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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21)화 (121/154)

121화 - 121화

“이블린!”

프라비체 모녀가 입궁했단 소식에 율리시즈가 저 멀리서 이블린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왔다.

하지만 기세 좋게 달려온 것과 다르게, 율리시즈는 뒤늦게 타라를 발견하고는 움찔 떨었다. 프라비체 공작의 얼굴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긴장을 풀어 주고자 이블린이 활짝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 율리시즈. 잘 지냈어?”

“으, 응! 이블린도?”

이블린의 한 마디에 율리시즈는 타라에게서 시선을 재빨리 거두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가 뺨을 발그레 붉히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율리시즈를 고깝게 보던 순간이었다.

“율리시즈.”

무겁고 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복도를 울렸다.

율리시즈는 아차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화가 난 황제가 서 있었다.

황제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율리시즈의 앞에 다가와서는 율리시즈를 꾸짖었다.

“항상 품행을 단정히 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황궁에서 뛰라고 누가 가르쳤지?”

“그, 그것이…….”

율리시즈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블린은 익숙하다는 듯 험악한 얼굴을 한 황제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불쑥 황제의 앞으로 나와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강녕하셨나요?”

“폐하를 뵙습니다.”

그 옆에 서 있던 타라 따라서 인사했다. 황제는 둘의 얼굴을 눈에 담더니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오오, 우리 공녀도 함께 왔구만. 가려져서 안 보였네. 잘 지냈느냐?”

“폐하께서 마음 써 주신 덕에 평안하게 보냈습니다.”

이블린의 귀여운 얼굴과 붙임성 있는 말씨에 황제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잔뜩 힘을 준 얼굴 근육을 풀고 호탕하게 웃었다.

“어쩜 이렇게 예의가 바를까. 프라비체 공은 정말로 좋겠어.”

“폐하께서도 황녀 전하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 애는 귀여운 맛이 없어. 그에 비하면 공녀는 얼마나 귀여운지.”

마치 가면을 번갈아 끼우듯, 황제는 샬럿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투덜거리다가도 이블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느슨하게 웃었다.

황제의 숨길 수 없는 총애에 이블린은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귀엽기도 하지, 황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타라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가?”

“전에 말씀 주신 제안, 수락하려 합니다.”

“……뭐?”

황제가 숨을 들이켰다. 그 반응에 타라는 의아해하며 역으로 물었다.

“왜 그런 반응이십니까?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그렇네만……. 정말로 수락할 거라고?”

아침의 이블린과 똑같은 반응에 저도 모르게 타라는 피식 웃으며 이블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이블린이 황자 전하를 이토록 마음에 두고 있는데, 어미로서는 당연히 허락해 주어야지요.”

그 순간 이블린이 타라를 따라 반짝거리는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전에 말한 제안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정황상 자신과 율리시즈의 약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였다.

화악. 마치 조명이 켜진 듯 황제의 얼굴이 밝아지며 광대가 높이 솟아올랐다.

“그래,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네!”

황제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율리시즈가 어리둥절하게 자신을 보든 말든, 황제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신나서 주절거렸다.

“그럼 우선 무얼 해야 할까. 우선 약혼반지부터 알아봐야겠어.”

약혼반지? 그제서야 율리시즈는 저 이야기가 자신과 이블린의 약혼에 대한 것임을 깨닫고 황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 어마마마!”

“왜 그러지, 율리시즈?”

한창 들떠 있던 황제는 율리시즈가 찬물을 끼얹자 눈살을 찌푸렸다. 율리시즈는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 입을 움직여 물었다.

“제가 이블린과 약혼하나요?”

“그럼 너 말고 누가 하겠느냐? 설마 마음에 안 든다는 건…….”

황제의 표정이 서슬 퍼래지자 율리시즈는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율리시즈는 재빠르게 이블린의 눈치를 살폈다.

이블린과 약혼이라니, 좋으면 좋았지 싫을 리가.

황제 역시 흥 콧방귀를 뀌더니 율리시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타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됐다. 아, 프라비체 공.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애들끼리 놀게 두고 우리는 가서 이야기하지! 준비할 게 산더미야.”

“예, 폐하.”

타라는 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정하게 이블린과 눈을 맞추어 일렀다.

“이블린, 들었지? 전하랑 놀다 오렴. 대신 멀리 가면 안 된다.”

“응, 엄마!”

이블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율리시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혼자서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율리시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자, 율리시즈!”

“어, 어어?”

이블린이 달리기 시작하자 율리시즈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또 황제의 노여움을 맞을까 봐서였다.

하지만 황제는 자신이 혼자 뛰었을 때와는 다르게 인자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블린과 함께라 봐주시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블린과 함께라면 율리시즈는 그나마 황제에게 덜 미움 받을 수 있었다.

율리시즈는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이블린과 함께 달려 황궁을 빠져나갔다.

* * *

“율리시즈, 빨리 와! 내가 굉장한 걸 보여 줄 테니까!”

폭주 기관차처럼 정원을 달리는 이블린을 멈춘 건 율리시즈의 헥헥대는 소리였다.

“잠, 잠깐 이블린!”

“왜?”

이블린이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고 있는 율리시즈가 보였다. 이블린은 에휴,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에 양손을 척 얹고 투덜거렸다.

“뭐야, 고작 이거 뛴 거 가지고 힘들어?”

“나는 맨날 책상에 앉아 있잖아!”

“그런 것치고는 머리도 안 좋잖아.”

“윽.”

이블린의 인정사정없는 사실 적시 명예 훼손에 율리시즈는 크게 상처받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율리시즈는 누가 볼까 무서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속닥거리듯 소리쳤다.

“더 가면 안 돼. 거기로 가면 마탑이란 말이야!”

율리시즈가 이블린을 불러 세운 이유는 바로 그녀가 가려는 곳이 마탑이기 때문이었다.

황궁 내 마탑은 허가 받은 사람만이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아무리 황자라 해도 황제의 허가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블린 역시 걸음 했다가는 크게 혼날 것이다.

그런데도 이블린은 아주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냐?”

“어?”

“안 들키면 된다구! 난 몇 번이나 마탑에 갔었는데도 안 들켰는걸.”

히힛, 하고 이블린이 철없게 웃었다.

‘……그런가?’

어이가 없는 한편 율리시즈의 호기심은 착실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블린이 보여 준다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고, 마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했다. 다만 황제가 무섭기에 마탑 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율리시즈가 여전히 망설이자 이블린은 듬직하게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며 율리시즈를 꼬드겼다.

“뭘 무서워해? 들키더라도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졸랐다고 하면 폐하도 화내지 않으실 거야.”

“아무리 그래도…….”

황제는 이블린이 황궁에서 뛰는 걸 봐줄 정도로 그녀를 귀여워한다. 하지만 정말 마탑에 다녀온 것까지도 용서해 줄까?

고민은 짧았다.

“가자, 응?”

이블린이 눈을 울망이며 율리시즈의 팔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이블린보다 연상으로서, 그리고 이블린을 좋아하는 한 남자로서 율리시즈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겸사겸사 자신의 호기심도 풀고 말이다.

결국 율리시즈가 될 대로 돼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가자!”

“잘 생각했어.”

이블린이 말괄량이처럼 웃으며 다시 율리시즈의 손을 잡고 달렸다.

두 아이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빽빽하게 자리 잡은 나무 사이를 지났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숲길은 어느 순간 마법처럼 사라지고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우와…….”

넓게 핀 들꽃, 빛을 반짝이는 호수, 무엇보다 대단한 건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어야 끝이 보이는 고목나무를 보며 율리시즈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황궁에서 그에게 허락된 장소라고는 황태자궁, 아니면 황궁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블린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

“어때, 대단하지?”

“응……!”

“얼마 전에 샬럿 언니가 알려 준 장소야!”

“누님이?”

율리시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샬럿은 단 한 번도 제게 그런 적이 없었는데…….

언제나 그랬다. 샬럿이고 황제고, 진짜 막내아들인 자신에게는 매몰차고 엄하면서 이블린에게는 하염없이 관대해지고 다정해진다.

그래서인가, 만약 율리시즈 혼자서 저질렀다면 혼났을 행동들도 이블린과 함께 저질렀다면 그 둘도 유하게 넘어가 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율리시즈는 결심한 듯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물었다.

“저기, 이블린. 물어볼 게 있는데…….”

“응, 뭔데?”

“정말로 나 같은 거랑 약혼해도 괜찮겠어?”

소심한 물음에 이블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블린이 왜냐고 묻기도 전에, 율리시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못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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