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132화
얼마나 뛰어왔는지 숨소리는 거칠었고, 옷은 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딴 건 개의치 않았다. 나는 라파엘을 껴안으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엉, 라파엘!”
“다행입니다, 무사해서……. 정말로…….”
라파엘은 나를 껴안은 팔에 더더욱 힘을 주고 내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던 나는 문득 그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물었다.
“너, 너 어떻게 여기 와 있어!? 유다랑 똑같이 침대 신세여야 됐던 거 아냐?”
“어떻게든 왔습니다.”
라파엘은 여유로운 척 말했지만 내 눈에는 다 보였다.
서 있기도 힘든 몸으로 날 걱정해서 뛰어온 거다. 나는 라파엘을 와락 껴안았다.
“미안해, 정말……. 와 줘서 고마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게 제 기쁨인걸요.”
라파엘이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방해꾼만 없었다면 한참이라도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을 거다.
“이블린 너…… 정말 완전히 변해 버렸구나.”
모든 광경을 지켜본 오베론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라파엘의 품에서 눈만 내밀어 오베론에게 사납게 대꾸했다.
“뭔데 나에 대해 아는 척이야? 난 원래부터 이랬어.”
“아니야, 내가 아는 너는…….”
“아, 진짜! 그러니까 네가 날 키우기라도 했냐고! 우리 아빠도 나한테 안 이래!”
오베론이 머리를 쥐어 싸매건 말건 나는 그에게 삿대질을 해 대며 발악을 했고, 졸지에 내가 자신의 품속에서 튀어 나가지 않게 붙잡는 역할을 맡게 된 라파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입니까?”
아, 그러고 보니 라파엘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해 보이겠구나.
나는 최대한 팩트만 간결히 요약해서 주절주절댔다.
“내가 진짜 이블린이래. 저 새끼가 수작 부려서 다시 돌아온 거고. 그런데 자꾸 그걸 들먹이면서 원래의 이블린으로 돌아오라고 하잖아!”
말하고 보니 뭔가 많이 이상한데.
하지만 라파엘은 내가 이미 진짜 이블린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걸 알고 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내 엉터리 설명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라파엘이 경멸 어린 얼굴로 오베론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쓰레기 아닙니까? 멋대로 돌아오게 했으면서 무슨 행패죠?”
“내 말이!”
내가 분개했다. 라파엘은 습관적으로 내 등을 토닥였고, 나는 그 품에 가만히 안겨 씩씩거렸다.
그 모습까지 전부 적나라하게 눈에 담은 오베론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왜 그건 얘기 안 해? 다른 과거에서 후작이 네가 죽는 걸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뭐?”
라파엘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설마 이블린, 당신이 말한 그 원작이…… 전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그는 사실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피하다가 이내 고개를 수그렸다.
“아, 아니. 그렇다고는 하는데…….”
씨, 이걸 뭐라 말해야 돼.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직 기억에 없어서인가, 별로 상처 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라파엘과는 그때 친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라파엘은 다르게 생각했는지 이마를 짚으며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허둥대며 라파엘을 위로했다.
“나, 나는 진짜 그런 건 신경 안 쓴다니까!? 신경 안 쓰니까 말한 거야! 애초에 우리 둘 다 기억에 없는 일이고! 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고!”
그럼에도 라파엘은 도무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 모습을 본 오베론은 더더욱 표정을 찌푸리며 허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가 죽는데 관심도 안 준 남자가 그렇게도 좋다니. 정말, 너한테 완전히 질려 버렸어.”
뭐야? 이 0고백 1차임은.
혈압이 확 오른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어이가 없어서 입만 뻐끔뻐끔거리기만 할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베론은 화로 머리가 돌아 버렸는지 이를 아득 갈며 내게 경고장을 날렸다.
“즉위식,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안 돼, 이대로라면 도망갈 거다! 내가 그를 붙잡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뭘 기대해?”
그 순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와 오베론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목소리는 설마…….’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저 멀리서 샬럿이 여유롭게 걸어오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기대하냐니까?”
“샬럿!”
“어머~ 우리 이쁜이 무사했구나!”
샬럿이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나를 품에 껴안으려 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팔을 벌린 채,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왜, 왜 그래?”
“이 눈물 자국 뭐야.”
샬럿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물었다.
나는 아차 하며 눈 밑을 더듬었다. 화장 번졌나 보다.
샬럿은 내 얼굴을 붙잡고 누구 하나 죽일 기세로 물었다.
“누가 우리 이쁜이 울렸어.”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샬럿이라면 오베론을 조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나는 재빠르게 오베론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일러바쳤다.
“저 새끼! 저 새끼가!”
“젠장…… 윽!”
그리고 오베론이 튈 준비를 하기도 전에, 샬럿은 그에게 달려가 바닥에 꿇려 버렸다.
오베론이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 뭐하는 짓이야!”
“이렇게 사람이 붙어 있으면 도망갈 수도 없지? 불쌍해라, 독 안에 든 쥐새끼가 따로 없네?”
샬럿이 섬찟하게 웃었다. 그러자 샬럿이 내 편이라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샬럿이 오베론을 바닥에 제압한 채 물었다.
“그래서, 네가 우리 이쁜이를 울린 놈이렷다?”
나는 오베론 대신 대답해 주었다.
“맞아! 그 새끼가 날 울렸어! 조져!”
“우리 이쁜이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아악!”
오베론의 비명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파엘은 우선순위를 깨닫고 오베론을 제압하는데 가세했다.
“제가 이쪽을 잡을 테니 당신은 그쪽을 맡아 주세요.”
순식간에 오베론은 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진 채 양아치 남매에게 구속당해 버렸다.
라파엘이 내게 물었다.
“이블린. 아직 힘 되찾지 못했죠?”
“어? 어어.”
“지금 하시지요.”
“맞아. 지금 후딱 해치워 버려.”
뭐야, 이 천재들은.
역시 쪽수 앞에서 장사 없다. 심지어 완력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라파엘과 샬럿이 온 힘을 다해 오베론을 짓누르고 있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버둥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어허. 움직이면 관절 나간다? 자, 수금 시간이에요~”
“뭐, 뭐하는 거야! 이거 놔!”
“남의 힘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어디 먹고 튈 생각을 할까, 응?”
……분명 고리대금업을 한 건 라파엘인데 왜 샬럿이 더 고리대금업자 같지?
아무튼 상황이 내게 유리하니 좋은 거다.
나는 오베론 앞에 쭈그려 앉아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내 힘 다시 가져간다?”
“이블린!”
“그렇게 크게 말 안 해도 내가 이블린인 건 알고 있고.”
조용조용 말하는 거 다 컨셉이었네. 이렇게 큰 소리도 낼 줄 아는지는 처음 알았다.
나는 심드렁하게 받아치며 힘의 흡수를 시작했다.
눈을 감으니 한 방울 한 방울씩, 힘과 함께 기억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간지러워.’
오랜만에 내게로 돌아온 힘은 나비가 날아다니듯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각자의 자리를 되찾았다.
없을 때는 딱히 부족하다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되찾고 나니 알겠다. 이건 내 몸에 있어야 할 내 일부였다고.
“후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긁어 되찾았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이 내게로 돌아왔다.
* * *
이블린이 오베론과 처음 만난 건 다섯 살 때였다.
“길을 잘못 들었잖아.”
넓은 들판에 우뚝 솟은 마탑이 보였다.
전에 샬럿이 데려다준 적이 있었기에 모르는 곳에 왔다며 울지는 않았지만, 황실 마탑은 황실 소속 마법사 외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걸리면 분명 황제에게 단단히 밉보이게 될 거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지.’
율리시즈가 기다릴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블린이 뒤돌아선 그 순간이었다.
“이런. 누가 들어왔나 했더니 프라비체 공녀님이시군요.”
누군가 이블린을 알아보고 멀리서 말을 걸어왔다.
하필 샬럿도 없는 이럴 때 들키다니.
이블린은 재수가 없어도 한참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도망치려 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도망가지 말아요. 폐하껜 고하지 않을 테니.”
정말로? 믿으면 안 될 소리라는 건 알았지만 한 줄기 희망이 보이니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엔 새하얀 백발에 섬찟한 붉은 눈을 가진, 황실 마탑의 로브를 두르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한눈에 그걸 깨달은 이블린은 최대한 강한 척을 하며 물었다.
“왜 폐하께 고하지 않는다는 거죠?”
“공녀님도 마법사 아닌가요? 내가 느끼기엔 그런데.”
“……!”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이 이 나라에서 허락 받지 못한 힘을 갖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프라비체 일가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초면인 사람에게 단번에 들키다니!
‘나, 나 죽기는 싫은데……!’
아무리 황제가 자신을 예뻐한다 한들,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고발이 들어오면 자신보다는 마법사로 보이는 저 여자 말을 믿을 게 뻔했다.
서둘러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겁에 질린 이블린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마탑주, 가르시아 매그너스 후작이에요.”
“…….”
이블린은 매그너스 후작처럼 하하호호 자기소개 따윈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동자에 매그너스 후작이 피식 웃더니, 무릎을 굽혀 이블린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내가 폐하께 고하지 않는다는 걸 믿지 않는군요?”
“당연하지.”
“쉽지 않은 아가씨네. 그럼 이렇게 할까요?”
도대체 뭘 요구하려고? 설마 돈?
이블린은 자신의 용돈이 지금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했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매그너스 후작이 요구한 건 고작 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언제 한번 우리 아들과 만나 줘요. 아, 물론 부모님께는 비밀로.”
매그너스 후작이 장난스럽게 검지를 입술 위에다 가져다 댔다.
유들유들하게 굴었음에도 이블린이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자, 매그너스 후작은 불쌍한 척 사연팔이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 아들이 친구가 없거든요. 공녀님과 친구하면 딱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엄마 아빠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나 프라비체 부부의 이름을 대면 도망갔다. 그랬기에 이블린은 부모님의 핑계를 댔으나,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나요?”
매그너스 후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역으로 물었다.
이블린이 놀란 얼굴을 하자 매그너스 후작은 눈을 휘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이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녀님 정도의 나이라면 이제, 부모님은 모르는 비밀 한두 개쯤은 갖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않나요? 다섯 살이면 다 컸지. 그렇죠?”
어른이 아이를 어른 취급한다는 건 좋지 않은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이블린이 알 턱은 없고, 오히려 자신을 어른 취급해 주는 매그너스 후작에게 감사함마저 느꼈다.
사사건건 자신을 꽃처럼 보물처럼 아끼는 부모의 그늘에서 멋대로 벗어나는 일탈 행위를, 다른 누구도 아닌 마탑주인 매그너스 후작이 인정해 주었으니까.
다섯 살. 한창 사고도 많이 치고 부모는 모르는 비밀이 하나둘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그날부터 프라비체 부부도 모르는 이블린의 비밀이 생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