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120화
“우리 집안의 유일한…… 뭐?”
율리시즈는 당장의 상황보다도 방금 귀에 꽂힌 말에 더 크게 분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에 샬럿은 침대에서 일어나지조차 않고 입을 가리며 풉 하고 비웃었다.
“어머, 설마 안 들렸니? 우리 집안의 유일한 수치라고, 수치.”
빠득. 율리시즈가 이를 갈며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지금 말 다 했…….”
“아, 아니면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라 이해하질 못한 거구나? 어쩜, 누나보다 먼저 근본을 꿰뚫다니. 웬일로 똑똑하기도 해라.”
깔깔, 율리시즈의 말을 끊어먹고 샬럿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혈질인 율리시즈가 이를 참아 넘길 리가 없었다. 율리시즈가 달려들어 샬럿의 목을 졸랐다.
“당장 죽여 주겠어!”
기세 좋게 팔을 뻗은 게 무안할 만큼, 샬럿은 마치 어깨 위에 붙은 실밥을 제거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쉽게 그의 손을 쳐 냈다.
놀란 율리시즈를 뒤로하고 샬럿은 율리시즈 너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그래…… 옛날에는 이렇게 너와 나, 그리고 어마마마까지.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던 때가 있었지.”
“……!”
“기억나니?”
율리시즈가 주춤했다.
그도 그럴 게, 당연히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기억할 수 없겠는가. 셋이서 사이가 좋았던 그 시간은 아주 짧았던 만큼 율리시즈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소중하고도 포근한 추억이었다.
“비록 네 아버지, 데미안 공이 저지른 부정을 알게 된 후에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랬다. 율리시즈는 제 친부의 부정 하나만으로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 취급을 받았다. 즉, 황궁의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설마…….’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누군가 들을까, 율리시즈는 패닉에 빠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샬럿은 살포시 그의 뺨에 손을 얹더니, 그가 자신을 쳐다보도록 만들고는 말했다.
“율리시즈. 지금이라도 어마마마에게 걸린 저주를 풀고 모든 것을 자백하렴.”
“……뭐?”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어.”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샬럿이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율리시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율리시즈 황자는 정말 샬럿 황녀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군.’
어려서부터 늘 뛰어난데다가 틀림없이 황제가 될 거라는 샬럿 황녀. 그에 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만 그녀의 발끝에 겨우 닿을 수 있었던 모자란 율리시즈 황자.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취급했다.
황제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샬럿은 달랐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신경 쓰지 마, 율리시즈.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녀는 율리시즈의 노력을 비웃지도 않았고, 오히려 장하다는 듯이 이렇게 자신을 북돋아 주었다.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율리시즈는 자신을 유일하게 다독여 주었던 샬럿이 이번에도 자신을 다독여 주었으면 하는 미약한 희망을 품고 물었다.
“당신은…… 모황께서 날 용서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겠지.”
샬럿이 즉답했다. 율리시즈가 상처받은 얼굴을 내보여도 샬럿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분명 나처럼 쫓아낼 거야. 그것도 나와는 다르게 유배가 아니라 폐위 처분을 받고 영원히 비참한 삶을 살아야겠지.”
“지금 나랑 장난해!?”
미친 건가? 마치 저주나 다름없는 소리에 율리시즈가 추억에서 깨어나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철퍽, 얼굴에 불쾌한 점액이 묻었는데도 샬럿은 덤덤했다. 아니, 표정만 덤덤했을 뿐 얼굴에 튄 침은 확실히 손등으로 훔쳐 율리시즈의 옷에 닦았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고 처음으로 화난 얼굴로 율리시즈를 꾸짖었다.
“그럼 그런 짓을 벌여 놓고도 계속 황자로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니?”
“당신들 때문이야! 당신들이 먼저 날 모욕하고 창피 줬잖아!”
“어마마마께서 네게 가혹했던 점은 인정해. 나 역시도 미웠겠지. 하지만 말이야, 율리시즈.”
샬럿이 반쯤 누워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율리시즈의 멱을 쥐었다.
쿵! 벽과 몸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공녀나 헤베 영애. 그 아이들이 네게 무언가 잘못이라도 했나?”
서슬 퍼렇게 날이 선 샬럿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순식간에 벽에 처박히게 된 율리시즈는 본능적으로 공포에 떨면서도 대답했다.
“그, 그거야……! 공녀는 나를, 내 기분을 거슬렀고 달리아는 나를 무시했……!”
“여자들에게 인기 없다고 그녀들을 탓하지 말랬잖니, 율리시즈.”
“누가 인기가 없어!”
율리시즈가 발끈하며 구구절절 변명했다.
“애초에 공녀가 문제였어! 처음에는 결혼하자며 귀찮게 굴더니, 갑자기 날 천하의 등신 취급이나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달리아와 내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고!”
율리시즈의 눈이 풀려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거다. 샬럿은 건조한 얼굴로 생각했다.
‘지금 상태로는 대화가 통하기는 어렵겠군.’
일단은 간단하게 기절만 시켜 놓을까.
어차피 샬럿은 흑마법으로 잠든 황제를 깨우지도 못할뿐더러 율리시즈도 흑마법사가 아니니 가만 놔둬 봐야 샬럿의 귀만 피곤했다.
잠깐 고민하던 샬럿이 율리시즈의 뒷덜미를 내치려던 그때였다.
“전부 공녀가 나쁜 거야. 모황께서 이런 꼴이 된 것도, 내가 이런 짓을 해야만 했던 이유도 전부 공녀 때문이라고! 공녀가 처음부터 내 인생에 방해만 놓지 않았더라면……!”
“…….”
그 한 마디에 샬럿의 인내심은 끊겨 버렸다.
샬럿은 여태까지 보였던 표정 중 제일 감정적인 얼굴로 율리시즈의 머리를 벽에 처박았다.
“윽!”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단단한 황궁 벽에 금이 갈 정도였다. 주륵, 하고 피가 흘러내리는 것 역시 느껴졌다.
당황스럽고 아팠지만 분노가 더 컸던 율리시즈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샬럿!”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공녀는 네 인생에 아무런 방해도 놓지 않았어. 오히려 네가 공녀의 인생을 방해했다면 모를까.”
“……뭐라고?”
거세기 짝이 없었던 율리시즈의 반항이 멈췄다. 샬럿의 말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진짜 동생이 아니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공녀를……!’
율리시즈가 이블린을 싫어하는 것은 정상이었다.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던 그녀를 볼 때마다 소외감이 들었을 텐데, 어떻게 싫어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샬럿의 말은 율리시즈가 생각하는 그 뜻이 아니었다.
“그거 아니, 율리시즈? 먼저 결혼하자고 한 건 너였단다.”
“……뭐?”
율리시즈의 동공이 커졌다. 어찌나 눈을 크게 뜨고 있는지 눈알이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샬럿은 그런 율리시즈를 안쓰럽게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었다.
“너희가 아주 어렸을 때 내게 그랬지. 둘이서 결혼할 거라고 말이야.”
하! 난 또 뭐라고. 율리시즈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샬럿을 비웃었다.
“언제적 이야기를! 분명 소꿉장난이겠지. 난 기억도 나지 않아. 아니, 애초에 난 성인이 되어서야 프라비체 공녀를 처음 봤어!”
“안됐지만 너네는 소꿉장난도 아니고 그때 처음 본 것도 아니란다.”
단호한 정정에 또다시 율리시즈의 눈이 커다래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샬럿은 마치 역사서를 읊듯 단조롭고 간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너희는 어려서부터 친구였고, 폐하와 프라비체 공의 앞에서 약혼 선언까지 하려 했었어. 정식으로 말이야.”
황제와 프라비체 공작 앞에서?
말도 안 된다. 율리시즈는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떠올려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아무리 어렸을 적 이야기라 해도 그 정도의 이벤트라면 분명 기억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율리시즈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성인이 되어서야 이블린 프라비체를 처음 보았노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샬럿이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데…….’
샬럿이 조금 많이 얄미운 건 사실이었으나, 그녀가 황제를 언급하며 거짓을 꾸며 낼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율리시즈는 기억의 공백에 혼란스러워졌다.
“하긴 기억 안 나겠구나. 기억을 잃었으니.”
마치 바랄 상대에게 바라야지, 하는 듯한 어투로 샬럿은 읊조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울화통이 치밀었는지 샬럿은 쾅! 하고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
바로 눈앞에서 벽에 금이 가자 율리시즈의 파란 눈에 또다시 해일이 몰아쳤다. 샬럿은 그와 똑같은 파란 눈으로 율리시즈를 죽일 듯 노려보며 물었다.
“하지만 사람 새끼라면 네가 그 어린 나이에, 너보다 어린아이를 죽이려 했다는 건 기억해야 하지 않겠니?”
“무슨 헛소리를…….”
“15년 전이었어.”
마치 아이를 재우기 전 옛날 동화를 들려주듯, 샬럿은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공녀를 죽일 뻔했다가, 역으로 죽었던 게.”
* * *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이었다.
수도 르샹트 내에서 가장 칙칙하고 음산하기로는 따라갈 자가 없었던 프라비체 저택에는 언제부턴가 꽃이 활짝 폈고 나비가 날아왔다.
마치 차가운 금속으로 지어진 것 같은 성과도 같은 저택 안에서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엄마, 엄마! 빨리! 샬럿 언니랑 율리시즈가 날 기다린단 말이야!”
현관 앞에서 어린 이블린은 타라의 옷자락을 당기며 졸랐다. 막 모피를 걸치고 있던 타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도 황녀 황자와 노는 것이 재밌니?”
“샬럿 언니는 멋있어서 좋고, 율리시즈는 좀 덜떨어졌어도 내…… 내 친구잖아.”
보기 드물게 이블린이 부끄러워하며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꼬옥 붙잡았다. 어린아이다운 귀여운 모습에 타라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자세를 낮춰 이블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딸은 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구나. 그 황자를 좋아할 수 있다니 말이야.”
“조, 좋아하다니! 그런 거 아니거든!?”
이블린이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 태도를 유지하기에는 다음에 이어진 타라의 말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황자와 약혼하게 해 주마.”
“정말로!?”
“그럼.”
“진짜 진짜, 거짓말 아니고 정말로!?”
“당연하지. 내가 언제 네게 거짓말하는 걸 봤니?”
이블린의 얼굴이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해졌다.
사실 황궁과 교류하는 것은 프라비체의 명성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타라가 매번 입궁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이블린 때문이었다.
옛날에 이블린이 황궁 구경을 하고 싶대서 데려간 적이 있었다. 이블린은 다른 아이에 비해 똑똑하고 유쾌한 샬럿 황녀를 잘 따랐으며, 어리버리한 율리시즈는 놀리는 맛이 있는지 자주 놀며 친해졌다.
언젠가 놀이 친구를 만들어 줄 생각이기도 했기에, 타라는 입궁해야 할 때마다 이블린을 데리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매번 교류했던 걸 넘어서 약혼을 할지도 모른다니. 선대가 알면 기절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이블린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타라는 빙긋 웃으며 제 하나뿐인 보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준비 끝났으니 가자꾸나.”
“응, 엄마!”
그랬기에 오늘도, 타라는 이블린이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입궁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