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126화
홀로 남은 라파엘은 책상에 앉아 혼란스러움을 달래 보려 했지만 몇 시간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라파엘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라파엘이기에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내가, 황제의 아들이라고?’
문득 황제가 아직 멀쩡했던 시절, 그녀가 라파엘을 붙잡았던 일이 떠올랐다.
마치 자신을 누군가와 투영해서 본 듯, 놀란 얼굴을 했던 황제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는 이미 자신이 데미안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새삼 놀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겠군. 내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놀란 거겠지.’
헛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는 척 했으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자신의 진짜 출생만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꼴불견이었다.
‘왜 황제는 자신의 아들이 뒤바뀐 것을 모르고 있었지?’
황제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정보를 토대로 황제의 행동을 분석하려던 라파엘은 멈칫하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이제 내 정보도 딱히 신뢰가 가지 않으니 황제의 행동의 이유를 유추해 봤자군.’
살면서 자신의 존재의의가 이렇게까지 무너진 순간이 있던가?
라파엘이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푹 떨군 그때였다.
“저, 라파엘. 일해?”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렸다.
이블린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자신의 지금 모습이 꼴불견이라 해도 이블린을 걱정시킬 수는 없다.
라파엘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고민 끝에 자리에서 일어난 후, 벽거울로 자신의 얼굴 표정을 정돈한 뒤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이블린. 늦은 시간에 안 주무시고, 어쩐 일이십니까?”
이블린은 그런 라파엘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방 안에 발을 내디딘 후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러고는 라파엘을 힘껏 끌어안더니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많이 혼란스럽지?”
라파엘은 조금 놀랐다. 표정 정리는 완벽했을 텐데.
하지만 이블린이 눈치채 줬다는 사실이 기뻐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기댔다.
“……티 많이 납니까?”
“알아 달라고 시위했잖아.”
그랬나. 라파엘이 머쓱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 이블린이 키득거리며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이 또 위로가 되어 라파엘은 이블린을 더더욱 세게 안았다.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다가, 슬슬 다리가 아팠는지 이블린이 물었다.
“일단 차 한잔할까?”
“아, 제가 부주의했군요. 금방 내오겠습니다.”
마치 이블린의 집사로 일한 경력이 10년이라도 되는 듯 라파엘이 지나치게 미안해하며 이블린을 놔주었다.
그 틈에 이블린은 라파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더니 눈을 접어 웃는, 특유의 개구진 얼굴로 명령했다.
“넌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할 테니까.”
“……차 내릴 줄 아십니까?”
“찻잎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거잖아.”
“…….”
라파엘은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기필코 자신이 차를 내려 주고야 말겠다는 이블린의 확고한 의지 어린 표정에 그는 한숨을 쉬며 다구와 찻잎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찻잎은 이걸 쓰시면 됩니다. 초보자들도 우리기 쉽거든요.”
“그래.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훔쳐보지 말고!”
이블린은 그렇게 말하더니 라파엘의 몸을 억지로 돌렸다.
낑낑거리는 모습에 라파엘은 져 주는 척 등을 돌렸고, 본격적으로 이블린의 차 우리기가 시작되었다.
“앗.”
우당탕, 쨍그랑!
……차를 우릴 때 저런 소리가 나던가?
시작한 지 1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는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물 담긴 주전자를 제대로 들 수는 있는지, 들다가 떨어뜨려 화상이라도 입으면 어쩌지 불안감에 당장이라도 확인해 보고 싶어진 라파엘은, 최대한 이블린이 자존심 상하지 않게 입을 열었다.
“힘드시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날 뭘로 보고. 됐어, 넌 앉아 있어.”
챙, 우당탕.
이블린의 대답과 함께 또다시 다기끼리 부딪히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은 정말로 이블린이 어떻게 차를 우리는지 궁금해졌지만 그녀의 명령을 따라 가만히 기다렸다.
차를 우린다기에는 좀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쪼로록 하는 소리와 함께 이블린이 환성 비슷한 소리를 터뜨렸다.
“다 됐다!”
라파엘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제 돌아봐도 됩니까?”
“응.”
라파엘은 드디어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티 테이블 위에는 옅은 김이 나는 두 잔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이블린은 어서 앉으라며 눈빛으로 라파엘을 재촉했고,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얼른 마셔 봐.”
이블린이 양손으로 턱을 괴고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라파엘에게 차를 권했다.
그 순간, 라파엘은 조금 검붉은 빛깔의 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차가 원래 이런 빛깔이 아닐 텐데.’
좀 더 까만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잘못 우렸나 보다.
하지만 어떻게 우렸든 마실 생각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블린이 준 차를 어떻게 거절하겠나. 독이 들었다 해도 마실 것이다.
‘아니, 지금 당장은 곤란하고 한 50년 뒤쯤에.’
지금 음독하고 죽어 버리면 이블린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길고 무거운 각오 끝에 라파엘은 달칵,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블린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찻잔에서 입술을 뗀 라파엘은, 찻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입술에 찻잔을 가져가 꿀꺽, 차를 마셨다.
이블린이 긴장 반 기대 반의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맛있어?”
“……맛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블린이 내려 준 차의 맛은 최악이었다.
오랜 시간 내린 탓인지 떫었고, 그러면서도 미지근했다. 찻잔을 제대로 데워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건 있었다.
생전 이런 일 하나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 열심히 내려 준 차의 맛은 지독하게 위로가 되는 맛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마시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라파엘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던 이블린은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는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고백했다.
“나도 말해야 할 게 하나 있어.”
“뭐죠?”
“옛날에 나랑 율리시즈가 약혼할 뻔했대. 완전 어린애 때 말이야.”
“……예?”
라파엘은 그만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율리시즈와 이블린이 약혼할 뻔했다니, 라파엘의 출생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더 충격이었다.
가만히 이블린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은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한 번 죽었던 것도 놀랍지만, 오베론이 그를 살리는 데 일조했다는 것 역시 놀랍군요.”
“그치? 하여튼 그 새끼, 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보였어.”
“푸흡.”
내내 심각한 얼굴을 유지했던 라파엘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블린이 손을 내밀어 라파엘의 볼을 콕 찔렀다.
라파엘은 웃다 말고 말을 더듬었다.
“뭐, 뭐하시는 거죠?”
“이제 좀 웃는다 싶어서.”
“아.”
라파엘은 머쓱하게 자신의 입꼬리를 만져 보았다. 아까보다 얼굴 근육이 풀어진 게 느껴졌다.
“어때, 내가 있어서 다행이지?”
히히, 이블린이 눈썹을 치켜 세우며 웃고는 사정없이 라파엘의 볼을 찔렀다.
라파엘은 가만히 볼 찌르기 공격을 당하면서도 그저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무척 혼란스러울 텐데, 이렇게나 열심히 자신을 위로해 준 이블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격 당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블린은 웃는 얼굴 그대로 당황스러워했다.
“어어? 왜, 왜 일어나?”
하지만 라파엘은 이블린에게 반격하려고 일어난 게 아니었다.
라파엘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이블린의 앞에 무릎 꿇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중얼거렸다.
“한 번도 과거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율리시즈 황태자가 부러워지는군요.”
“왜?”
“당신과 어린 시절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짜 황자도 아니었으면서 말이에요.”
“그건 나도 좀 아쉽긴 하네. 근데 어차피 진짜 나도 아니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건 너라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이블린이 라파엘을 포개듯 감싸 안았다.
“나는 황실 며느리 같은 건 딱 질색이야. 오히려 지금이 더 좋아.”
이블린은 정말로 마법사 같았다.
마법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흑마법사가 아니라, 몇 마디의 말과 포옹 하나로 라파엘의 마음을 몽글몽글한 마시멜로처럼 만드는 마법사 말이다.
이블린의 다정한 몇 마디에 얼마 되지 않았던 질투조차 눈 녹듯이 사르르 증발되었다.
그래, 어차피 황제나 셀레스티안 후작, 그 어느 쪽도 부모로서 자랑스러운 사람은 아니다.
라파엘에게 바뀐 건 그저 친모가 사실 황제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라파엘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이블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손등에 입 맞췄다. 촉촉한 입술의 감촉에 이블린이 약간 움찔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라파엘은 눈을 나른하게 뜬 채 의뭉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일부러 물어보는 거지?”
“예.”
“하여튼.”
이블린이 입술을 댓 발 내밀더니 벌이다, 하며 양손으로 라파엘의 볼을 사정없이 문댔다.
자신의 얼굴이 큰 매력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라파엘이 기겁하며 몸을 뒤로 내뺐다.
“하지 마세요! 못생겨집니다!”
“그럼 날 놀리고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어디 한번 내 앞에서 못생겨져 봐라.”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우당탕! 라파엘이 이블린의 손길을 피하려다 뒤로 넘어져 버렸고, 그의 얼굴을 세게 붙잡고 있던 이블린까지 끌어 당겨졌다.
서로 사이좋게 바닥에 자빠지게 된 둘은 놀란 마음에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우리 완전 바보 같아.”
“그러게 말입니다. 남들이 보면 기겁하겠어요.”
“보면 뭐 어때.”
“하긴, 보면 뭐 어떻습니까. 지금 저희가 이렇게나 행복한데.”
라파엘은 혹시라도 이블린이 카펫에 손가락 하나라도 닿을까, 자신의 위에 누운 이블린의 허리를 꽈악 끌어안았다.
이블린은 라파엘의 가슴팍 위에서 흥얼거리듯 말했다.
“율리시즈는 빠른 시일 내에 대관식을 치르려 할 거야.”
“아직 방해물은 남았지만 헤베 영애가 우리 쪽에 붙었으니 예전보다는 일이 수월해질 겁니다.”
라파엘 역시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블린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율리시즈에게 주고, 그가 지금까지 주제넘게 갖고 있는 사지 멀쩡한 삶을 빼앗을 생각에 악랄한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대관식 날, 황제를 깨워 버리자고. 그 자식이 화려하게 몰락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