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127화
“헤베 영애로부터 통신이 도착했습니다.”
폭풍전야의 평화로움을 만끽하던 오후, 유다가 찾아왔다.
유다는 내게 둥둥 떠다니는 홀로그램처럼 생긴 편지를 내밀었다.
내 손이 닿자 편지의 내용은 내 머릿속으로 저절로 흘러 들어왔다.
“뭐라고 합니까?”
옆에서 내 차를 따르고 있던 라파엘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 후, 달리아에게서 전달 받은 마법 편지를 손안에서 반짝거리는 가루로 만들어 버리며 말했다.
“바로 대관식을 준비한다네.”
“역시나군요.”
“그리고 샬럿도 그때 해칠 생각이라던데.”
“쯧.”
라파엘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찼다. 예상했다고는 해도 너무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친엄마도 아닌데 키워 주고 먹여 주고 길러 놓고 황태자 자리까지 줬더니 죽이려 들다니.
물론 황제가 율리시즈를 많이 잡긴 했지만 그렇다고 샬럿까지 죽이려 드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그래도 일단 나는 진정하라며 라파엘의 손등을 쓸어 준 후 턱을 괴고 다리를 꼬았다.
“황제는 미리 빼돌리는 게 좋으려나? 대관식 당일에 깨워 봤자 폐하께선 어리둥절하실 테니.”
“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카밀라의 도움을 받도록 하죠.”
“그런데 오베론이랑 붙으면 아무리 카밀라라도 질 텐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베론이 무슨 속내를 품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달리아에게 내 나비를 넘겨준 것만 보자면 이번에도 나를 방해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닌가? 옛날에는 이블린이 율리시즈를 살리는 걸 도와줬었으니까.’
하지만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니 라파엘이 슬그머니 물었다.
“오베론 마탑주 때문에 심기가 거슬리십니까?”
“어. 솔직히 대관식 끝날 동안 걔 좀 납치해서 어디다 가둬 두고 싶어. 방해 못 하게.”
“그러면 되죠.”
“어?”
산뜻한 대답에 내 고개는 물론이고 유다까지 진심이냐는 얼굴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우리 둘의 경악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고도 암흑가를 운영하는 담력을 가진 그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파그라시움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인재도, 감옥도 전부요. 마탑주라 해도 유다가 알아서 잘 붙잡아 줄 겁니다.”
“네? 저요?”
유다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굴려지는 직장인 같은 유다를 보며 내가 든 생각은 이거였다.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라파엘, 넌 천재야!”
“공녀님까지 왜 그러세요! 저 진짜 마탑주 상대할 자신은 없다고요!”
내가 라파엘을 말려 줄 것 같았는데 오히려 신나서 박수나 치고 있으니 유다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악당 가문의 막내딸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미소 짓는 얼굴로 유다에게 반협박을 가했다.
“10년 치 연봉 일시불로 받으려면 그 정도 값은 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만 너무 굴려지는 것 아닌가요?”
“그럼 너도 네 부하 굴려.”
“걔들의 뭘 믿고요!”
“그럼 네가 해.”
상황은 2:1. 심지어 2명인 쪽이 나와 라파엘이다.
원래 회사 생활도 중간에 낀 직급이 돈은 손톱의 때만큼 받으면서 일은 제일 많이 한다. 그런데 유다는 돈이라도 많이 받으니 복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유다에게 바깥을 가리켰다.
“자, 그럼 준비해 놔, 유다.”
그러니 나는 정말 최고의 상사다.
* * *
이블린이 손끝으로 사람을 부리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동안 달리아는 한창 대관식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럴수록 달리아는 후회가 쌓여 갔다.
‘망할, 내가 왜 이렇게 재미없는 일만 잔뜩 있는 황태자비 자리를 원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옛날의 달리아에게는 무언가가 쓰여도 단단히 쓰여 있던 것 같았다.
고작 이블린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책임만 많이 따르는 귀찮은 자리를 원했다니.
제3경합 때 깨닫긴 했지만, 달리아는 뼛속까지 마법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예산을 짜고 성을 꾸미는 일 따위는 질색이었다.
무엇보다 혹독하게 자신을 평가하고 지켜보는 눈이 있다면 더더욱 하기 싫어졌다.
‘정작 자기도 황제의 재목은 아니면서 도대체가 왜 나한테만…….’
“달리아, 잘되어 가나?”
“저, 전하?”
갑작스러운 음성에 달리아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튕겨 나오듯 일어섰다.
도대체가 속으로도 욕을 못 하겠다. 율리시즈가 노크도 없이 방에 침입해 있었다.
율리시즈는 곧 황제가 될 생각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어깨로 척척 달리아의 앞에 다가왔다.
달리아는 마치 깐깐한 교수에게 과제를 제출하는 학생처럼 뭐 씹은 얼굴로 예산안과 계획안을 내밀었다.
서류를 순식간에 훑어본 율리시즈의 미간이 점점 주름져 갔다.
아니나 다를까, 깊은 한숨과 함께 율리시즈가 달리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달리아. 분명 사람을 붙여 줬을 텐데, 이게 최선이었나?”
“……죄송해요, 전하. 다시 해 볼게요.”
벌써 몇 번째 반려인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당장 대관식이 급한 거라면 차라리 전문가들한테 맡기는 게 더 나을 텐데, 율리시즈는 이참에 달리아의 기를 확실하게 죽여 놓을 생각인지 그녀에게 일을 떠맡겼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인지 율리시즈는 쯧 하며 달리아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내 쪽 사람을 더 붙여 주지. 그나마 이번 계획안이 제일 나으니 이거라도 고쳐 쓰는 게 좋겠어.”
옛날이라면 달리아는 저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을 거다.
지금은 그저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자기 대관식인데 왜 나한테만 맡기는 거야?’
율리시즈는 다른 바쁜 일이 있다며 모든 대관식 준비를 자신에게만 떠맡겼다.
아무튼 율리시즈가 왔다는 건 이제 슬슬 그 시간이라는 뜻이다.
“그럼 가지, 달리아.”
“네, 전하.”
꿀꺽, 달리아는 긴장 어린 의미로 침을 삼켰다.
매번 이 시간, 율리시즈는 달리아를 데리고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태자비궁을 나온 둘은 그 어떤 시종도 대동하지 않고 본궁에 들어섰다.
샬럿의 침입 이후로 경비를 더 강화한 본궁은, 황제의 침실에 가까워질수록 숨막히는 분위기를 자랑했다.
본궁의 꼭대기층. 황제의 침실이 있는 곳은 더더욱 심했다.
율리시즈와 달리아의 모습을 발견한 네 명의 문지기들은 그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더니 물었다.
“오늘 식사로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오리 구이가 좋겠군.”
뜬금없는 질문에도 율리시즈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 문지기가 물었다.
“곁들일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오렌지 주스면 되겠어.”
세 번째 문지기가 물었고,
“디저트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딸기를 올린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하지.”
마지막으로 네 번째 문지기가 열었다.
“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찻잎을 정량보다 두 배 더 넣어서 스트레이트로.”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를 뵙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율리시즈가 모든 대답을 끝마치자 문지기들은 그제야 제대로 된 예를 갖추며 문을 막고 있던 창을 거두었다.
이 이상한 질문들은 매번 바뀌었고, 율리시즈의 대답 역시 매번 바뀌었다.
황태자인 율리시즈마저도 문지기들과 긴 암호를 주고받은 끝에 겨우 출입을 허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겨우 침실로 들어온 율리시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 짓거리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았다.
“하여튼 샬럿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샬럿 황녀 옆에는 유능한 마법사가 붙어 있잖아요. 언제 또 무슨 방법으로 침입할지 모르니 안전장치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두는 게 좋죠.”
달리아가 애써 웃으며 율리시즈의 기분을 달래 주었다.
달리아의 예쁜 얼굴에 기분이 좀 풀어졌는지 율리시즈는 불평을 멈추고 척척 황제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촤악, 율리시즈가 캐노피를 거칠게 걷어내자 거기에는 전보다 더 초췌해진 안색의 황제가 잠들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달리아가 일할 차례였다.
“대관식 날 타이밍이 좋게 죽은 것처럼 보여야 해. 마치 내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모든 걱정을 내려놓은 것처럼 말이야.”
“알고 있어요, 전하.”
달리아는 굳은 얼굴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황제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툭하면 집안이 어쩌느니 하며 자신을 망신 주고, 깔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율리시즈의 손에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의 상태에 크나큰 책임까지 느끼고 있었다.
달리아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후 황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파아앗.
짧은 빛이 황제를 감쌌고 빛이 사라진 후, 황제의 안색은 이전보다 더 초라해졌다.
율리시즈가 흡족하게 웃으며 달리아를 칭찬했다.
“역시 그대는 마법을 쓸 때 가장 빛나는 것 같군.”
“별말씀을요. 전하를 위할 때 가장 빛나는 거죠.”
달리아 역시 웃으며 속으로 진짜 대답을 해주었다.
‘멍청하긴. 영양 마법인 것도 모르고.’
겉으로만 초췌해 보일 뿐, 실제로는 오랜 기간 누워 있다 일어나도 문제없도록 도와주는 영양 마법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오늘 치 일은 끝났다.
“이만 돌아가지, 달리아.”
“네, 전…….”
고개를 들어 올린 달리아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를 의아하게 여긴 율리시즈는 달리아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달리아와 같이 침대 기둥에 붙어 있는 무언가를 보고 불쾌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저, 전하. 그건…….”
“내 친부인 데미안 공…… 뭐, 뭐하는 거야, 달리아!”
그 말에 달리아는 거의 빼앗다시피 데미안의 사진을 낚아챘다.
율리시즈가 당황해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달리아는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고는 황제의 잠든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닮았어.’
율리시즈가 아니라, 라파엘과. 황제와 데미안 공의 얼굴을 잘 조합해 보니 라파엘이 떠올랐다.
이제야 그날, 샬럿이 자신을 급하게 물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걸 숨기고 싶었구나.
“이제 그만 내놔!”
율리시즈는 달리아에게서 빼앗듯이 사진을 다시 낚아챘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율리시즈의 눈이 사람 하나 죽일 듯한 수치를 품고 있었다.
‘아차, 실수했어.’
달리아는 뒤늦게 사색이 되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 죄송해요.”
율리시즈는 달리아를 이글이글 노려보더니 이윽고 사진을 북북 찢어 바닥에 흩뿌렸다. 그리고 차디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됐다. 들어가도록 해.”
“네, 전하…….”
쿵. 달리아는 황제의 침실에서 거의 쫓겨나듯이 나오게 되었다.
홀로 황태자비궁으로 돌아온 달리아는 소파에 엎어지듯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심란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와중에도 미약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결국 황족의 피라곤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잖아?’
사실 불안했다.
혹시라도 율리시즈가 자신이 흑마법사가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달리아는 분명 해코지를 당할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율리시즈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 주제에 내 집안 가지고 날 모욕하다니.’
확 대관식 때 터뜨려 버려? 작은 복수심이 불타올랐지만 이내 현실이 그걸 꺼트렸다.
‘맞아. 그날 나도 같이 심판 받기로 되어 있지.’
결혼 상대를 잘못 고르면 고생한다더니.
그래도 이미 거짓말쟁이 황태자비라고 비웃음 당했던 나날 덕에 대관식 날이 그렇게 충격이진 않을 것 같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때였다.
“근심이 깊으신 모양입니다.”
분명 달리아 혼자였을 터인데 누군가 달리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갑자기 달리아의 방에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날 만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오, 오베론 마탑주.”
오베론이 매혹적인 웃음을 띤 채 달리아의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