 일 없던데? 내가 조금만 크면 바로 이기겠다.”
“그, 그런!”
“진짜라니까? 너처럼 힘을 가지고도 썩히는 사람은 몇 없을걸? 후작도 그냥 네가 질투나서 괴롭히는 거 아냐?”
이블린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마음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강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이블린에겐 오베론의 모습이 너무나도 답답했기 때문이다.
결국 참다 못하고 이블린이 물었다.
“내가 도와주면?”
“네가 도와준다고……? 어떻게…….”
기다렸다는 듯, 이블린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소파에서 뛰어 내려와 바닥에 앉아 있는 오베론의 귀에 속닥거렸다.
오베론의 눈이 커다래졌지만, 이블린은 할 수 있다는 듯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검지 손가락 끝을 그에게 내밀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싶기도 잠시, 이블린의 손가락 끝에서는 보라색 나비가 한 마리 피어 나왔다.
“이게 대체…….”
“내 힘의 일부야.”
“네 힘의…… 일부?”
“나 흑마법사거든.”
전에 없이 오베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오베론은 생각보다 눈이 큰 아이였다. 이블린은 그 모습을 발견한 게 자신뿐이라는 게 신났고, 더 나아가서는 그가 자신만만하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이블린은 나비를 날려 보내 오베론의 이마에 제힘을 불어넣었다.
“이걸로 뭘 할지는 네가 결정해.”
그리고 이블린은 돌아갔다.
그 뒤로 한참 동안이나 이블린은 오베론의 집에 찾아가지 못했다. 몰래 바깥에 다녀온 걸 프라비체 부부에게 딱 들켰기 때문이었다.
“이블린 너, 또 엄마 아빠 걱정시키기만 해 봐! 용돈 끊을 거야!”
이블린은 침대에 틀어박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 옆에서 소피는 이블린의 화에 부채질을 가했다.
“그러게 왜 맨날 말도 없이 사라지셔서는.”
“소피 너만 입 다물고 있었으면 됐거든?”
“어떻게 그럽니까. 주인 내외분께서 제게 아가씨가 어딨느냐고 찾으시는데.”
“이익, 다 너 때문이야!”
이블린은 단단히 삐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고, 이블린은 퍼뜩 생각났다는 듯 이불 속에서 힘차게 나오더니 소피에게 물었다.
“잠깐, 소피. 오늘 며칠이지?”
“말일입니다.”
말일! 한여름의 말일은 오베론의 생일이었다. 이블린은 얼굴을 사정없이 찡그렸다.
‘하필 오늘 들킬 게 뭐야!’
오베론의 생일을 축하해 줘야 하는데! 친구도 자신밖에 없는데 축하는커녕, 매그너스 후작에게 괴롭힘이나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아까 프라비체 부부에게 혼이 난 건 기억도 안 난다는 듯이, 이블린은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소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예? 잠깐, 아가씨! 아가씨, 어디 가십니까!”
소피가 애타게 이블린을 불렀지만 이미 이블린은 이동 마법을 써 침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매그너스 후작저 대문 앞에 도착한 이블린은 서둘러 대문을 열었다.
‘설마 소피가 의리 없게 또 일러바치진 않겠지.’
그러면 그땐 진짜 해고일 줄 알아, 라며 이블린이 다짐한 그 순간이었다.
저택이 유난히 조용했다.
고용인들이 없는 거야 그렇다 쳐도, 불안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설마.’
이블린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오베론의 방으로 달려갔다.
“오베론!”
벌컥,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쿵.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따끈한 피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다음에 보인 건 바닥에 쓰러져 피로 머리를 붉게 물들인 매그너스 후작과, 그 앞에 서 있는 오베론이었다.
“오베론.”
이블린은 오베론을 다시 한번 불렀다. 오베론은 이제야 이블린을 발견한 듯,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이, 이블린. 네가 왜…….”
이블린은 다시 시선을 내려 쓰러진 매그너스 후작을 눈에 담았다.
지금 이 감정은 뭘까. 기쁜 걸까?
‘그래. 기쁜 것 같아.’
이블린은 지금 기뻤다.
오베론이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스스로 생일 선물을 챙기다니!
이블린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오베론을 칭찬했다.
“생각보다 추진력이 있구나?”
“아, 아냐. 내가,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오베론은 마치 누명이라도 쓴 듯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하나도 듣지 않고 딱 한 마디를 건넸다.
“생일 축하해, 오베론.”
“……어?”
“생일 축하한다고. 넌 오늘부터 다시 태어난 거야. 이제 네 마음 가는 대로 살아.”
이블린은 오베론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오베론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마음대로……?”
“응. 네 마음대로.”
네 마음대로. 이 말이 오베론의 심금을 울렸는지, 오베론은 계속해서 그 말만을 되뇌었다.
문득 오베론은 매그너스 후작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해사하게 웃는 이블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모습이 께름칙하게 보일 만도 하건만, 그날 오베론에게 이블린은 구세주였다.
생일을 챙겨 주고, 스스로 구원을 할 수 있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구세주.
“내, 마음대로.”
결심하듯 아까와 다르게 힘있게 읊조린 오베론은 천천히 이블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구세주를 대하듯 이블린의 구두 끝에 입을 맞췄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이블린. 난 앞으로 널 위해서 살게.”
* * *
내가 천천히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오베론이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내가 그렇게나 널 도와줬는데!”
기억이 돌아오니 그가 우는 것이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미안함이 느껴지긴커녕 괘씸했다.
나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며 오베론에게 일침을 날렸다.
“애초에 내가 먼저 널 도와줬으니까 네가 날 도와준 거잖아.”
“……!”
“네가 흑마법사가 되었던 것도, 그래서 그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내 덕 아니야?”
오베론은 예상대로 가정에서 학대를 당했다.
그걸 우연히 발견하고 도와준 게 바로 나, 이블린이었다.
오베론은 두 손으로 풀을 꽈악 움켜쥐더니, 이윽고 고개와 함께 몸을 축 늘어뜨렸다.
더 이상 반항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샬럿과 라파엘은 오베론의 몸 위에서 물러났다.
그러자마자 오베론이 흐느끼듯 말했다.
“……네가 미워, 이블린.”
“언제는 안 미워할 거라더니 태세 전환 봐라?”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파엘에게 팔짱을 끼며 얄밉게 말했다.
“그래도 너한텐 고마운 점이 하나 정돈 있네. 네 덕에 라파엘을 만났으니까.”
오베론의 얼굴이 번쩍 들려졌고, 나는 라파엘을 향해 그치? 하며 물었다.
라파엘은 아까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심통난 얼굴로 라파엘의 볼을 꼬집었다.
“난 정말로 신경 안 써. 내 선택에 의한 결과였어, 전부. 그러니까 네가 가질 부채감은 필요 없어. 기억나지도,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나한테 미안해할 시간에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마디라도 더 하는 게 좋아, 나는.”
그래서 대답은?
나는 장난기 넘치게 웃었고, 그제야 라파엘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이윽고 라파엘도 웃음을 띤 얼굴로 내게 화답해 주었다.
“예. 사랑하는 당신과 이렇게 연인이 될 수 있었으니, 그것 하나는 이자에게 감사해야겠군요.”
그러자 오베론의 반반한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나한테 이러고도 너희들 계획이 잘 끝날 수 있을 것 같아?”
“아,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거고요. 네 역할은 사랑의 큐피드까지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되찾은 힘으로 라파엘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냈다.
아까보다 살 만해졌는지 라파엘의 안색이 단번에 좋아졌다.
오베론은 상실감에 여전히 누워 있었고, 샬럿과 라파엘은 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가자.”
볼일도 끝났겠다, 나는 홱 뒤돌아섰다.
기억을 모두 되찾았다는 게 기분이 이상했지만, 딱히 난 달라진 게 없었다.
과거의 나는 나고, 지금의 나는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