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124화
“샬럿!”
나는 지하실을 빠져나와 샬럿의 방으로 다급히 뛰어갔다.
쾅! 하고 갑자기 문을 열었음에도 샬럿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평소와 같은 얼굴로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어머, 이쁜이. 언니 다쳤다고 해서 뛰어왔니?”
샬럿의 표정은 평소대로 얄미웠지만 안색이나 몸 상태는 그렇지 않았다.
복부를 칭칭 감은 붕대에는 피가 짙게 배어 있었고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를 증명해 주듯 피부는 창백했다.
나는 샬럿이 왜 이 꼴로 돌아왔는지 라파엘에게 눈으로 물었다. 라파엘은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낭패 어린 얼굴로 말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황태자에게 찔렸습니다. 귀환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로 간신히 돌아왔지요. 유다가 치료 마법을 쓰긴 했지만 흑마법사의 마법이라 완전하진 못해서 응급 처치만 간신히 한 수준입니다.”
진짜로 율리시즈가 찔렀다고? 제 누나를?
“이런 미친놈이! 지 혈육이란 혈육은 다 죽이려고 작정했대!?”
이블린은 자신의 기억 속 율리시즈와 지금의 율리시즈가 동일인물인지 진심으로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인성이 갈 데까지 가지 않고서야 모친에 이어 누이까지 찌를 수가 없다.
분개하고 있는 나를 본 샬럿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 쫄보가 참 많이 컸어. 감히 누님을 찌르고 말이야. 그런데 그것보다 이쁜이 네 일은 잘 끝났니? 보아하니 잘 끝난 것 같다만.”
샬럿이 내 등 뒤를 흘겨보았다. 그 순간 내 뒤에 숨어 있던 달리아가 움찔 떨었다.
달리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내 눈치를 보더니 이윽고 용기를 내서 모습을 드러냈다.
뭘 하려고 그러지? 설마 치료해 주려고?
그러나 내 예상을 빗겨 가고, 달리아는 다짜고짜 무릎을 털썩 꿇었다.
“……죄송해요.”
“뭐, 뭐하는 거야? 일어나!”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나는 당황하며 달리아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방구석 마법사면서 힘이 세다.
달리아는 고개조차 못 들겠는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제가, 제가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해서 괜히 황태자에게 붙는 바람에, 공녀님과 황녀 전하께 커다란 피해를 끼쳤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순간 달리아를 일으켜 세우던 내 손이 멈칫했다.
솔직히 샬럿이 다친 데에 달리아의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다. 게다가 샬럿이 다친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미안하면 상처 좀 치료해 주겠니?”
“……네?”
샬럿의 가벼운 한 마디에 모두가 제 귀를 의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작 샬럿은 라파엘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자꾸 피가 나오니 불편하구나. 라파엘 쟤가 지금은 저래도 나중에는 나한테 눈치 줄걸? 얹혀사는 주제에 침구를 더럽혔다고 말이다.”
“아무리 저라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표정을 수습한 라파엘이 샐쭉하게 대꾸했다.
달리아는 그런 샬럿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로 나를 힐끗거렸다.
‘아니, 나는 왜 봐.’
아무래도 샬럿이 날 예뻐하니 샬럿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방법 역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샬럿을 슬쩍 바라보자, 샬럿은 인자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떨떨하게 달리아를 일으켜 준 뒤, 샬럿에게 가 보라며 턱짓했다.
달리아는 조심조심 샬럿에게 다가갔다. 샬럿은 망설임 없이 배에 감긴 붕대를 풀었고, 달리아가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상처가 회복된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샬럿은 이제야 개운하다는 얼굴로 씨익 웃었다.
“고맙구나.”
“아, 아닙니다!”
달리아가 황송하게 고개를 숙였다.
백마법사로 돌아온 달리아의 치료 실력은 제법이었다. 샬럿의 배는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아, 잠깐만.”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고, 나는 소리쳤다.
“황제 폐하께 건 저주! 그거부터 일단 풀었어야 했는데!”
황제에게 흑마법을 쓴 건 달리아였다. 하지만 지금 달리아에게 남아 있는 흑마력은 없다.
백마법사여도 흑마법을 풀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럴 수는 없는지 달리아가 역시 아차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아……! 어, 어떡하죠. 흑마법으로 건 저주는 흑마법으로만 풀 수 있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망할, 역시나! 달리아에게서 힘을 수거하기 전에 황제에게 걸린 저주를 풀게 했어야 했는데!
‘아냐, 일단 내 힘을 되찾는 게 먼저였잖아.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달리아한테 흑마법 좀 쥐여 줘?’
그런데 뭘 믿고? 달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힘을 돌려주긴 했지만 힘을 또다시 손에 쥐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내 의심을 읽은 달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녀님의 힘으로 건 저주이니 공녀님께서도 푸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난 흑마법 못 쓰는데?”
내 상태는 지금 힘만 넘치는 초보에 불과했다.
내가 쓴 흑마법은 흑마법이라고도 할 수 없는 파괴적인 행위뿐이었다.
혹시 저주 풀겠다고 내가 황제한테 손댔다가 뭐라도 터지면…….
불안해하는 내게 샬럿이 말했다.
“이쁜아. 네 기억이 돌아온 걸 보면 네가 흑마법을 썼던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 그런가? 하긴 옛날의 이블린은 죽은 사람도 살릴 만큼 뛰어난 흑마법사였다.
진짜 이블린이라면 황제에게 걸린 저주를 푸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겠지만 슬프게도 내가 해낼 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어쩌지, 이러다 진짜 이블린이 아니란 걸 들키겠다.
어떻게, 멍청한 척을 해서 빠져나갈까? 하지만 그건 너무 한심해 보이잖아.
어떡하나 싶어 머리를 쥐어 싸매는 내 어깨를 다독여 주며 라파엘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괜찮습니다, 이블린. 당장 깨우지 않아도 폐하의 생명에 지장은 없을 테니까요.”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 라파엘의 말대로 일단 그냥 두자꾸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대로 고개를 돌려 멀뚱멀뚱 샬럿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아무리 그래도 자기 엄마인데, 식물인간 상태로 더 두자는 게 정상인가? 라는 생각은 1초도 가지 않았다.
‘음, 샬럿이니까 가능하려나.’
나는 납득하고 있는 반면, 달리아는 샬럿이 반어법으로 자신에게 압박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폐하를 그 상태로 만든 장본인으로서 가만히 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 폐하를 하루빨리 깨우겠습니다.”
“아니, 됐다. 정말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하, 하지만……!”
“정말 됐대도? 솔직히 지금 어마마마가 깨어나셔도 내 계획에는 방해만 될 뿐이다. 내 모친이라지만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기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거든.”
샬럿이 킥킥 웃었다.
나라면 타라가 그 꼴이 났다면 물불 안 가리고 깨울 방법을 찾았을 텐데, 샬럿은 황제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하긴, 황제는 샬럿을 드와이에 유배 보냈었지.’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아무튼 샬럿은 어떻게든 자기가 해결하려는 달리아의 태도가 썩 나쁘지 않았는지 법정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온화하게 웃으며 달리아의 머리에 툭 손을 얹었다.
“그래도 네 마음은 잘 알았다. 나는 앞으로 달리아 너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샬럿의 말에 달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오류가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던 달리아는 고개를 빠르게 내젓고는 더더욱 머리를 깊이 숙였다.
“저, 저는 황녀 전하의 어머니를 해치려 했어요. 저는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냥 저를 마음껏 질타해 주세요.”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뉘우치느냐 마느냐다. 물론 내가 널 싫어하지 않는다 해서 네게 피해를 입은 모황과 피해를 입을 뻔한 다른 사람들이 널 원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건 제대로 머릿속에 새겨 놓거라.”
그리고 그 순간, 달리아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간 내게 시비를 걸고, 죽이려 했던 것들 따위를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달리아는 내 눈을 피하는 일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제가 한 짓을 잊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
샬럿은 흡족스럽게 웃었다.
나 역시도 달리아를 조금쯤은 다시 보게 됐다. 남자 보는 눈이 다소 없었을 뿐이지, 자기 잘못을 똑바로 바라보는 점은 소설의 여주인공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샬럿은 창밖에 걸쳐진 달을 보더니 달리아에게 말했다.
“그럼 달리아. 너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네?”
오늘 참 달리아가 놀라는 모습을 많이 본다.
설마 자신을 돌려 보내 줄 거란 생각을 못 했는지, 아니면 율리시즈에게 돌아가기 싫은 건지 달리아가 불쌍한 토끼처럼 오들오들 떨며 물었다.
샬럿은 그 표정을 보며 킥킥 웃더니 덧붙여 주었다.
“네가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다.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선 네가 곤란하지 않겠니? 아무리 율리시즈가 못났어도 슬슬 제 부인을 찾을 거다. 화풀이로 삼든, 또 무언갈 명령하든 말이다.”
“아.”
달리아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가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돌아가도 되겠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찰랑이며 턱짓했다.
“가도 돼. 어차피 내 힘을 돌려받은 다음에는 돌려보내 줄 생각이었으니까.”
“……살아서 나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프라비체의 딸이라 거짓말이라 생각했구나?”
달리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래도 프라비체의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화도 안 났다. 그래도 나나 이블린이나 제 입으로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었다.
“도와준다고 말했잖아. 죽은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니?”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겠다고 손길을 내미는 건 꽤 오랜만이었기에, 심지어 그 상대가 달리아라 조금 부끄러워진 나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달리아는 이윽고 편안한 미소를 내게 보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제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도 도와주셔서요.”
처음으로 보는 달리아의 편한 미소였다. 역시 여주인공급 외모라 그런지,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됐다는 듯 팔짱을 꼈다.
“피장파장이야. 못되기로는 예전의 내가 더 못됐어.”
달리아가 푸스스 웃었다.
이 정도면 면 상당히 일이 잘 풀린 편이다.
그런데 돌아갈 채비를 하기 전, 달리아는 생각났다는 듯 샬럿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황녀 전하. 한 가지만 감히 여쭤도 될까요?”
“뭔데?”
샬럿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흔쾌히 허락했다.
달리아는 차마 꺼내기 조심스러운 말인지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이내 결정한 듯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서두를 꺼냈다.
“전에 지하 감옥에 갇히셨을 때, 율리시즈 전하와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아, 그때?”
지하 감옥에 갇힌 건 샬럿 본인이 아닌 유다였지만, 그는 샬럿이 준 매뉴얼대로 율리시즈를 몰아붙였었다.
그랬기에 나도 라파엘도 그 사실을 정정해 주지 않고 일단은 잠자코 듣고 있었는데.
“율리시즈 전하께서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면, 폐하의 친자는 따로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 순간, 나는 물론이고 라파엘의 표정도 싹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대형 폭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