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28)화 (128/154)

128화 - 128화

오늘따라 불청객이 왜 이렇게 많은지. 달리아가 당황과 불쾌가 섞인 얼굴로 일어나 오베론에게 사납게 물었다.

“누가 황태자비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죠?”

“그렇게 강한 척 하고 계실 때가 아닐 텐데요, 황태자비 전하.”

뭐? 달리아의 얼굴에 한순간 당황이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달리아는 한 가지 희망을 떠올렸다.

‘서, 설마 오베론이 벌써 알아챌 리가 없어.’

일단 부정하고 보자. 달리아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흑마법을 빼앗겼죠?”

“……!”

백마법사와 흑마법사의 구분은 아무리 흑마법사여도 할 수 없다.

다만 마력의 양은 다르다. 마력의 양은 아무리 작정하고 숨겨도 뛰어난 마법사 앞에서는 유리창으로 보듯 훤히 보인다.

달리아는 그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상기시키고 아차 했고, 오베론은 뻔하다는 듯 달리아의 현재 상황을 줄줄 읊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황태자 전하께는 숨기고 계시는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지겠어요.”

“가서 전하께 일러바칠 셈이야?”

달리아가 꿀꺽 침을 삼킨 후 물었다.

오베론은 가만히 달리아를 바라보더니 이내 조소를 끼얹었다.

“설마요. 그럴 가치도 없습니다. 당신 따위를 추락시켜서 내가 무얼 얻겠습니까.”

“뭐? 당신 따위?”

달리아가 발끈했다. 여태 떳떳하지 않게 살아온 것은 맞지만 오베론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한테……!”

“힘은 공녀님께 빼앗긴 겁니까?”

“뭐, 뭐?”

오베론이 제 말을 끊어 먹었다는 사실에 화낼 틈도 없이 정곡을 찔린 달리아가 말을 더듬었다.

“우,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말고 나가……!”

“여태 흑마법을 쓴 건 총 한 번, 폐하께 저주를 걸 때뿐……. 내 생각보다 잘 써 주지 않았군요.”

오베론은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오베론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어 달리아의 말투가 저절로 뾰족해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당신은 쓸모를 다하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움찔.

달리아는 오베론의 저 말뜻을 알고 있었다.

마탑에서 일하던 시절, 주어진 일을 해내지 못하는 마법사들은 얼마 가지 않아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당신이 날 배신했으니 이제 내가 당신을 가만두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

오베론이 손을 뻗었다.

마치 고장난 물건을 버리듯, 심지어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달리아를 처분해 버리려는 것이었다.

오베론과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다못해 도망이라도 치려던 달리아가 마법을 쓰려던 그때였다.

‘마법이……!’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오베론이 쥐도 새도 모르게 달리아의 마력을 묶어 둔 것이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로 오베론과 대적한다는 건 가만히 죽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 계획과는 다소 달라졌지만 어쨌든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오베론이 손이 천천히 달리아의 목을 움켜쥐려 하고 있었다.

턱 밑으로 불쑥 다가온 죽음의 예고에 달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죗값을 다 치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달리아는 체념했다.

이블린에게는 협력하겠다 해 놓고 이렇게 쉽게 죽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사람들을 괴롭힌 자의 최후란 이런 것이라며 자기 위로를 하며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

감은 눈 위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밝은 빛이 터진 것이 느껴졌다.

응?

시간이 지나도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안 아프게 죽어서 나 자신도 죽은 걸 모르는 걸까?

그 착각을 깬 건 오베론의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넌 뭐지?”

“그건 그쪽이 알 것 없고.”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달리아는 눈을 빠르게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음침한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의 등이었다. 남자는 팔을 후들거리며 오베론의 마법을 막아 내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달리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헤베 영애?”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달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은 분명 공녀님 쪽의…….”

“유다입니다.”

유다 역시 달리아와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유다는 이블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오베론을 찾아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달리아를 죽이려 들고 있으니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여 달리아를 구하게 된 것이다.

방해꾼의 등장에 오베론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뭐지, 이건?”

“이거라니, 말이 심하네. 똑같은 흑마법사끼리 이러지 맙시다.”

유다가 빈정거리며 받아쳤고, 달리아는 그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전에 봤을 때는 저자세인데다가 사소한 것에 겁먹고 쩔쩔매던 사람인 것 같았는데?

하지만 달리아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평소와 달리 지금의 유다는,

‘으으…… 내 꿈은 벼락 부자…….’

연봉 10년 치 일시불 수령의 꿈으로 독기가 가득한 상태였다. 오베론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블린과 라파엘이 잡아오라고 한 이상 잡아와야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얕보인 것 같다고 느낀 오베론은 표적을 달리아에서 유다로 바꿨다.

“아무래도 이쪽 먼저 처리해야 될 것 같군.”

“그래요, 괜한 마법사 괴롭히지 말고 흑마법사끼리 볼일 보도록 하죠.”

자신만만하게 웃는 유다의 뒷모습에 달리아가 넋을 놓기도 전에, 검은 마력이 방을 가득 채웠다.

* * *

“유다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그 시각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초조하게 발끝을 까딱이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런 내게 차를 한 잔 내어주며 진정시켜 주었다.

“일 처리 하나는 확실히 하는 자입니다. 믿고 기다려 보시지요.”

“아니, 그건 아는데 상대가 오베론이잖아. 설마 지금 당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테이블을 쾅쾅 치며 불안을 토해 냈다.

오베론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블린의 힘을 빼앗은 자식이니 보통 강한 건 아닐 거다.

유다 역시 파그라시움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흑마법사지만 둘 중 누가 더 강하냐, 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다의 실력을 믿기에 그를 보냈다.

그런데 이렇게 안 돌아오다니. 그가 위험해지면 바로 돌아오겠거니 싶어 엉덩이를 뻥 차듯이 보낸 행동이 후회되었다.

그러자 라파엘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잡아 주었다.

“제 목숨 소중한 것 역시 확실하게 아는 자이니 정 상대가 안 된다 싶으면 도망칠 겁니다.”

“내 말이 그거잖아. 아직도 안 돌아온 거 보면 큰일난 거 아냐?”

습관적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뒤늦게 내 행동의 민폐스러움을 깨닫고 고개를 저으며 반성했다.

“아, 아냐. 내가 능력도 없으면서 너무 불평만 했다. 잊어 줘.”

이미 라파엘에게 못 보일 꼴 다 보인 지 오래였지만, 하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불평만 늘어놓는 모습까지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게 라파엘은 예상치 못한 말로 돌려주었다.

“저는 당신이 불평하는 소리조차 좋게 들립니다.”

“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소리라도 들은 듯한 얼굴로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라파엘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눈으로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보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게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불평불만을 쏟으셔도 됩니다. 제가 당신의 고민거리를 해소해 드린다면 당신은 저로 인해 기뻐하게 될 테고 그러면 저 역시 당신으로 인해 행복해지니까요. 저는 지금보다 당신이 더 마음껏 불평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솔직히 내가 라파엘을 좋아하긴 하지만 라파엘이 불평불만을 내뱉는다면 정이 조금 떨어질 것 같은데.

‘아, 아닌가.’

나는 금방 생각을 바꿨다.

얼마 전 라파엘을 위로하기 위해 차를 내줬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로 인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진 라파엘을 보고 그때 든 생각은, 기쁘다였다. 그걸 떠올리고 나서야 방금 라파엘의 말이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볼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 라파엘.”

“당연한 걸 가지고 감사 인사를 들으니 부끄럽군요.”

웃기네,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그 순간,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가 부끄러워한 만큼 라파엘도 좀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는 라파엘의 목덜미 안쪽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라파엘이 움찔 어깨를 떨며 애써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뭐하시는 거죠?”

“칭찬?”

나는 눈썹을 까딱이며 라파엘의 목덜미를 마저 쓸어내렸다.

“흣.”

새하얗던 라파엘의 목덜미는 금방 열에 올라 붉어졌다. 나는 확신에 찼다.

‘역시 목이 예민하구나.’

어쩐지 창피할 때면 목부터 붉어지더라니.

앞에서는 검소한 후작이며 뒤에서는 암흑가의 수장, 더 나아가선 황제의 친자라는 라파엘을 고작 손가락 몇 개로 함락시킨다는 건 대단한 정복감을 가져다주었다.

“이블린, 이제 그만…….”

“싫은데? 아까 뭐든지 내 맘대로 하는 게 네 기쁨이라며?”

“그, 그렇게까지는 말 안 한 것 같은데요.”

맞다. 불평불만을 언제든지 마음대로 쏟아 내라 했지 성욕을 마음대로 쏟아 내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

“그래도 난 지금 네 목을 만지지 않으면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억지가…… 흣.”

방금 스친 부위가 민감했는지 라파엘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달아오른 표정을 보니 나 역시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진짜 섹시하다.’

나 섹시한 남자가 취향이었네.

그래도 이 이상 괴롭히는 건 불쌍하니까 조금만 더 하고 그만둬야지 하던 그 순간이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라파엘이 내 손을 덥석 잡아 봉인해 버렸다.

“……!”

잡힌 손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반격당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해 심장이 쿵쾅거렸다.

은하수가 흐르는 것 같은 라파엘의 눈동자가 열기를 띠었다.

이대로 있다간 잡아 먹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나는 눈동자를 굴려 그의 눈을 피했다.

“아, 안 그래도 이제 그만하려 했어! 그러니까 이제 좀 놔주면…….”

“저는 이렇게 실컷 괴롭혀 놓고서요?”

할 말이 없네.

남을 괴롭힐 땐 나도 괴롭힘 당할 각오를 하라 했던가. 아무튼 그런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딴생각을 하고 있는 걸 들켰는지 라파엘이 내 주의를 끌었다.

“저를 봐 주세요, 이블린.”

“…….”

“안 됩니까?”

라파엘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목소리로 부르면 돌아볼 수밖에 없잖아.

다른 때라면 흥, 하고 무시해도 됐을 텐데 하필이면 괴롭힌 직후였다. 나는 다시 눈동자를 굴려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불쌍한 척 하더니?”

“저 연기 잘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불쌍한 목소리를 냈던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색기 어린 얼굴로 라파엘이 웃었다.

“절 괴롭히시는 동안 꽤 즐거우셨던 것 같은데.”

응, 너 대박 섹시하더라, 라고 주둥이가 내 이성보다 한발 먼저 앞설 뻔했다.

라파엘의 손이 내 손에서 팔, 어깨, 그리고 목을 지나쳐 턱까지 타고 올라왔다.

라파엘이 열띤 목소리로 물었다.

“상으로 키스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요?”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키스를 한두 번 한 건 아니었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키스를 시작하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불안한 한편 기대되기도 했다. 내 뺨에 올려진 라파엘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 순간이었다.

“공녀님!”

“으, 으악!?”

문 바깥에서 목이 터져라 날 찾는 소리에 너무 놀라서 돼지 멱 따는 소리가 나와 버렸다.

망할,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도대체 누가 이 중요한 순간에 훼방을 놔! 라고 생각한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얼굴에 피칠을 한 달리아가 나타났다.

“다, 달리아?”

어디서 저렇게 다쳐 온 거야? 설마 율리시즈 놈이? 라고 생각했지만 다친 것 치고 달리아는 너무나도 쌩쌩했다.

그럼 누구 피지? 나는 어렵지 않게 그 피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 공녀님!”

달리아가 어깨에 피범벅이 되어 축 늘어진 유다를 부축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