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119화
“케헥, 컥.”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가 사라지자 샬럿은 생리적인 기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럿은 깨진 다구와 텅 빈 방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법은 잘 걸렸나 보네.”
저주에 걸리고도 샬럿이 여유로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미 이블린이 자신의 몸에 마법을 걸어 놓았기 때문이다.
샬럿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를 파그라시움으로 강제 송환하는 마법을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마법 실력 하나는 뛰어나다니까.”
샬럿은 옛 기억을 더듬으며 새삼 이블린을 칭찬했다. 막상 이블린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이블린은 질색하며 친한 척 하지 말라고 할 테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황궁은 정말 오랜만이네.”
저번에는 예식장만, 오늘은 황태자비궁으로만 바로 왔기 때문에 다른 곳은 둘러 보지 못했다.
그래도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기에 샬럿은 오랜만에 찾은 집이 반가웠다.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샬럿은 본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마마마는 잘 쉬고 계시려나.”
샬럿에게 황제가 있는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의 황태자비궁은 예전에 샬럿이 쓰던 황녀궁이었다. 샬럿은 아주 익숙하게 방을 나서서는 어렸을 때 자주 드나들던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본궁에 다다랐다.
본궁의 가장 높은 곳, 황제가 잠들어 있는 침소에는 역시나 기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샬럿을 발견한 기사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놀라 소리쳤다.
“샤, 샬럿 황녀 전하?”
“안녕.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면 율리시즈의 사람들이구나? 좀 지나갈게?”
마치 샬럿이 궁의 주인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에 기사들은 하마터면 그녀를 황제의 침소에 들여보낼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창으로 문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황녀 전하라 해도 이곳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건방진 기사들의 태도에 샬럿의 심기는 금방 상하고 말았다. 샬럿은 웃는 얼굴로 기사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들이 쥔 창을 하나 빼앗았다.
“……!?”
놀라운 힘이었다. 명색이 율리시즈에게 선택되어 황제의 침소를 지키던 기사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퍽! 이해하기도 전에 샬럿에게 뒷덜미를 맞았기 때문이다.
“좀 자고 있으렴.”
털썩. 기사들이 맥없이 쓰러졌고, 샬럿은 황제의 침소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었다.
익숙한 거실을 지나 안쪽 방으로 들어가니, 약초가 타들어가는 불쾌한 냄새와 함께 커튼 뒤로 시체처럼 자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샬럿은 황제를 안쓰럽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 강녕하셨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긴, 흑마법에 말라 비틀어져 가는 반송장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마는.
샬럿은 황제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어렸을 땐 참 어마마마가 커다래 보였는데, 지금은 슬플 정도로 초라해지셨네요. 그러게 왜 들개를 들이셔서는.”
“…….”
“그러게 왜 제가 율리시즈를 죽이려 할 때 말리셨어요.”
“…….”
아무리 말을 걸어도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샬럿 역시 황제의 대답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냥 황제의 어리석음이 안쓰러워 하소연해 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녀간의 오붓한 시간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쾅!
“샬럿!”
지나가던 기사들에게 보고라도 받았는지 율리시즈가 헐레벌떡 황제의 침소에 뛰어들었다.
씩씩,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자신을 이글이글 노려보는 율리시즈를 향해 샬럿은 씨익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낸 배은망덕한 동생아. 오랜만이야?”
* * *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한편 파그라시움의 지하실에서는 달리아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마치 죄인을 취조하는 것처럼 달리아를 포박해 꿇려놓고 여유롭게 앉아 대답했다.
“무슨 짓을 하긴. 네가 나한테 빼앗아간 걸 돌려받으려 그러지.”
나는 가볍게 콧방귀를 뀐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 파그라시움의 흑마법팀은 기적을 일으켰다. 내 힘을 회수하는 마법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그래서 나는 달리아로부터 내 힘만 회수하려 했는데…….
“어서 죽여.”
“……뭐?”
“어서 죽이라고.”
달리아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여 자신의 목을 내보였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사람을 죽여야 돼? 아무리 그래도 손에 피 묻히긴 싫다구!’
혹시 일부러 자신을 죽이게 해 날 살인죄로 감방에 처넣을 생각인가 싶었지만, 달리아는 내 말보다 한발 빨리 내 오해를 정정해 주었다.
“어차피 난 샬럿 황녀를 죽이는 데 실패하면 죽을 생각이었어. 그러니 빨리 죽여 줘.”
“…….”
나는 침묵했다. 그러다가 문득 달리아의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가지처럼 변한 몸, 발그레했던 뺨은 푹 패여 있었고 눈 밑은 어두웠다.
흑마법의 부작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했다. 유다를 비롯한 파그라시움의 흑마법사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나 하며 물었다.
“율리시즈가 죽으라 했니?”
“……당신이 알 거 없잖아.”
달리아는 대답을 회피했지만 비슷한 압박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공녀인 나한테도 함부로 손을 올리려 드는데 달리아한테는 얼마나 더 심하게 대할까.
둘의 신뢰 관계는 이미 깨졌다. 그러니 율리시즈가 쓸모가 없어진 달리아를 살려 줄 리는 만무했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달리아의 몸을 구속한 밧줄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달리아가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내게 사납게 물었다.
“뭐하는 짓이야?”
“지금 너 죽였다가는 내가 저주 받을 것 같아서 그런다, 왜. 불만 있니?”
“날 동정하는 거야?”
달리아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안광이 사라진 노란 눈은 눈물이 차오르며 그렁그렁거리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동정하지 마!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하니까! 빨리 날 죽이란 말이야!”
“윽……!”
달리아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앙상하게 마른 주제에 힘은 어찌나 센지 순간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그냥 날 빨리 죽여 줘. 그게 당신이 원하는 일이잖아! 날 죽이고 힘을 되찾으려고 날 여기로 데려온 거잖아!”
“싫어, 내가 왜? 내가 왜 내 손으로 네 목숨을 끊어야 되는데! 왜 엄한 사람을 범죄자 만들지 못해서 난린데? 죽을 용기가 없어서 남의 손을 빌려 자살이나 하려는 주제에!”
“……!”
그러자 달리아가 머리를 얻어맞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틈을 타 달리아의 손을 뿌리쳤다. 더 붙잡혀 줬다간 어깨뼈가 박살날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여라 또 잡힐까, 나는 달리아를 조마조마하게 경계하며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무색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혼자 행복할 수 있는 거야?”
달리아는 주먹을 부들거리며 내게 질문만 할 뿐, 아까처럼 날 위협하지는 않았다.
질문이 너무 황당해 대답조차 못 하고 있으니 달리아는 원망에 사로잡힌 눈으로 날 노려보며 재차 물었다.
“나는 행복하면 안 돼? 왜 맨날 날 방해해? 당신은 항상 우위에 서서 날 깔보고 비웃는 거야?”
이게 진짜? 기억력 무슨 일이야?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버럭 소리 질렀다.
“야! 내가 처음부터 그랬잖아! 율리시즈 놈 따윈 줘도 안 가지니까 네가 가져서 지지고 볶고 행복하게 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그런데 네가 있는 그대로 안 받아들이고 내 힘까지 훔쳐다 이 사달 낸 거잖아!”
“하, 하지만!”
“그리고 뭐? 비웃어? 그러는 너도 율리시즈 놈 옆에 끼고 우월감에 도취되어서 나 비웃었잖아, 안 그래!?”
이건 이블린의 기억이었다.
맞는 말의 향연에 달리아는 이를 악물더니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건 당신이 먼저 나를…….”
솔직히 달리아를 먼저 깔보던 건 이블린이었다.
이블린이 달리아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환경이 달리아를 몰아붙인 결과, 달리아는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처음엔 내가 잘못했지. 미안해. 하지만 너,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니?”
“뭐, 뭐라구?”
“율리시즈가 조종하는 대로 살고 싶냔 말이야.”
“……!”
달리아는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라면 압박당하고 살길 좋아할 수가 없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달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약 네가 원한다면 도와줄게.”
“도와, 준다고?”
달리아가 환청이라도 들은 듯 내 말을 따라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아하니 율리시즈 놈도 헤베 백작도,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게.”
사실 여기저기서 착취 당하는 달리아를 보면 김금희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달리아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어떡할래?”
“…….”
달리아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역시 내 도움 받기는 자존심이 상하려나, 라고 손을 거두려던 순간이었다.
“……공녀님.”
그 순간, 달리아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불렀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살고 싶어요.”
“…….”
“이대로, 지금처럼 살기 싫어요. 사람을 해치기 싫어요……!”
그리고 폭우 같은 눈물을 쏟아 내며 무너져 내렸다. 달리아는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양손에 축축한 얼굴을 파묻고 속죄하듯 흐느꼈다.
“어떤 죗값이든 달게 받을 테니까, 제발 아버님한테서, 율리시즈한테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나는 툭 치면 바스라질 것 같은 달리아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달리아가 벌인 짓들은 그냥 용서 받기 힘들어.’
황제를 해치려 한 율리시즈에게 가담했으며, 예식장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샬럿을 죽이려고 계획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과연 달리아를 욕할 처지나 될까? 악당 프라비체 일가의 딸이 되기로 한 나는 달리아를 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달리아를 그리 만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랬기에 나는 달리아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
“……?”
“일단 내 힘부터 돌려줘야 도와주든 말든 할 거 아냐.”
“아…….”
달리아가 민망하게 얼굴을 붉혔다.
어쩐지 처음으로, 나와 달리아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지 않고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기분이 들어 묘한 느낌이었다.
달리아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 채 내게 물었다.
“제가 공녀님께 힘을 돌려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잡아.”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달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달리아는 내가 내민 손을 망설이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내 손을 꽈악 붙잡았다.
아까처럼 나를 파괴할 목적으로 꽈악 잡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게 도움을 바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내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지며 이블린의 기억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율리시즈, 빨리 와! 내가 굉장한 걸 보여 줄 테니까!’
그리고 그 기억의 첫 시작은 소름 끼치게도, 어린 율리시즈와 함께 뛰놀던 이블린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