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130화
“망할, 죽겠군…….”
이블린이 가자마자 라파엘은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팔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은 어느새 기도까지 올라와 라파엘의 숨을 옥죄기 시작했다.
저주라 해서 얕봤는데, 태어나서 겪은 고통 중 가장 고통스러웠다.
‘이블린에게 가야 하는데…….’
숨을 내뱉는 것조차 너무 괴로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일어서야 한다며 몸을 일으킨 그때였다.
“라파엘!”
이 목소리는 샬럿의 목소리였다. 분명 그녀는 율리시즈에게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자고 있을 텐데, 왜 자신을 찾지?
하지만 지금은 저 사람의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 라파엘은 목소리를 쥐어짜 내 소리쳤다.
“여깁니다!”
그러자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벌컥! 문을 거칠게 연 샬럿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얘가 어디 누나가 부르는데도 안 오고 오라가라……. 어머?”
샬럿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너 왜 거기서 자니?”
“지금 이게 자는 걸로 보입니까…….”
“아, 맞아. 달리아 그 애, 꽤 쓸 만하더라? 몸이 가벼워졌어. 그래서 그런지 출출하네. 뭐 먹을 거 없니?”
라파엘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저 사람, 감정까지 고장나더니 이제는 눈까지 망가졌나? 라파엘이 버럭 성질을 냈다.
“아니, 당신 눈에는 제 꼴이 안 보이냐고요!”
그제야 샬럿은 라파엘의 몰골이 눈에 들어왔는지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어머, 그러네? 그거 네 피니? 그렇게 흘리고 용케 안 죽었네.”
“지금 그딴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고 보니 이쁜이가 안 보인다? 이쁜이 어디 갔니?”
“황궁에요. 저도 얼른 가야 합니다. 부축 좀…….”
“황궁? 벌써 율리시즈 목 따기로 한 거니?”
“그게 아니라!”
저 망할 혈육은 도대체가 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내뱉는 거지? 유폐를 오래 당했더니 수다가 훨씬 늘어난 것 같다.
일어날 기운도 없어 죽을 맛이었지만 라파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길다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설명을 마쳤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샬럿의 입술이 웃는 그대로 꿈틀거렸다.
“그래……? 세상에, 예쁜 것도 피곤하구나. 웬 파리들이 그렇게 꼬인다니?”
“당장 황궁으로, 아니. 마탑으로 가야 합니다. 좀 부축해 주세요!”
“아우, 귀 따가워라. 너 아직 살 만하구나?”
“얼른!”
“알았어, 알았어. 하여튼 어머니 승질머리를 쏙 빼닮아 가지곤.”
샬럿이 귀를 틀어막으며 질색을 하다가도 라파엘을 위아래로 스윽 훑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그 꼴로 잘도 도움이 되겠다?”
그 순간 라파엘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샬럿의 말대로 자신이 그곳에 간다 한들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연인인 이상, 라파엘은 이블린을 혼자 싸우게 두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은 여태까지 혼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면서 고독했으니까.
라파엘은 그럴 때마다 항상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이블린은 더할 것이다.
“적어도 이블린의 방패쯤으로는 쓸모가 있겠죠.”
라파엘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샬럿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물약을 하나 꺼냈다.
“마침 또 내 주머니에 이런 게 있네.”
“……뭐죠?”
라파엘의 의심쩍은 물음에 샬럿은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내 체질을 이용해서 만든 약이야.”
샬럿의 체질로 만든 약. 저걸 마시면, 아무리 죽을 저주에 걸렸다 해도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다.
라파엘은 홀린 듯, 후들거리는 팔을 뻗어 약병을 손에 쥐었다.
* * *
“흐흥.”
오베론은 콧노래까지 부를 정도로 지금 상당히 들떠 있는 상태였다.
얼마 만에 이블린을 만나는 건지. 달리아를 일부러 놓아준 보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 오베론은 씨익 웃다가도,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이블린이 그런 눈을 할 줄은 몰랐는데.’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하던 이블린.
남자는 그저 자신을 빛내 줄 액세서리 취급하던 이블린.
자신의 추악한 모습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여 준 이블린.
그런 이블린이 모든 기억을 잃더니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오베론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잊어 놓고, 어째서.’
와장창!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한 오베론이 거울을 밀어 깨뜨렸다.
산산조각난 유리 조각에 무엇을 투영하여 보고 있는지, 오베론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그도 잠시, 오베론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아냐, 이런 얼굴은 이블린이 싫어할 거야.”
오베론은 손바닥 안에 숨어 감정을 정리하고 팔을 내렸다. 언제나처럼 말끔하고 단정한 웃음이었다.
오베론은 창밖을 확인했다.
고목 나무 아래로 이블린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른 가야겠다.”
오베론은 깨진 유리 조각을 순식간에 없애 버리고는 고목나무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매너가 무슨 일이야?”
나를 감히 밖에 5분이나 세워 둬?
나는 오베론을 보자마자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오베론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해 보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행동 하나하나가 다 짜증스러울 수가 있지?
율리시즈랑 더불어 내 인생 걸림돌 탑 투였다.
더는 오베론과 잡담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나한테서 원하는 게 뭐야?”
오베론은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답답해진 나는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유추했던 바를 입에 담았다.
“내가 어렸을 때 너한테 목숨 신세진 건 알겠어. 감사 인사라면 아마 우리 집에서 충분히 했을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니 좀 부족했나?”
이것만큼 타당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성의 표시가 부족해서 날 괴롭히는 것 외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오베론이 지독히 상처 받은 얼굴을 하더니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구나.”
망할 놈. 내 나비를 돌려줘야 내가 기억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내 표정이 눈에 훤히 보였는지 오베론이 두 손을 들고 변명을 시작했다.
“이블린. 오해하는 것 같아서 미리 말해 둘게. 난 네 힘을 가로챌 생각은 추호도 없어. 실제로 돌려준 적도 있잖아.”
“웃기고 있네. 그럼 진작 처음부터 다 돌려주든가! 게다가 달리아한테도 내 힘을 무료 나눔 하듯이 뿌렸잖아!”
내가 쓰던 물건을 생판 남이 훔쳐다 중고로 판매해도 이렇게 어이없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오베론은 반성의 기미가 하나도 엿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거 알아? 흑마법은 특별해. 마력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그 힘을 쓸수록 마력은 늘어나.”
“설마 달리아한테 내 힘을 준 게…….”
“맞아. 네 힘을 더 크게 키워서 돌려줄 심산이었어.”
미친! 달리아는 정말 이용만 당한 거잖아?
흑마법이 상드리움에서 중죄란 걸 알면서도 어떻게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을……!
‘그때 재판에서 달리아가 흑마법 심판을 받아서, 지금 죽은 상태였더라면…….’
나는 지금쯤 죄책감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이용만 당한 불쌍한 사람을 죽였다고.
지금이야말로 오베론의 멱을 잡을 때였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베론의 멱에 닿지는 못했다.
“참고로 네가 알려 준 거야.”
“뭐……?”
내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내가 알려 줬다고? 오베론과 친했을 시절 이블린이 알려 줘서 시킨 건가?
순간 이블린이라면 정말로 그런 짓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설마 하는 희망을 붙잡고 오베론에게 소리쳤다.
“내가 언제 그딴 거 해 달랬냐고, 이 미친놈아!”
“기억 안 나는구나.”
오베론은 실망한 듯 어깨를 작게 늘어뜨렸다.
망할, 진짜 이블린이 시킨 거야?
혼란스러웠다.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억으로 살핀 이블린은 그렇게 힘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오베론은 내 혼란을 무시하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건 기억나겠지? 율리시즈 황태자를 살리는 데 내가 도움을 줬던 거 말이야.”
“…….”
기억나다마다. 그 충격적인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리고 그때 율리시즈 황태자를 살리는 대신, 내가 너한테 부탁했던 것도 기억해?”
이건 기억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가 기억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니 오베론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넌 항상 나에 대한 건 가장 먼저 잊어버리는구나.”
이 새끼 뭐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전남친 바이브를 풍기고 있어?
거기다 자기만 알고 그렇구나, 하면서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니 이 이상 눈꼴 시릴 수가 없다.
내가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느냐고 물으려던 그때, 오베론이 차갑게 돌변한 얼굴로 내게 명령했다.
“후작과 정식으로 연인이 된 모양인데, 헤어져.”
“뭐?”
“그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이블린.”
뭐?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약속인가 했더니, 고작 그런 거였어?
이딴 약속 때문에 내 나비를 가지고 그 오만지랄을 다 떨었던 거였고?
내 어이없어 하는 얼굴에도 오베론은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자식과 헤어진다면 율리시즈 황태자를 몰락시키는 데 도움을 줄게. 방해 같은 건 하지 않고. 물론 네 힘도 지금 여기서 당장 다 돌려줄 거야.”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도둑놈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오베론의 말만 들으면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렸다.
“우리 엄마 아빠도 내 연애에 간섭 안 하는데, 왜 네가 하지? 난 이해가 안 가는데?”
“약속 안 지키겠다는 뜻이야?”
“기억이 안 나는데 약속을 어떻게 지켜? 뭐, 네가 나비 돌려준 걸로 기억이 나면 고려는 해 볼 만하지만.”
나는 일부러 얄밉게 오베론을 도발했다.
열이 단단히 받았는지 오베론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이윽고 그는 사냥터에서 나를 봤던 눈과 똑같은 눈을 하고 물었다.
“넌 그 후작이 널 평생 사랑할 것 같아?”
“……뭐?”
“암흑가나 운영하는 더러운 핏줄이 널 평생 사랑할 것 같냐고. 언젠가 너에 대한 열등감을 키워 나가다가 널 해칠 거야. 황태자처럼 말이야.”
“라파엘은 안 그래.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도 일어날 수 있어.”
애초에 한 번도 안 일어난 일이거든?
무엇보다 라파엘이 열등감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렇게 내가 반박하려던 것보다 먼저, 오베론이 이를 아득 갈며 내뱉었다.
“후작은 옛날에 헤베 영애에게 붙었지. 그게 황가에 대한 복수심으로 접근했든, 진짜로 사랑해서 그랬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 자식은 이미 한 번, 네가 죽는 걸 그냥 지켜봤어.”
“……잠깐, 뭐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흠칫했다. 지금 오베론이 말하는 건 원작의 일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 내용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오베론도 빙의한 거야?
내 생각이 눈에 선하다는 듯 오베론이 웃음을 흘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건 고작 소설이 아니야, 이블린. 전부 다 네가 겪었던 일이라고.”
오베론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쥐었다.
짜악! 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쳐 내고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물었다.
“……너 정체가 뭐야.”
두려움에 찬 목소리가 마음에 든 건지, 오베론이 흡족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번 생에는 네가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원한 사람. 그리고…….”
오베론이 내 손을 잡아 올리더니 그 위에 입 맞추었다.
“네가 김금희에서 이블린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