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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25)화 (125/154)

125화 - 125화

“율리시즈가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고? 그거 사실이야?”

나는 아까까지 새침 떨던 모습은 전부 집어 던지고 달리아에게 척척 다가가 물었다. 나에 대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는 라파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 맞습니까, 헤베 영애?”

달리아는 설마 우리가 모를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얼굴로 샬럿의 눈치를 봤다.

“호, 혹시 제가 말하면 안 될 걸 입에 담았나요?”

샬럿은 가만히 웃더니 우선은 달리아를 향해 말했다.

“아예 말 못 할 것도 아니지. 하지만 일단은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샬럿이 설렁줄을 당기자 밖에서 파그라시움의 직원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문을 두드린 후 들어왔다.

“황궁까지 모시겠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아, 저……!”

달리아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거의 연행되다시피 황궁으로 귀환당했다.

나는 달리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샬럿이 누구보다도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아가 빠지는 게 최선으로 보였으니까.

“…….”

외부인이 완벽하게 사라진 지금 남은 건 취조뿐이었다.

그런데 나보다도 한발 빠르게, 라파엘은 마치 방해꾼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샬럿을 물어뜯을 기세로 물었다.

“샬럿 황녀. 언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설마 제게 그 보석을 찾아 달라고 한 것도, 율리시즈 황태자가 황제의 친자가 아니기 때문입니까?”

“잠깐. 왜 그렇게 흥분했어, 라파엘?”

라파엘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항상 온화하고 의뭉스러운 얼굴이 아이덴티티였던 라파엘은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확실히 율리시즈가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게 충격적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샬럿과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데 자신에게는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아 화난 건가?

라파엘은 정보를 취급하는 암흑가의 수장이니 그럴 수 있다.

나는 일단 지나치게 흥분한 라파엘을 가라앉히고자 옆에서 그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일단 진정 좀 해, 라파엘. 율리시즈가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건 일단 그 새끼를 황위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는 말이잖아.”

“그게 아닙니다, 이블린. 제가 지금 알고 싶은 건…….”

라파엘이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마치 나에게 숨겨야 할 걸 들킨 사람처럼 말이다.

그 모습에 내 눈썹이 움찔거렸다.

‘라파엘이 나한테 숨기는 게 있다고?’

물론 라파엘이 내게 모든 걸 말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래도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샬럿이 우리 사이를 중재하듯 말을 얹었다.

“이쁜아. 라파엘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고 있니?”

샬럿의 질문에 곧바로 나는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의 푸른 눈이 해일이라도 일어난 듯 떨리고 있었다.

나는 라파엘의 허락을 기다렸고 라파엘은 내게서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아주 조그맣게 끄덕였다.

그의 허락에 나는 조심스럽게 샬럿을 향해 대답했다.

“……라파엘한테 들었어. 선대 셀레스티안 후작이 누군가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았는지 샬럿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이건 왜 묻는 거지? 싶던 그때, 샬럿의 질문이 나를 기습했다.

“그렇다면 율리시즈의 친부로 알려진 데미안 공이 저지른 부정은?”

“……!”

만약 머릿속에서 천둥이 내리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샬럿의 한 마디에 머릿속에 흩어진 퍼즐이 하나로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묘하게 친한 듯 안 친한 듯한 라파엘과 샬럿.

부정을 저질렀던 라파엘의 친부.

병에 걸려 죽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부정을 저질러 황제에게 죽임 당한 두 번째 황후 데미안 공.

율리시즈에게 유독 엄한 황제.

“설마.”

나는 입을 틀어막고 라파엘과 샬럿을 번갈아 보았다.

라파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더니,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 달라는 얼굴로 샬럿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상의 진실은 언제나 잔인하다던가.

샬럿은 기어코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파엘의 친부는 데미안 공이야. 그리고 친모는 셀레스티안 후작이 아니라 바로 내 모친, 황제 폐하시지.”

예상을 하는 것과 직접 대답을 듣는 것은 무척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의 충격이 가실 새도 없이, 샬럿은 쐐기를 박아 넣었다.

“내 이부동생은 바로 너야, 라파엘.”

* * *

파그라시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달리아는 어쨌든 흑마법사들의 도움으로 황궁에 조용히 돌아올 수 있었다.

혹시 모를 감시를 피해 황태자궁의 정원 구석에 떨어진 달리아는 아까 전 심각했던 상황을 되새겼다.

‘후작님, 무척 혼란스러워 보이셨지.’

그러고 보니 라파엘의 얼굴, 누군가와 닮은 듯했는데.

누군가와 닮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야. 얼른 돌아가야 해.’

기억은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여유를 갖고 있다 보면 천천히 떠오를 것이다.

달리아는 달빛을 피해 그늘을 걸어 조심조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야심한 시각이라 복도는 어두웠고, 침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도 없었다. 그랬기에 달리아는 안심하고 침실 문을 열 수 있었지만, 발을 디디기 무섭게 낮은 목소리가 달리아의 귀에 꽂혀들었다.

“어딜 갔다 이제 오지?”

“저, 전하.”

“어딜 갔다 오느냐고 물었다, 달리아.”

율리시즈는 불도 켜지 않고 침대 위에 다리를 쩍 벌리고 걸터앉아 스산한 눈으로 달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율리시즈가 기다리고 있을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불 꺼진 방에서 저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몸에 각인된 공포로 달리아의 몸이 덜덜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율리시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협탁 옆에 있던 화병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도대체 샬럿을 처리하지 않고 어디서 뭘 하다 왔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쨍그랑!

화병은 달리아의 바로 발치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산산조각이 난 화병을 보니 몸의 떨림은 그대로인데도 이상하게 달리아의 머리는 차가워졌다.

‘도대체 이런 사람의 어디가 좋다고. 내가 왜 그랬을까.’

폭력밖에 쓸 줄 모르는 무능한 사람. 달리아가 그토록 혐오하는 헤베 백작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사랑하고 왜 그렇게 절절맸을까.

자신의 꼴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지, 창피해도 너무 창피해서 도리어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지금 웃었다간 율리시즈의 화를 부추길 거다.

웃음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율리시즈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달리아는 군말 않고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전하. 제 속셈을 읽은 샬럿 황녀가 먼저 수를 써 버렸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황궁 숲속에 있어서…….”

“이런 한심한! 도대체가 잘하는 게 뭐지? 최근에는 노력하는 듯싶더니 기어코 또 나를 실망시켜!?”

“……죄송해요, 전하. 용서해 주세요.”

달리아는 아까보다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변명하지 않고 순순히 사과하는 달리아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율리시즈는 씩씩 성을 내면서도 아까처럼 소리 지르지는 않았다.

대신 거칠고 듣기 싫은 숨소리가 방을 채웠다.

한참 후, 율리시즈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달리아를 용서했다.

“일단은 내가 샬럿을 처리했으니 이번 일은 넘어가지, 달리아.”

“……감사해요, 전하.”

여전히 다루기 쉽군.

옛날에 눈은 삐었어도 사람의 본질 하나는 제대로 봤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달리아는 뉘우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평생을 연기하며 살아왔는데 이 정도 연기는 아주 쉽다.

그것도 모르고 율리시즈는 달리아를 충분히 몰아붙였다고 생각했는지 손수 일으켜 주더니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겨 그대로 품에 끌어안았다.

“……?”

순간 달리아의 얼굴은 평정심을 잃고 찌그러졌다. 다행히 율리시즈가 달리아를 꽈악 안고 있었던 덕에 들키지는 않았다.

달리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율리시즈는 세뇌하듯 달리아에게 속삭였다.

“달리아.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네가 잘해야 해. 잘 알고 있잖아.”

“……그럼요. 당연히 잘 알고 있죠.”

그렇게 대답하며 달리아는 생각했다.

‘……체향이 원래 이렇게 역겨웠나?’

분명 좋았던 것 같은데, 사람이 싫어지니 체향도 싫어지는 건가?

마치 헤베 백작의 품에 안긴 기분이다. 어서 벗어나서 몸을 박박 씻어 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샬럿은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나를 방해할 거다.”

율리시즈는 달리아를 놔주더니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 단단히 일렀다. 그 짧은 사이에 달리아는 바로 표정을 정돈했다.

율리시즈가 원하는, 겁에 질린 순한 얼굴을 말이다.

“샬럿이 회복하기 전이 마지막 기회야. 나는 황제가 될 거다. 그럼 이제 공녀도, 샬럿도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해.”

이미 샬럿은 달리아의 마법으로 다 회복되었다.

그걸 꿈에도 모를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겠지, 달리아?”

율리시즈의 푸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다. 샬럿을 너의 손으로 직접 처리해라. 황제가 될 나의 손은 깨끗해야 하니.

‘……정말 최악이야.’

한 명의 헤베 백작도 역겨운데, 두 명이나 있었네.

그걸 알아보지 못하고 결혼한 것이 달리아의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멍청했어, 내가.’

멍청했으니 어리석고 어리석은 율리시즈를 택해 버렸다.

하지만 아직은 되돌릴 수 있다.

이블린과 샬럿이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자신을 용서했으니까.

그랬기에 달리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제게 맡겨 주세요, 전하.”

“그래. 믿고 있어. 나의 사랑하는 달리아.”

율리시즈가 다시 한번 달리아를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았다.

달리아는 그의 어깨에 턱을 걸친 채 율리시즈를 흘겼다.

황제의 친자도 아니면서, 감히 황제와 황제의 딸을 해하고 새로운 황제가 되겠다니.

가소로워도 이렇게 가소로울 수가 없다.

앞으로 조금만 더 참으면 율리시즈는 몰락할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그와 법적으로 얽혀 있으니 몰락을 피해 갈 수는 없지만, 율리시즈와 헤베 백작을 같이 보내는 데 자신의 평판만이 필요하다면 이건 남는 장사였다.

“저도 사랑해요, 전하.”

그랬기에 달리아는 기꺼이 이런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달리아는 더 이상 옛날의 달리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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