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131화
말도 안 돼. 전부 다 내가 겪은 일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진짜 이블린이라는 거야? 차라리 오베론이 빙의자라는 게 더 현실성 있어 보였다.
혹시나 거짓말이 아닐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거, 거짓말하지 마. 김금희의 전생이 이블린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김금희 시절에 이상하게 재물이 많이 쌓이지 않았어?”
“……!”
오베론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확실히 그랬다.
복권 1등 다섯 번 당첨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그 이후로 나는 숨만 쉬면 돈이 달라붙는 인생을 살았었다.
“그거 다 이블린으로서 누려야 할 걸 다 못 누리고 가서 그런 거야.”
오베론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이블린이 누려야 했던 걸 다 못 누렸기 때문에, 김금희에게 그런 복이 따랐다고?
“……말도 안 돼. 그럼 화목한 가정도 줬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흑마법의 대가를 지불한 거지. 그나저나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니, 네게 있어 가장 소중했던 건 가족이었던 모양이네.”
……반박할 수 없었다. 확실히 이블린이 자신 다음으로 가장 소중히 여긴 건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잃음으로써 가장 소중한 자신을 빼앗겼다. 그다음은 가족에게서 다른 사람이라며 거절당했다.
확실히 이블린의 자아만 남아 있었더라면 이 이상 고통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오베론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흑마법의 대가는 잔인해. 한 번의 생에서 끝나지 않아. 심하면 다음 생, 혹은 다다음 생까지 이어지지. 숨만 쉬어도 불행이 달라붙는 사람들 있잖아? 다 흑마법의 대가를 받고 있는 거야.”
내가 김금희로서 받았던 고통도, 여기서 와서 겪었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도 전부 지금은 타인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내가 흑마법을 썼기 때문이라니.
흑마법이 어째서 사람을 갉아먹는지 이제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너는…….”
“응?”
“너는 왜 날 다시 부른 건데? 내가, 고통 받을 걸 알면서도.”
나는 눈물을 꾹 참고 물었다. 그러자 오베론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갸륵한 얼굴로 내 뺨을 쓸며 대답했다.
“네가 없는 세상 따위는 살 가치가 없잖아…….”
저절로 내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베론의 뺨에 닿는 일 없이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오베론은 내 손목을 잡은 채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 나도 네가 고통에 허우적대는 건 원하지 않았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웃기는 소리였다. 진짜로 내가 고통스럽길 원하지 않았다면 저럴 수가 없다.
오베론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지금 웃기지 말라고 생각하고 있지?”
“잘 아네.”
“하지만 사실인걸. 그거 알아? 네가 힘들 때마다 위로해 준 검은 고양이 있잖아.”
갑자기 금희는 왜 나와? 설마,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 검은 고양이. 내가 보낸 거야.”
“……뭐?”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오베론이 내 귓가에 속삭인 사실에 나는 얼어 버렸다.
오베론은 피식 웃으며 내게서 떨어지고는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다시 흑마법사가 되었으면 해서 약간의 공작을 쳤어. 파그라시움 녀석들, 희귀한 고양이가 보이자마자 바로 데려가서 팔더라. 네가 그 고양이를 들이는 것도 역시 내 예상 안이었어.”
“……!”
“즉, 네가 그 고양이로부터 얻은 행복은 전부 내가 만들어 준 거야. 이 정도면 충분한 사죄가 되었겠지?”
내가 유일하게 가장 먼저 마음을 열었던 내 고양이 금희가, 사실은 오베론이 보낸 고양이었다니.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울음도 나오지 않아 입만 뻐끔거리는 내게 오베론은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후작처럼 네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을 거야. 황태자처럼 열등감에 찌들어 널 죽게 하지도 않을 거고. 후작보다 더 완벽하게 널 보좌할 거고, 황태자와는 다르게 널 숭배할 거야. 그러니까 후작과는 관계를 정리해. 나는 그보다 네 바람을 더 빠르고 완벽하게 이루어 줄 수 있어.”
나는 입술을 꾹 말아 물며 오베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 나 좋아하니? 그래서 스토커처럼 날 괴롭히는 거야?”
“그런 말은 너무 가볍잖아.”
오베론이 고개를 내젓더니,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대답했다.
“너는 내 인생의 전부야. 내 인생은 전부 너로 이루어져 있어.”
광기 어린 대답에 무슨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말이 안 통한다. 안 통하니 설득도 호소도 전부 통하지 않을 거다.
“어떻게 할 거야? 후작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옛날의 너로 돌아와 줄 거야?”
오베론의 말대로 하면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인 율리시즈 정도는 감쪽같이 치워 낼 수 있다.
흑마법으로 살아난 자는 흑마법 심판에 걸린다.
오베론이 내 편을 들어준다면 율리시즈를 치워 버리는 건 놀라울 정도로 수월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라파엘과 인연을 정리해야만 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결심을 굳혔다.
‘좋아. 먹튀하자.’
예로부터 미친 사람과는 말로 싸우는 거 아니랬다.
내가 뭐하러 저런 미친 새끼랑 진지하게 약속을 해야 돼?
내가 진짜 이블린이라면 악녀처럼 굴어야지. 나는 나비만 날름 먹고 튈 생각으로 팔로 눈을 벅벅 닦고는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할게.”
“정말?”
오베론이 환하게 웃으며 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놈이었어?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얼른 먹고 튀어야지. 내가 손을 척 내밀려던 그때, 오베론이 내 손을 꼬옥 붙든 채 말했다.
“그럼 맹세하자.”
“맹세?”
“이 고목나무에 대고 맹세하자고.”
……말뿐인 맹세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오베론은 내 생각은 훤하다는 듯 경고했다.
“마력을 품은 나무에 대고 한 맹세를 깨면 죽는 거 알지?”
“뭐라고?”
“아, 몰랐구나. 뭐, 그래도 상관없어. 넌 이번에야말로 약속을 지킬 거잖아. 그치?”
이, 이 무슨 미개한 맹세 방식이 다 있어!
“설마 또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는 않겠지?”
오베론이 억지로 내 양손을 잡아끌어 고목나무 아래에 섰다.
X 됐다. 이러다 라파엘이랑 생이별하게 생겼다.
내 행복을 위해 율리시즈를 족치려고 하는 건데 그 과정에서 라파엘과 만날 수 없다면 그건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잖아.
어떻게 해야 하지?
‘……오베론한테서 강제로 내 힘을 빼앗아?’
전에 달리아에게서 한 번 빼앗은 적이 있다.
이번에도 성공할지도 모른다.
나는 저번처럼 집중하고 오베론의 몸에 숨어 있는 내 힘을 찾았다.
조심조심, 마치 소매치기를 하는 것처럼 내 힘을 살짝 건드린 그 순간이었다.
“이블린. 지금 뭐하는 거야?”
들킬 건 예상했다. 소매치기처럼 옷주머니를 터는 것도 아니고 몸 안에 있는 걸 터는 건데 어떻게 안 들키겠나.
중요한 건 오베론 안에 스며든 내 힘을 발견했다는 거였다.
나는 서둘러 오베론이 빼앗아 간 내 힘을 빨아들였다.
“젠장!”
이러다 다 빨아 먹힐 것 같았는지 오베론이 내 손을 뿌리쳤다. 아까의 그 여유로운 표정은 어디다 팔아먹고 왔는지 배신감에 떨며 소리치기까지 했다.
“또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그래! 했다, 왜! 너 내가 이블린처럼 행동하길 바란 거 아니었어?”
“힘은 맹세를 한 뒤에 돌려준다고 했잖아!”
“감히 내 목줄을 쥐겠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가만히 넘길 줄 알았어?”
나는 목에 피가 터져라 소리치며 오베론의 살에 닿기 위해 팔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택도 없었다. 나는 말로 호소했다.
“내가 나대로 살길 원하면 그냥 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냅둬!”
“아니! 지금의 넌 진짜 이블린이 아니야. 진짜 이블린이었다면 당장 내 제안을 수락했을 거라고!”
“웃기지 마! 네가 뭔데 나한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난리인데!? 네가 나야? 아니잖아!”
나는 오베론의 발을 힘껏 밟으며 악을 썼다.
“김금희도, 이블린도, 이블린이 된 김금희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의 이블린도 전부 다 나야! 그러니까 내가 뭘 생각하든 그건 네가 그렇게 미쳐 있는 이블린의 생각이라고!”
하아, 하아.
들리는 건 내 가쁜 숨소리뿐, 오베론은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통한 건가? 나는 희망을 걸고 고개를 들었지만.
“……내가 동경했던 넌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되돌아오는 건 아까와 똑같은 정신 나간 말이었다.
오베론은 내 양 손목을 가볍게 한 손으로 옭아매더니 고목나무 기둥에 손을 짚었다.
“미안해, 이블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도 만족하게 될 거야.”
망할!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하지만 손을 빼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했다.
“자, 그럼 맹세하자.”
거기다 내가 겁에 질린 걸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소름 끼치게 웃기까지 했다.
라파엘보고 싸이코패스 같다고 한 거 취소다. 오베론보다 더한 또라이는 내 인생에 없을 거라고 확언할 수 있었다.
내 마력과 오베론의 마력이 스멀스멀 형상화가 되어 얽혔다.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 마력이 고목나무에 스며들면 끝이다.
‘이러다 진짜로…….’
라파엘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생각해, 프금희, 진취적인 머리로! 황태자의 고간을 깐 배짱으로 뭐든 생각…….’
어? 고간을 까?
그러고 보니 내 발은 묶여 있지 않았다.
오베론도 내 손을 묶어 둘 생각만 했지, 내 발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한 듯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좋아. 까자.’
그렇게 내가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린 그 순간이었다.
“이블린!”
“꺄악!”
커다란 손이 나를 오베론에게서 풀어 주더니 품에 안았다.
폭 안겨 오는 품에서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비누 향과 박하 향이 잘 어우러진, 포근한 햇살 향. 이미 누가 날 구했는지 확신에 찼지만 고개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자 예상한 사람,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시야 가득 담겼다.
나는 울음을 터뜨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파엘!”
“괜찮으십니까, 이블린?”
라파엘이 나를 구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