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117화
율리시즈로부터 샬럿을 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 후, 달리아는 은밀히 오베론을 불렀다.
오베론은 달이 가장 높은 곳에 떠오르는 야심한 시각에 황태자비궁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비 전하.”
“오셨습니까, 마탑주.”
달리아가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와 그늘진 목소리로 오베론을 맞이했다. 달빛을 받은 달리아의 얼굴을 본 오베론은 살짝 놀랐다. 평소의 달리아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예전보다 볼이 조금 패였으며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흑마법을 남발하는 마법사의 얼굴이 저런 것은 당연하지만 오베론의 예상보다 속도가 빨랐다. 오베론은 예의상 그녀의 안부를 물으며 원인을 찾기로 했다.
“낯빛이 많이 안 좋으시군요. 아무래도 예식장 때의 일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만.”
“……그건 마탑주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달리아가 홱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어쭈. 오베론의 목에 핏대가 작게 섰다 가라앉았다.
“…….”
같은 마탑에서 일할 때는 자신에게 허리를 굽혔던 존재가 저렇게 오만해지다니. 역시 헤베 백작가의 핏줄답다.
순간 경멸 어린 표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아직 달리아와 갈등을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베론은 표정을 정돈하고 말끔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저를 부르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 있어 불렀어요.”
“예, 하명하십시오.”
달리아는 비장한 얼굴을 하며 오베론을 바라보았다.
오베론은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점점 검어지는 눈 밑과 사라지는 안광, 굳어가는 입꼬리를 한 자들이 원하는 건 딱 하나였으니까.
오베론의 예상을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달리아가 요구했다.
“마탑주께서 갖고 있는 나비, 전부 제게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값은 얼마든지 치르겠습니다.”
여태까지 오베론은 달리아에게 무상으로 나비를 제공했다. 아무 이유 없이 재투성이 소녀를 도와주는 요정 대모처럼 말이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달리아는 그가 순순히 나비를 넘겨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차디찬 거절이었다.
“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힘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
예상치 못한 말에 달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율리시즈와 함께하기 위해, 달리아는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도대체 뭘 줘야, 오베론이 힘을 넘겨주지?
달리아가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오베론을 회유하려던 그때였다. 오베론이 인자한 얼굴로 돌아와 부드럽게 물었다.
“듣자 하니 샬럿 황녀 전하를 초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를 해할 때 쓸 힘이 필요하신 겁니까?”
“……마, 맞아요.”
“그렇다면 원래 있는 힘으로도 충분하실 터인데.”
달리아는 대답을 피했다.
오베론의 말이 맞았다.
달리아가 지금 갖고 있는 이블린의 이 힘은 일부만으로도 호화로운 황궁의 건물 한 채를 통째로 가라앉힐 정도였다.
마법을 못 쓰는 샬럿 황녀 하나 해치우는 데에는 차고도 남는 힘이었다.
하지만 이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은 샬럿 황녀는 물론이고, 이블린도 치워 버려야만 했으니까. 좀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달리아는 짧다 못해 울퉁불퉁 지저분해진 자신의 손톱을 힐끗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실패는 한 번이면 족해요.”
잠시 방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역시 이 정도 호소하는 걸로는 되지 않는 건가? 무릎이라도 꿇기 위해 달리아가 눈을 질끈 감던 그때였다.
“좋습니다.”
“……네?”
“넘겨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통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달리아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사이 오베론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텅 비었던 방 안의 유리벽에는 나비들이 가득 들어찼다.
어째서 갑자기 마음을 바꿨냐고 물어볼 틈 따위는 없었다.
달리아는 나비들이 흩뿌리는 반짝거리는 광경에 홀려 버렸다. 만약 마녀가 있다면 오베론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문득 달리아는 궁금해졌다.
“마탑주.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당신은, 어째서 흑마법을 배웠나요?”
사적인 질문에 오베론은 눈썹을 작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달리아는 그게 진심으로 궁금했다.
오베론은 잠시 회상에 잠긴 듯 느릿하게 나비를 바라보더니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별다를 게 있겠습니까. 살기 위해서죠.”
“그런, 가요.”
“이 제국의 모든 흑마법사들은 모두 그럴 겁니다. 날 때부터 흑마법사였던 이블린 프라비체 공녀를 제외하고는요.”
움찔. 달리아의 어깨가 떨렸다.
남은 그 힘을 얻기 위해 무릎까지 꿇을 각오를 해야 하고, 황태자비의 자리를 잡기 위해 살인까지 해야 할 지경에 내몰렸는데 이블린은 아무런 노력 없이 힘도 지위도 다 거머쥐고 태어났다.
달리아가 피식 웃으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 여자는 태생부터 또 그렇게 선택받은 거군요.”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상황이 지긋지긋하다 못해 허탈해졌다.
하지만 그녀를 백날 부러워한다 해도 자신이 그녀의 것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리아는 표정을 가다듬고 오베론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무튼 나비 고마워요, 마탑주. 당신에게 입은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오베론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꿀꺽 삼키며 웃었다.
이용 당해 주어 감사한 쪽은 오히려 이쪽인 것을요.
* * *
“황태자비한테 초대장이 왔어.”
다음 날 아침. 라파엘의 저택 만찬장에서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샬럿은 편지 봉투를 팔랑이며 투덜거렸다.
“황궁에 복귀하기 전에 잠깐 자기랑 친목을 다지자네. 아, 정말. 가기 싫은데 가야겠지? 그래야 어마마마의 상태라도 좀 볼 수 있을 테니까.”
턱을 괴며 납득하는 듯싶던 샬럿은 이내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머리를 거칠게 긁더니 이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내게 제안했다.
“그래, 이쁜이도 같이 가자.”
“…….”
나와 라파엘은 단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샬럿 덕에 오디오가 빌 틈이 없다.
우리는 샬럿의 질문을 무시하고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샬럿이 지금 이 자리에, 그것도 상석에 앉아 있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라파엘도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막힌 말문을 뚫고 내뱉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응?”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샬럿의 의뭉스러운 얼굴에 나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아니, 당신이 머물 저택 빌려줬잖아! 왜 아직도 라파엘네에 있냔 말이야!”
예식장 소동과 더불어 대귀족 회의에서까지 우리 프라비체 일가가 샬럿 황녀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고, 나는 구색은 갖추자며 그녀에게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라파엘의 저택에 있어?
내가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씩씩 성을 내니 샬럿이 앙큼하게 웃었다.
“어머? 이쁜아, 너 지금 나 질투해? 질투 안 해도 돼.”
“안 하게 생겼어? 내 남자 집에 외간 여자가 들어앉아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그런 끔찍한! 외간 여자 축에도 못 듭니다, 샬럿 황녀는!”
그 순간 라파엘이 마치 토할 것 같은 얼굴로 낯빛을 시퍼렇게 물들이며 외쳤다.
큰 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라파엘이 다급히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큰 소리를 내려던 게 아니라…….”
‘저 반응을 보니까 안심이 되긴 하는데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솔직히 샬럿은 나와 견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물론 또라이인 만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지만 저렇게 학을 떼고 반응할 일이야?
당황하는 나나 라파엘과는 다르게 샬럿은 마치 가십을 들은 이웃집 아줌마처럼 눈꼬리를 휘며 라파엘을 놀렸다.
“어머. 너희 역시 사귀는구나? 라파엘 요거 요거, 제법이잖아? 왠지 아침부터 이쁜이가 있다 했더니 자고 갔구나.”
“아, 괜히 라파엘한테 친한 척 말고!”
“맞습니다, 친한 척 마십시오.”
나와 라파엘은 쿵짝을 맞춰 차례대로 샬럿에게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샬럿은 과장스럽게 흑흑거리며 냅킨으로 눈가를 콕콕 찍었다.
“세상에, 여기에도 내 편이 없다니. 이렇게 슬플 수가.”
슬픈 척을 하려면 좀 그 웃는 얼굴이라도 좀 어떻게 하든가. 나는 그녀의 형편없는 연기실력에 질색하며 받아쳤다.
“처음부터 당신 편이었던 적 없었거든.”
“흑흑. 동생 자식들 키워 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진짜라니까?”
“누가 네 동생이야?”
나는 간과 쓸개가 없는 오빠들은 둔 적 있어도 저런 언니는 둔 적이 없다. 경계하듯 으르릉거렸지만 샬럿의 눈에는 고양이가 하악질하는 정도로만 보였는지 귀엽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싸움이 일어날까 봐서인지, 아니면 샬럿의 우는 연기가 두 눈을 뜨고도 못 봐 줄 정도였는지 라파엘이 표정을 구기며 샬럿에게 축객령 아닌 축객령을 내렸다.
“우는 소리는 그쯤 하시고, 바쁘지 않으십니까? 황태자비의 초대에 응할 준비를 해야 할 텐데요.”
“어차피 며칠 뒤인데 시간 널널하잖아.”
“아, 커플 방해하지 말고 그냥 나가라니까 그러네.”
라파엘의 고운 말은 아무래도 샬럿에게 와닿는 것 같지 않아 나는 손수 번역해 주었다.
하지만 역시 샬럿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나갈 생각이 아예 없는지 깔끔하게 비운 메인 접시를 한 접시 더 요청하더니 볼멘소리를 해 댔다.
“그것보다 말이야. 라파엘, 이쁜아.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서 거기 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율리시즈가 날 죽이려 할 텐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율리시즈 전하 따위는 그냥 이기시지 않습니까.”
“황태자비도 날 죽이려 들걸? 내가 아무리 잘나도 흑마법사까지는 못 이겨.”
“그럼 유다를 동행시켜 드리죠.”
“걔는 너무 음침해서 싫어. 나는 발랄한 애가 좋더라.”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의 싸움이었다.
율리시즈 놈이 꼴도 보기 싫어서 샬럿과 손을 잡긴 했지만 과연 저 사람이 황제가 되어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샬럿과 눈이 마주쳤다.
“이쁜아, 언니랑 같이 가자.”
“뭐?”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었다.
내가 왜 같이 가야 해? 물론 언젠가 달리아를 조지러 갈 거긴 하지만, 괜히 샬럿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느낌이었다.
샬럿은 리필 요청한 메인 디시를 태연하게 입안에 넣으며 마치 소풍이나 가자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데리고 다니기 딱 좋으니까 그렇지. 언니는 예쁜 걸 좋아한단다.”
“아, 예쁜 건 드럽게 밝혀 가지고 진짜.”
예쁘다는 말은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손해 보기는 죽어도 싫은 이블린 프라비체였다.
나는 칭찬만 날름 받아먹고 쌈박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싫어. 혼자 가.”
벌써 몇 번째 거절인데 샬럿은 얼굴 하나 구기지 않고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가만 보면 샬럿이 화내거나 무표정인 때를 본 적이 없다. 감정이 고장난 것처럼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니 께름칙하네. 저게 황제한테 정신병자 취급 당하고 쫓겨난 이유인가?’
매번 화만 내는 사람보다 매번 싱글벙글 웃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을 생각해 낸 사람의 지혜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샬럿이 나를 포크로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재판 때 언니가 도와준 거, 혹시 까먹었니? 이쁜아.”
“…….”
솔직히 방금 쫄았다. 내가 살면서 타라와 황제 말고는 무서워한 적이 없는데, 방금 샬럿은 웃는 얼굴 하나로 나를 쫄게 만들었다.
“우리 이쁜이가 언니한테 입은 은혜를 또 까먹으면 언니는 정말 슬퍼서 미쳐 버릴 것만 같은데.”
샬럿이 과장스럽게 흑흑 우는 척 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샬럿이 나보다 지위가 아래거나 황위와는 동떨어진 황족이라면 아무리 무서운 인간이라 해도 모르쇠 일관했을 텐데, 하필이면 율리시즈를 내쫓고 황위에 앉을 사람이었다.
뭣보다 미쳐 버리겠다는 말이 제일 무섭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초대받지도 않은 황궁에 가겠는가? 그것도 황제가 부재중인데 말이다.
나는 고민 끝에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차라리 말이야…….”
내 의견을 들은 라파엘과 샬럿의 표정이 미묘해지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역시, 프라비체답게 살아서 손해 볼 일은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