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122화
그 순간, 이블린은 처음으로 거절이란 걸 당해 본 사람처럼 크게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렁거리기 시작하자 율리시즈는 서둘러 변명했다.
“절대로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왜!”
이블린이 눈물을 글썽이며 빼액 소리 질렀다. 율리시즈는 그 질문에 눈동자를 떨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나는 똑똑하지도 않고, 샬럿 누님 때문에 황제가 되지도 못하는데다가 맨날 어마마마와 누님께 혼나기만 하잖아. 너한테 그런 꼴 보이기는 싫단 말이야.”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율리시즈 딴에는 용기 내서 한 말이었는데, 이블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럼 고쳐 가면 되잖아!”
“맘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해.”
“흐음.”
이블린은 무언가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뭘 하려는 거지? 하는 그 순간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이블린이 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이블린이 나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뭇가지들이 크게 흔들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순식간에 계절을 뛰어넘기라도 하듯, 나무는 꽃을 피우더니 이내 작고 탐스러운 빨간 열매를 맺었다.
율리시즈가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무슨…….”
“어때, 굉장하지?”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이블린이 어깨를 으스댔다.
“깨달음의 열매야.”
“……처음 듣는데?”
“당연하지. 내가 방금 이름 붙였으니까.”
이블린이 순진하게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왜 하필 깨달음의 열매지? 율리시즈의 표정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이블린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
“먹어 볼래?”
“먹을 수 있는 거야?”
“난 먹고 안 죽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율리시즈가 입을 쩍 벌렸다. 이블린은 다른 프라비체 사람들과 다르게 귀여웠지만 그녀 역시 프라비체였다.
좀처럼 열매에 흥미를 가져 주지 않는 율리시즈가 짜증났는지, 이블린이 그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독이 들었을까 봐 무서워? 겁쟁이구나?”
“아, 안 무섭거든?”
“거짓말.”
“진짜야!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어마마마께 혼나니까 그런 거야!”
“폐하껜 비밀로 하면 되잖아. 들킨다 해도 내가 준 건데, 그렇게 뭐라 안 하실걸?”
그건 그랬다. 황제는 타라의 딸인데다 귀엽고 붙임성 좋은 이블린을 무척이나 귀여워했으니까.
평소 율리시즈 혼자서 저질렀다면 크게 혼났을 일을 이블린이 감싸 주어 그냥 넘어간 적도 몇몇 있었다.
율리시즈의 귀가 팔랑거리자 이블린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거 엄청 맛있다?”
“……진짜?”
“응! 내가 먹어 본 과일 중에서 제일 달고 맛있어.”
꿀꺽. 율리시즈는 평소에 단것을 양껏 먹지 못했다.
황족이라면 스스로의 식탐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황제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런데 까다로운 이블린이 인정하는 맛이라니!
율리시즈의 눈이 저절로 빨간 과육으로 옮겨졌다.
저 작고 탱탱한 열매를 따서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율리시즈가 홀린 듯 물었다.
“몰래 사다리 빌려올까?”
“그럼 들키잖아, 바보야.”
율리시즈는 난데없이 질타를 당했다. 바보라고 불려 억울해진 율리시즈는 그럼 뭐 어떻게 하냐는 식으로 이블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블린은 말괄량이처럼 씨익 웃었고, 율리시즈는 불안을 감지했다.
“자, 겁쟁이 율리시즈 탈출 작전 첫 번째! 나무를 타서 열매를 따 와!”
“저길 어떻게 올라가!”
율리시즈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열매는 율리시즈의 키보다 세 배는 높은 곳에 열려 있었다.
그런데 이블린은 뭐가 문제냐는 듯 되려 이렇게 말했다.
“왜 못 올라가?”
“못 올라가! 높잖아!”
“올라갈 수 있거든? 봐 봐.”
율리시즈는 설마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블린이 신발을 훌렁 벗더니 그대로 나무에 매달려 버렸다.
“이블린!”
“걱정 마, 전에도 이렇게 열매 따 왔어!”
전에도? 율리시즈는 가끔 이블린이 놀라웠다.
어떻게 그런 집안에서 저런 천방지축이 나왔지? 율리시즈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해? 너도 올라와!”
그런 율리시즈의 속마음도 모르고 이블린이 다그쳤다.
황자로서 교육을 받아 온 율리시즈에게 나무를 타는 건 창피한 것과 다름없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이블린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쭈뼛거리는 율리시즈를 보며 이블린은 순식간에 나무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물었다.
“나랑 약혼하기 싫어?”
“아냐!”
“그럼 뭐해?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이블린이 볼을 부풀렸다.
이블린의 눈살에 못 이기는 척 율리시즈는 허둥지둥 신발을 벗었다. 그러자 이블린은 만족한 듯 다시 나무를 붙잡고, 잘난체하며 율리시즈에게 일렀다.
“내가 밟은 곳만 잘 밟고 올라오면 문제없어!”
영차영차, 이블린은 마치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열매가 있는 가지 쪽에 도달했다.
높이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쩜 저렇게 나무를 잘 탈 수가 있지? 율리시즈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대단해! 정말 대단해, 이블린!”
“그렇지? 너도 할 수 있으니까 빨리 와 봐!”
“으, 응. 노력해 볼게.”
율리시즈는 자신 없는 말투로 쭈뼛쭈뼛 나무 기둥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올라가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튀어 나와 있는 부분이 있었다. 율리시즈는 조심조심 튀어나온 부분을 밟고 낑낑대며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잘하고 있어, 율리시즈!”
“손바닥이 너무 아파, 이블린!”
“거길 잡으니까 그렇지, 이 바보야. 거기 말고 옆에 그 부분 잡아!”
이블린은 이미 열매가 있는 가지 쪽까지 올라가서 율리시즈에게 소리쳤고, 율리시즈는 울먹거리면서도 열심히 기어 올라갔다.
“조금만 더 힘내!”
“끄응……!”
“조금만 더!”
솔직히 말하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내려가기도 무서웠다. 뭣보다 이블린에게 바보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율리시즈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블린의 격려는 율리시즈가 가지 위에 올라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율리시즈의 손이 자신의 발치에 닿고, 끙차 하는 소리와 함께 율리시즈의 얼굴이 가지 위로 뿅 튀어나왔다.
힘겨운 나무타기를 마친 율리시즈를 보며 이블린은 마치 제 일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기뻐해 주었다.
“거봐, 할 수 있잖아!”
“다신 못 해, 너무 힘들어!”
율리시즈가 나무 기둥을 꽈악 붙잡은 채 가지에 걸터앉으며 징징거렸다. 무섭지도 않은지, 이블린은 무엇 하나 붙잡지 않고 나무 위에 가볍게 걸터 앉더니 으스대며 정면을 가리켰다.
“여기 이 풍경을 보면 또 나무 타고 싶어질걸?”
“……?”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다고? 라는 생각과 함께 율리시즈가 시선을 앞으로 돌린 순간, 그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바닥이 저 멀리 있는 것 같아 무서웠지만, 정면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달랐다.
햇빛을 받아 바다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호수, 호수와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푸른 하늘에 바람은 땅을 밟고 서서 맞는 것보다 더 시원하고 상쾌했다.
그저 나뭇가지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을 뿐인데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키가 아주 큰 어른이 된다 해도 이런 시야를 갖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멋지다…….”
“그치, 굉장하지?”
이블린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율리시즈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괜히 쑥스러워진 율리시즈는 말을 돌렸다.
“그, 그것보다 열매를 따 오라고 하지 않았어?”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풉 하고 웃었다.
“그렇긴 한데, 너 같은 겁쟁이한테 맡겼다가는 일 날 것 같으니까 그냥 내가 따 올게. 넌 가만히 있어, 율리시즈.”
“겁쟁이 아니야! 나무도 잘 올라왔잖아!”
“거의 울면서 올라왔잖아?”
이블린이 아까 율리시즈의 표정을 흉내 내며 깔깔 웃었다.
그때였다.
아이 두 명의 체중을 감당하기엔 가지가 버거웠는지 살짝 흔들렸고, 율리시즈는 기겁을 하며 기둥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 그만 웃어! 가지가 흔들리잖아!”
“아하하! 거봐, 겁쟁이 맞잖아!”
“제바알!”
율리시즈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이블린은 한참 후에야 웃음을 그쳤다. 이블린은 웃느라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튼 열매는 나 혼자 따 올게. 어차피 저쪽은 가지가 얇아서 나 혼자 가야 하거든.”
“뭐, 뭐야! 그럼 내가 못 따 올 걸 알면서도 따 오라고 한 거야?”
율리시즈가 배신당한 얼굴로 항의하자 이블린은 영악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휙 흩날렸다.
“나무 정도는 타야 이블린 프라비체의 약혼자라고 할 수 있지.”
“이, 이……!”
사기꾼에 거짓말쟁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율리시즈는 한 번도 이블린을 이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블린은 그걸 알고 한쪽 다리를 가지 뒤로 넘기고는 율리시즈를 향해 단단히 경고했다.
“아무튼 절대로 따라오면 안 돼!”
이블린이 엉금엉금 나뭇가지를 꽈악 붙들고 천천히 앞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블린의 체중으로도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율리시즈는 불길한 생각을 했다.
‘가지가 부러질 것 같아……. 만약 이블린이 다치면 어떡하지?’
가장 낮은 가지로 올라왔다 해도 나무 자체가 크다 보니 높이가 있다. 만약 가지가 부러져 이블린이 떨어진다면 크게 다칠 것이고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황자는 자신이지만 황제의 사랑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처지인 반면, 이블린은 프라비체의 보물이며 황제가 어여삐 여기는 아이다.
책임은 무조건 율리시즈에게로 향할 것이다.
만약의 상황이 무서웠던 율리시즈는 그만 생각이 짧아져 이블린의 뒤를 엉금엉금 뒤따라가 소리쳤다.
“잠깐, 이블린! 차라리 내가 가서……!”
빠각. 그때였다.
이블린의 체중은 견뎠어도 율리시즈의 체중까지는 견딜 수 없었는지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어……?”
이블린은 양손에 열매를 쥔 채 아까보다 가까워진 율리시즈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라는 얼굴을 보였다.
당황한 건 율리시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정도 움직였다고 가지가 부러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진 속도는 후회보다 빨랐다.
이블린과 율리시즈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빨간 열매 몇 알과 함께 추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