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123화
“으윽…….”
한참 후, 이블린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흥건한 핏물 위에서 정신을 잃은 율리시즈였다.
“유, 율리시즈!”
이블린 역시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율리시즈와 똑같이 머리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지만, 몸에 흐르고 있는 흑마력이 그녀의 목숨을 부지해 주고 있는 것뿐이었다.
자신 역시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 따위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이블린의 머릿속은 그저 율리시즈를 살려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어, 어떻게 하지?’
이블린은 태생부터 방대한 흑마력을 지녔지만 사람을 살리는 방법까지는 몰랐다.
흑마법을 쓸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블린이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때였다.
저벅저벅,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이블린의 귀에 닿았다.
설마 황궁 사람인가? 이블린이 경계하며 고개를 들자, 반가운 목소리가 이블린을 안심시켰다.
“이런, 누군가 했더니. 이블린 너구나.”
“오베론!”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이블린이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고, 오베론 역시 친근한 얼굴로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어 인사했다.
이블린은 예전부터 마탑을 낀 이 호수에 자주 놀러 왔고, 오베론과 이미 안면을 텄다는 건 타라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어른도 모르는 비밀을 저마다 한두 개씩 품고 있는 법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오베론은 놀란 기색도 없이 이블린의 등 뒤 널브러져 있는 소년을 힐끗 보더니 물었다.
“네가 죽였어?”
“아니야!”
이블린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피를 흘린 상태에서 고개를 거칠게 움직이니 시야가 핑 돌았다.
쓰러지려는 이블린을 가뿐히 한 팔로 잡아 주고는 오베론이 살풋 웃었다.
“농담이야. 나뭇가지랑 같이 떨어져 있는 것만 봐도 알지. 뭣보다 네 머리에 이거.”
“……?”
오베론이 이블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자 순식간에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었다.
그제서야 이블린은 자신 역시 크게 다쳤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다 나았으니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율리시즈에게로만 쏠렸다.
이블린이 썩은 동앗줄이라도 붙잡듯 오베론의 옷자락을 잡고 소리쳤다.
“오베론, 쟤도 빨리 치료해 줘!”
그러나 오베론은 율리시즈의 맥을 짚더니 미련 없이 일어나 알려 주었다.
“이미 죽었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이블린.”
“어떻게 그래! 내 약혼자가 될 사람이야, 율리시즈는!”
“……약혼?”
오베론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누가 봐도 오베론의 심기는 좋지 않았지만 율리시즈가 죽었다는 사실 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 이블린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쳤다.
“그래! 오늘 엄마가 허락해 줬단 말이야! 그런데 나 때문에, 내가 괜히 나무 위에 올라가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블린이 목 놓아 울었다.
이블린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율리시즈를 좋아했다. 바보에 겁쟁이라 놀리긴 했어도, 황제 앞에서 기가 죽는 율리시즈가 늘 마음이 쓰였다.
결혼해서는 자신이 지켜 줄 거라고 다짐했는데, 약혼이 코앞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율리시즈를 잃을 수는 없었다.
“오베론, 제발 알려 줘. 율리시즈를 살릴 수 있는 마법은 없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이블린이 애원했다.
오베론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율리시즈의 시체를 한 번 흘기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듯 서두를 꺼냈다.
“내 힘이라면 무리지만 네 힘이라면 황자를 살릴 수는 있겠지.”
“그럼……!”
“하지만 마법에는 전부 대가가 있어.”
희망으로 화색이 된 이블린의 말은 금방 가로막혔다. 오베론은 고요한 눈을 하고 말했다.
“심지어 흑마법이라면 더하지. 이미 죽은 자를 살리려면 너도 최소한 죽음으로는 갚아 줘야 해.”
“죽음……?”
이블린이 놀란 눈을 하고 중얼거렸다.
마치 세상이 숨을 멈춘 듯 조용해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더 무겁게 다가왔다.
이블린이 주춤하니 오베론은 마치 포기하라는 듯 무서운 말로 겁을 주기 시작했다.
“운 좋게 죽음 대신 다른 대가를 치른다면 살겠지. 하지만 괴로울 거야.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일들이 널 기다리겠지. 거기다 네가 흑마법으로 황자를 살린 게 들킨다면 너와 황자의 약혼은 당연히 물 건너가고, 네가 힘들게 살린 황자는 다시 죽을 것이며, 너 역시 흑마법사로서 상드리움의 법에 의해 척결 당할 거야.”
그 순간, 이블린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흑마법사가 상드리움에서 용인되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마법이 이렇게 효율이 안 좋은가?
이블린은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 애써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그, 그냥 마법으로 살릴 수는 없는 거야?”
“그냥 마법으로는 사람의 목숨을 되살릴 수 없어. 되살릴 수 없으니까 생명인 거야. 흑마법은 그 순리를 벗어나기에 대가가 큰 거고.”
이블린이 떨리는 눈으로 지금도 차게 식어가고 있는 율리시즈를 바라보았다. 경련하는 손이 잘 손질된 머리카락 끝을 엉망으로 구겼다.
이블린의 불안을 가만히 지켜보며 오베론이 다시 물었다.
“다시 물을게, 이블린. 황자를 살리고 싶어?”
이블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오베론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블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후, 이블린이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살려야 해.”
“……뭐?”
기대를 어긋난 대답이었는지 오베론이 동요를 내비쳤다. 그럼에도 이블린의 의지는 확고했다.
“내가 율리시즈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율리시즈가 나 때문에 죽은 채 발견된다면 우리 가족은 끝이야!”
“…….”
“차라리 율리시즈를 살리고 내가 죽는 게 나아! 운 좋으면 나도 살 거잖아, 그렇잖아! 나는 가족들을 희생시키기 싫어!”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친 후, 이블린은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오베론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로브를 붙잡고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빌었다.
“네가 은혜를 안다면 날 도와줘. 나 덕분에 살았다며…….”
오베론은 이블린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는 듯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그랬지.”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이블린의 머리가 나부꼈고, 그 탓에 오베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졌다.
드디어 이블린이 원하는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럼 황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
그날 마탑을 낀 호수, 이블린의 흑마력으로 열매가 맺힌 고목나무 아래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흑마법이 실행되었다.
* * *
이블린의 기억을 모두 읽은 나는 머리를 쥐어 싸맨 채 혼란에 빠졌다.
‘율리시즈가 이미 한 번 죽었었고, 그걸 살린 게 이블린이라고?’
흑마법을 쓴 이블린이 무엇을 대가로 치렀는지는 지금 내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운 좋게 당장 죽는 건 피해 갔지만 어쨌든 간에 결국 죽어 버렸고, 율리시즈와의 약혼은 물론 친하게 지내던 어린 시절까지 세상에서 아예 없던 일이 되었다.
‘애초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 안 듣고 난리 친 건 율리시즈인데, 왜 이블린만!’
다친 건 이블린도 똑같았고, 율리시즈가 죽은 건 사고였다.
이블린이 일부러 죽인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어렸던 이블린은, 가족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이블린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걸 택했다.
‘바보같이……!’
살려 줘 봤자 이블린에 대해서는 기억 하나도 못 하고 커서는 자신을 죽이기나 했는데!
억울해서 내 치가 다 떨렸다.
이블린의 몸으로 산 세월은 길지 않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율리시즈가 더더욱 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내 모습이 불안정해 보였는지, 아까와 다르게 달리아가 내게 다가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공, 공녀님. 왜 그러세요?”
고개를 들어 달리아를 바라보니 그녀가 흠칫 놀랐다. 눈물이 고인 눈동자와 다르게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자신이 죽을 것 같았나 보다.
하지만 내가 죽일 건 달리아가 아니다.
나는 달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서슬 퍼렇게 뜨며 물었다.
“달리아. 너 앞으로도 나한테 협조할 생각 있어?”
“협, 협조라뇨?”
“율리시즈는 내가 몰락시킬 거야. 그럼 법적으로 그 녀석과 부부인 너 역시도 몰락하겠지.”
“……또 협박인가요?”
달리아가 질린다는 얼굴로 물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제안이야.”
“제안이라고요?”
“그래. 폐하를 그 꼬락서니로 만든 게 율리시즈라고 폭로해. 그러면 내가 네 이혼을 도와줄게. 그리고 헤베 백작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게.”
내 제안에 달리아의 노란 눈이 움찔 떨렸다.
무척이나 달콤한 제안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쉽게 내가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고 내 애간장을 태웠다.
“저, 저는…….”
달리아가 손가락을 뜯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기다리려던 내가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려던 그때였다.
“이블린!”
“꺄악!”
황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라파엘이 내가 있는 지하실에 급작스럽게 찾아왔고, 달리아가 깜짝 놀라 새된 비명을 질렀다.
평소였다면 노크라도 했을 사람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노크도 까먹고 쳐들어왔기에 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렇게 군다는 건 큰일이 났다는 뜻이다.
나는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샬럿 황녀가…….”
라파엘이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 버렸다.
하지만 현실은 내 예상 그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