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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16)화 (116/154)

116화 - 116화

‘망할, 내가 그런 말을 했었지!’

이블린은 뒤늦게 자신이 그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신없이 내뱉은 말이어서 그만 잊고 있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칠 듯이 빠르게 뛰었다.

‘어떡하지? 부정해?’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블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런 걸로 라파엘한테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아.’

이블린은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야. 널 좋아해.”

“…….”

라파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블린은 그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당장이라도 좋아서 웃을 줄 알았는데?’

표정만 보면 침울해 보였다. 왜지? 이블린의 마음에 작은 불안이 싹튼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저는…… 공녀님께는 한참 부족한 사람입니다.”

“뭐?”

이블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라파엘이 제 고백을 거절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의 손이 제게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블린은 허둥지둥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소리치듯 물었다.

“왜, 왜!? 너도 나 좋아하잖아! 설마 그사이에 내가 싫어진 건 아닐 거 아냐!”

“예. 제가 공녀님을 싫어하게 된다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죠. 하지만…….”

라파엘이 슬픈 얼굴로 말끝을 흐리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제가, 왜 좋으신 겁니까?”

출생부터가 사랑 받기 그른 인간이 바로 나예요, 이블린.

그가 입을 열 때였다. 그보다 이블린이 더 빨랐다.

“왜라는게 어딨어. 내가 널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계약상 이유 빼고.”

그 말에 라파엘이 잠시 멈칫했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많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괜히 쓸데없이 기분 나쁜 자신의 출생을 입에 담아 이블린을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라파엘은 대답 없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가족분들이 걱정하실 겁니다.”

“걱정은 맨날 시켰어.”

“저, 저는 암흑가의 수장이에요.”

“난 악당 프라비체의 딸이야.”

“……사람을 해친 적도 있습니다.”

“그건 좀 그렇긴 하네.”

아, 젠장. 이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라파엘은 작게 후회했지만 이내 관뒀다. 이블린에게 잘 보이고는 싶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라파엘, 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 다 드러나.”

네?

그런 라파엘의 얼굴이 참 볼만하다는 듯 이블린이 킥킥 웃었다. 동시에 라파엘은 멍해졌다.

‘아, 웃으셨다.’

오늘 이블린의 웃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블린이 키득거리는 작은 웃음소리 하나에 주변이 밝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좋은 사람을 역시 자신의 옆에 둘 수는 없다.

“마음은 정말로 감사합니다, 공녀님. 하지만 저는 역시…….”

라파엘이 어떻게 보면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얼굴로 띄엄띄엄 말을 토해 냈다. 그러자 이블린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파엘. 고개 들어 봐.”

이블린의 목소리는 가끔은 짜증스러웠고, 가끔은 심드렁하고, 가끔은 장난스러웠어도 이렇게 차분한 적은 없었다. 목소리에서 표정을 추측해 낼 수가 없었다.

“어서.”

아까와 같은 톤의 목소리로 이블린이 조용히 재촉했다.

‘……공녀님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고 싶은데.’

라파엘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끝까지 이불을 향했다.

“나 봐.”

이블린의 손이 라파엘의 뺨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뺨에 닿는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에 라파엘은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들었다.

그리고 이블린의 얼굴을 본 순간, 라파엘의 심장은 추락했다.

“……!”

이블린은 힘없이 웃고 있었다.

예전에 이블린이 목 놓아라 울던 때가 떠올랐다. 그런데 왜 힘없이 웃고 있는 저 얼굴이 그때만큼이나 슬퍼 보이는지, 라파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넌 스스로가 부족하다 생각해서 날 거절하는 거지?”

이블린의 물음에 라파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이 여전히 서글퍼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다시 물었다.

“예전에 내가 한번 죽어 봤다면, 믿을 수 있어?”

“예……?”

그런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라파엘은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 이블린은 라파엘의 얼빠진 얼굴이 재미있었는지 킥킥 웃었다.

“헛소리 같겠지만 진짜야. 가족들한테만 말했던 건데, 지금 나는 진짜 이블린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말했더라면 무슨 소리인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블린이 흑마법사라는 사실로 인해 라파엘은 그 말이 꽤나 신빙성 있게 들렸다. 이블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말했다.

“원래의 난 병으로 죽었어. 때문에 죽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알지.”

라파엘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렇게 말하며 이블린은 그때를 떠올렸다. 하얀 병실에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느껴질 만큼 고통스럽던 날들. 그 당시, 수술 전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 내 죽음으로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서운 건 아니었어. 아낄 게 없는 것과는 별개로 죽는 건 무서웠지.”

말을 이으면서도 이블린은 태연했다.

‘……말도 안 돼.’

라파엘은 믿을 수 없었다. 이블린의 죽음으로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런데 눈을 뜨니까 내가 이블린이라는 거야. 심지어 책 속의 악역이래, 내가. 너는 거기 나오는 암흑가 수장인 서브 남주였고.”

“……제가요?”

“그래. 그래서 내가 네 정체를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아. 그제서야 라파엘 안의 퍼즐이 맞춰졌다.

프라비체 일가도 모르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했는데, 그렇다면 아귀가 맞는다.

“아무튼 내가 읽은 대로라면 난 이번에도 죽어야 하는 건데, 두 번 죽기는 싫잖아? 그래서 적당히 달리아랑 율리시즈를 이어 주려 했는데 잘 안 됐지. 그래서 널 찾아갔어. 작중 최고 미친놈이라고 묘사된 너를 말이야.”

“그래서 저를 피하려 하셨군요.”

“맞아.”

이블린은 그 뒤로 하나하나, 라파엘과 있었던 일들을 열거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랑 작당하는 게 재밌더라. 네가 가끔씩 내게 농담을 던지면 짜증나긴 해도 재밌었고, 내가 무슨 무리한 부탁을 해도 결국엔 다 들어줬지. 내가 가출했을 때 따뜻한 우유를 줘서 고마웠고, 금희도 널 잘 따라서 좋아. 뭣보다 나를 이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 중에서 너처럼 잘생긴 사람은 찾기 힘들걸?”

라파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블린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자신보다 잘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거다.

라파엘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블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네가 아니면 안 돼.”

사락, 라파엘의 고운 머리카락이 이블린의 가느다란 손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람에게 질려 버린 내 마음을 야금야금 훔친 게 너야.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네가 아니면 안 되게 만들어 놓고 도망치다니, 그건 아니지.”

이블린이 장난스레 웃으며 라파엘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제 웃음에 넋을 놓은 라파엘을 제대로 바라보며, 이블린은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넌 내가 아직도 좋아?”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감정은 다 들통난 것이 아니었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이블린이 피식 웃으며 약간은 긴장한 듯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난 진짜 이블린이 아니잖아. 가족들에게 호구나 잡히고 살았던 만만한 구박데기 김금희지. 내 생각에 구박데기 김금희랑 라파엘은 정말로 안 어울리는데…….”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누구든, 제가 만난 건 당신입니다. 제가 만난 당신은 오히려 제게 차고 넘치는 상대예요!”

라파엘이 거의 경악하듯 대답하자 이블린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그러다 이내 씨익 웃더니 말 잘했다는 듯 라파엘의 코를 톡 건드렸다.

“거봐. 내 마음이 네 마음이야. 아무리 쓰레기여도 내가 좋다는데, 네가 말릴 이유는 없어.”

“공녀님…….”

라파엘의 코끝이 찡해졌다.

살면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귀한 사람에게서.

이블린이 엄한 얼굴로 엄포를 놓았다.

“그러니까 다시는 네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마. 감히 나한테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으려 해? 또 그딴 소리 하기만 해 봐.”

“그게, 그러니까…….”

자신은 이블린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이블린이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라파엘을 다그쳤다.

“대답!”

“예, 예!”

“좋아.”

바짝 군기 잡힌 대답에 이블린은 심통이 난 얼굴을 조금은 풀며 팔짱을 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라파엘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신의 지식에 의하면 그다음부터는 교제라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저, 그럼 공녀님.”

혹시 저 혼자 착각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라파엘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공녀님이 뭐야, 공녀님이.”

“읏.”

이블린이 새초롬하게 라파엘의 코를 꼬집었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라파엘이 얼얼한 코를 문지르며 물었다.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이름 불러.”

“이름…… 이요?”

“왜? 연기할 때는 잘만 불러 놓고는.”

지금 이블린이 자신의 반응이 재밌어 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목적이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이블린.”

라파엘이 어렵사리 이블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쪽, 하고 라파엘의 볼에 사랑스러운 소리가 내려앉았다.

“잘했어.”

이블린이 개구지게 웃었다.

툭, 하고 라파엘의 안에서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은 보상을 원하는 강아지처럼 이블린에게 달라붙어 종알거렸다.

“이블린.”

“으, 응?”

“이블린.”

“그만 불러, 이제 상 없어!”

상이 없다는 말에 시무룩하기도 잠시, 라파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이제는 굳이 상이 아니더라도 입을 맞출 수 있는 기회야 만들면 그만 아닌가?’

뺨을 붉힌 얼굴 그대로 라파엘은 이블린의 허리를 놔주지 않고 물었다.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뭐, 뭐?”

“당신께 키스하고 싶어요.”

직설적인 물음에 이블린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의외로 이런 걸 부끄러워하시는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라파엘은 불쌍한 척 얼굴을 꾸며내고는 눈을 그렁거리며 물었다.

“싫습니까?”

“……!”

반칙이었다. 라파엘의 얼굴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블린일 것이다. 그런데 저런 얼굴로 부탁을 하니 거절할 수가 없지 않은가.

“……좋아.”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는 정도의 작은 소리로 이블린이 작게 허락했다.

풀썩, 침대 위로 두 남녀가 포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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