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118화
사흘 후. 샬럿 황녀가 달리아의 초대로 입궁하는 날이 되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율리시즈는 기대에 부푼 얼굴로 달리아를 찾았다.
“달리아!”
“아, 오셨어요. 전하.”
“……달리아?”
신나는 얼굴로 달리아를 찾아온 게 무색하게끔 막상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시커먼 눈 밑, 가뭄이 찾아온 입술, 푸석푸석한 피부, 푹 꺼진 눈에 움푹 패인 볼과 해골처럼 마른 몸까지.
고작 며칠 사이에 달리아의 얼굴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기 때문이다.
율리시즈는 두 눈을 비비며 달리아의 존재를 확인했다.
“달리아, 정말로 그대가 맞나……?”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그보다 티 타임 준비 때문에 오신 건가요?”
달리아가 보기 드물게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최근의 달리아는 율리시즈와 대화할 때면 소리를 지르고, 울고, 겁먹었었다.
다시 그의 말을 잘 듣던 예전의 달리아로 돌아왔음에도 율리시즈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마, 맞아. 준비는 잘되었나?”
“물론이죠.”
달리아가 생긋 웃었다. 늘 보던 미소인데 마치 살아 있는 시체처럼 말라비틀어져서 그런가, 뒷덜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했다.
정작 달리아는 율리시즈가 자신을 보고도 무엇을 느끼는지 관심 따위 두지 않았다.
달리아가 온화한 얼굴로 율리시즈에게 말했다.
“그보다 전하께서는 폐하의 곁을 지키셔야죠. 또 저번처럼 괜한 훼방이 들어와 폐하의 침소에까지 숨어들면 안 되니까요.”
“그, 그렇지.”
“그럼 좀 있다 뵈어요, 전하.”
달리아는 쫓아내듯 율리시즈를 내보내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율리시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문턱이 마치 자신과 달리아를 갈라놓는 강처럼 보였다.
‘……이대로 달리아를 두고 가도 되는 건가?’
걱정은 찰나였다. 달리아는 독한 여자니까.
무엇보다 점점 흑마법에 잠식되어 가는 달리아의 모습에 생리적인 불쾌함과 공포를 느낀 율리시즈는 그녀에게 괜찮냐는 한 마디조차 건네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는 율리시즈의 뒷모습을 보며 달리아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고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달리아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샬럿을 죽이는 데 실패한다면 자신이 스스로 숨을 끊기로 말이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달리아는 왜 자신이 죽어야 하냐며 억울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았다.
‘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블린 프라비체처럼 될 수 없어.’
신분은 상승했지만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고, 흑마법을 배워 보다 강한 힘을 손에 넣었어도 이건 자신을 연소하는 일일 뿐이다.
달리아는 저벅저벅, 거울 앞으로 걸어가 거울 속 삐쩍 마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뺨을 만지더니 실소했다.
‘꼴 좀 봐.’
누가 이런 사람을 사랑하겠는가.
올곧은 척 하는 성격도, 아름다운 용모도. 율리시즈가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은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믿었던 율리시즈에게조차 사랑 받지 못하고, 자신 역시 더 이상 그에게 사랑받을 자신이 없으니 지금 죽는다 해도 삶에 미련은 없었다.
“마지막 티타임이 될지도 모르는데, 차 정도는 내가 좋아하는 걸 준비해도 되겠지…….”
달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수 찻잎을 고르러 갔다.
* * *
“안녕, 황태자비.”
샬럿은 티 타임 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했다. 아직 황궁에 복귀하지도 않았으면서 늦은 데다 미안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지만 달리아는 화나지 않았다.
달리아는 마치 인형처럼 웃으며 샬럿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샬럿 전하. 오시는 길 불편하지는 않으셨나요?”
“프라비체 사람들이 잘 대해 줘서 편히 왔지, 뭐.”
샬럿은 일부러 달리아를 도발했다. 그녀가 프라비체 일가, 특히 이블린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건 이미 샬럿에게 입수된 정보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달리아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얼굴로 샬럿에게 자리를 권했다.
“다행이네요. 자, 앉을까요?”
천하의 샬럿이라도 눈썹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샬럿은 웃는 얼굴 그대로 달리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 봐라?’
무슨 속셈이지? 라파엘이 백이면 백, 달리아는 이블린을 들먹이면 쉽게 흥분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샬럿은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나왔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구석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히 존재감을 죽이고 있던 시녀들이 물러가고, 방 안에는 샬럿과 달리아 단둘만이 남았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찻잔을 앞에 두고 달리아가 말했다.
“자, 차가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샬럿은 웃는 낯으로 시선을 내렸다. 달리아가 준비한 건 투명한 티팟 안에서 화려하게 핀 꽃차였다.
“향이 좋네. 무슨 꽃이야?”
“목련꽃차예요.”
“목련꽃이 아닌 것 같은데?”
샬럿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자 달리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샬럿을 놀리듯 물었다.
“의심되시나 봐요? 제가 전하를 독살할까 봐.”
샬럿의 기분이 나빠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샬럿 역시 웃는 얼굴 그대로 시선을 내리깔며 달리아를 압박했다.
“건방져라. 감히 날 놀리는 거니?”
“설마요. 앞으로 같은 궁에서 지낼 분과 적대적으로 지낼 생각은 없어요.”
샬럿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달리아가 거짓말쟁이 황태자비로 불리게 된 이유는 샬럿이 그녀의 주장을 뒤집어 버렸기 때문이다. 달리아가 샬럿을 싫어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걸 잘 알고 있다는 듯 샬럿이 내보이는 뾰족한 태도에도 상처 하나 받지 않은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어쨌든 전하가 저를 싫어하시는 건 전부 저 때문이겠죠. 저와 전하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건 제 거짓말 때문이니까요.”
“어머. 알긴 아는구나?”
“네. 그래서 제가 먼저 신뢰를 보이려구요.”
“……?!”
샬럿이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달리아는 망설임 없이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뜨거운 차를 꿀꺽꿀꺽 삼켰다.
“하아.”
이내 다 마셨는지 달리아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달칵, 깨끗하게 비워진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찌꺼기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찻잔을 샬럿에게 자랑스레 내보이며 으스댔다.
“어때요. 멀쩡하죠?”
“…….”
샬럿은 생각했다. 달리아가 몰릴 대로 몰려 제대로 미쳤구나 하고 말이다.
“걱정 마세요.”
샬럿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겠다는 듯 달리아는 여유롭게 샬럿의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심하고 드세요. 설령 제가 샬럿 전하를 해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독살 따위로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샬럿은 침묵했다. 사실 달리아가 독을 쓴다 해도 상관없었다. 샬럿은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는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야 잘 마실게.”
샬럿은 달리아와 마찬가지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단숨에 마셔 삼켰다.
꿀꺽, 꿀꺽. 달칵. 황족들의 티 타임답지 않게 서로 한 번씩 단숨에 찻잔을 비운 둘은 마주 웃었다.
“맛있네.”
“다행이에요.”
교과서 같은 대화가 오간 후, 잠시간의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달리아였다.
“샬럿 전하께서는 역시 일찍부터 황궁에서 멀리 떨어져 계셔서 그런가, 경계심이 없으시네요.”
“내가?”
“그렇지 않으면 제가 흑마법사인 걸 알면서도 제가 준 차를 그렇게 드실 수가 없잖아요.”
먼저 신뢰를 보여 주겠다면서 차를 마신 건 달리아였다.
달리아는 보다시피 아주 멀쩡했고, 샬럿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마신 거다.
하지만 달리아가 말한 샬럿의 오만이란 바로 그 점이었다.
“전하께서 마신 차에 저주를 걸었어요.”
“저주?”
“네. 당신을 서서히 말라비틀어지게 할 거예요.”
그럼에도 샬럿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 정도로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것처럼 웃고만 있는 모습에 당황한 건 달리아였다.
샬럿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달리아는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내보이며 샬럿에게 물었다.
“죽는 게 무섭지 않나요?”
샬럿은 달리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역으로 물었다.
“율리시즈가 시키디?”
“……!”
“불쌍한 것. 네가 우리 이쁜이를 건드린 게 괘씸하긴 한데, 보고 있자니 너무 가여워서 안 되겠구나.”
샬럿이 달리아를 비웃었다.
지금 누가 우위에 있는 건지 모르는 건가? 달리아는 기분이 나빠져 샬럿을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샬럿은 아랑곳 않고 달리아에게 설교를 늘어놓았다.
“황태자비, 넌 약점을 잡힌 거야. 율리시즈는 네가 흑마법으로 황족인 나를 죽이려 들었다는 증거를 만들어서 손에 쥘 테지. 넌 네 목줄을 쥔 그 한심한 것과 평생을 함께 살고 싶니, 정말?”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그게 정말 네 선택이라고?”
푸흡, 샬럿이 조소를 터뜨렸다.
“너는 분명 언젠가 후회하게 될걸. 당장 내일이라도 말이야.”
빠직, 값싼 동정이 섞인 말에 달리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달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험상궂은 얼굴로 돌변해 소리쳤다.
“당신이 뭘 알아!”
우당탕, 쨍그랑!
달리아가 탁자를 타고 넘어와 샬럿의 목을 졸랐다. 시체 같은 몰골에 가느다란 손목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샬럿의 목과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창백해지며 이내 시퍼레졌다.
“날 때부터 황족이었던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내 인생에 훈계질이나 할 자격이 있어!?”
샬럿은 무슨 생각인지 반항 하나 하지 않았고 그게 달리아의 심기를 건드렸다.
샬럿의 목을 조르는 달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샬럿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내 샬럿의 눈동자가 완전히 뒤집혀 흰자가 보이게 되었을 때였다.
스멀스멀, 검은 연기가 샬럿과 달리아를 감쌌다.
“……!?”
흑마법이었다. 피부에 닿은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달리아가 황급히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달리아를 집어삼킨 안개는 그녀를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숨 막혀……!’
남의 목을 조를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고통이 달리아를 잠식했다.
1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나고, 숨통을 죄이는 안개가 사라지자마자 달리아는 샬럿을 추궁하기 위해 고개를 바로 들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여, 여기는…….”
컴컴한 지하실, 사방을 가득 메운 유리 장식장. 달리아의 방에 있는 그 벽과 똑같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샬럿을 추궁하고 싶어도 이곳에는 달리아 혼자였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한 달리아라도 이런 돌발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달리아가 불안에 떨던 그때였다.
또각. 익숙하고 서늘한 굽 소리가 들렸다. 달리아가 설마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신은…….”
“안녕. 악당 소굴에 어서 와.”
이블린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파그라시움 지하실에 발을 들인 달리아를 환대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