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115화
대귀족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모두 다 모였다.
결혼식이 엉망으로 끝났어도 서약은 나누었다. 그랬기에 지금의 상황은 무척이나 애매했다.
“결혼식도 끝났으니 이제 황위가 빌 걱정은 없는데 난데없이 샬럿 황녀라니. 황위 싸움이라도 벌이게 되면 어찌할 거요.”
“유폐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본디 샬럿 황녀 전하께 갔을 자리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란 겁니다. 재판 때야 유야무야 넘어갔다지만 유폐 당한 황녀가 어찌 돌아올 수 있단 말입니까? 황명을 거역한 게 아닙니까.”
“당시엔 황녀 전하의 정신이 이상하다며 요양 보낸 것에 가깝지 않소. 알 사람들은 다 알 만한 이야기일 텐데?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니 법에 따르면 언제 돌아와도 이상할 건 없지 않나.”
“자네는 제정신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황녀가 황위 후계권을 쥐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인가?”
회의장은 같은 주제로 100분 동안 서로를 물고 뜯는 장소가 된 지 오래였다.
뿌리부터가 고귀한 귀족들은 벌써 지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헤베 백작은 흥미진진하게 회의를 경청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얼마 전 율리시즈로부터 영지를 하사받고, 황태자비의 아버지라는 직함으로 간신히 대귀족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다 물거품일 될 수는 없지.’
헤베 백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시 당하고 살아왔다. 이유야 단순했다. 백작이라고는 하나 돈 잘 버는 남작보다도 못한 지방 귀족이니까!
그런데 딸 하나 잘 둔 덕에 드디어 대귀족 반열에 올랐다. 이대로라면 가문의 부흥도, 프라비체를 뛰어넘는 부도 꿈은 아니다.
‘전하께서 어떻게든 회의를 잘 이끌어 가면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하셨지.’
그는 보면 볼수록 율리시즈가 참 괜찮은 사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큼큼, 헤베 백작이 헛기침을 하자 뾰족한 시선이 꽂혀 들었다.
“헤베 백작. 회의 중엔 그놈의 가래 낀 기침 안 할 수 없겠소?”
중년의 노신사가 대놓고 헤베 백작에게 면박을 줬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헤베 백작을 곱게 보고 있지 않았다.
헤베 백작은 당황했다. 자신이 황태자비의 아버지인데 이런 시선을 보내다니?
헤베 백작이 욱하려던 순간이었다.
“슬슬 앉아 있기 힘든데, 그만 결론을 내지?”
지나가는 듯한 타라의 한 마디에 모든 귀족이 타라에게 집중했다.
“그렇지요. 이 이상은 회의를 지속해도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거수로 정할까요?”
헤베 백작은 허둥지둥했다. 자신의 의견이 이렇게 가볍게 씹혀도 되는 건가? 아무리 귀족들의 왕이라 해도 타라의 태도는 오만불손했다.
황태자비의 아비가 여기에 있는데도 여전히 귀족들의 왕 노릇을 하려는 타라가 못마땅해, 헤베 백작은 언짢은 티를 숨기지 않고 대들었다.
“잠깐만. 이런 중요한 안건을 고작 거수로 결정한단 말입니까?”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당연히!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한 시간이면 충분히 시간을 들였지. 뭣보다 샬럿 황녀 전하께서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 한들, 거짓말쟁이 황태자비에 귀족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황태자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안 그러나?”
타라의 한 마디에 헤베 백작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싸악 가라앉은 분위기와 다르게 풋, 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게 왜 대들어.’
비웃음의 주인은 카밀라였다.
타라는 처음부터 샬럿 황녀를 지지한다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율리시즈는 이블린을 공개적으로 망신 준 적이 있고, 달리아는 거짓말로 이블린의 목을 자르려 했다.
타라 프라비체는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황제의 눈치도 보지 않는 사람인데, 황태자의 눈치를 볼 리 없다. 그런 사람이 황태자비의 아비라 해서 다른 태도를 취하겠는가?
타라는 아무렇지 않게 헤베 백작을 물 먹여 놓고 손을 들었다.
“나는 샬럿 황녀의 복귀에 찬성한다.”
상드리움의 법에 따르면, 일시적으로 황위 후계권을 잃은 후계자는 황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대귀족 회의의 결과에 따라 다시 황위 후계권을 쥘 수 있다.
샬럿을 지지하는 사람이 절반을 넘어가면 황태자도 무어라 할 수 없이 샬럿이 황녀의 지위를 되찾게 되는 거다.
카밀라가 뒤이어 손을 들었다.
“저도 샬럿 황녀의 복귀에 찬성해요.”
“저 역시 찬성합니다.”
“그럼 저도…….”
타라와 카밀라가 대놓고 샬럿의 손을 들어 주니 그렇지 않아도 율리시즈가 미덥지 못했던 귀족들도 얹혀 가듯 손을 들 수 있었다.
얼핏 봐도 손을 든 사람들은 절반 이상이었다. 말석에서 헤베 백작이 부들거렸다.
타라는 헤베 백작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과반수 이상이 찬성인 것 같군.”
키득키득. 몇 명이 헤베 백작을 비웃었다. 딸 하나 잘 둬서 겨우 신분 상승은 했지만, 머지않아 빼앗길 밥그릇이라며.
남의 추락만큼 재밌는 이야기는 또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라는 남의 추락을 딱히 즐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히 이블린을 건드려 놓고 떵떵거리게 둘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대귀족 회의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쥐고 있는 건 바로 타라 자기 자신이었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 보고를 올려라.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그대로 전달하도록.”
타라의 한 마디에 회의는 이블린이 바라는 쪽으로 끝났다.
* * *
율리시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율리시즈가 손에 들고 있는 건 대귀족 회의록이었다. 예상 내의 결과라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애초에 율리시즈가 샬럿의 복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샬럿을 끌어내리고자 하는 마음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방을 찾았다.
“달리아. ……음?”
율리시즈는 문을 열자마자 보인 달리아의 모습에 살짝 놀라더니 혀를 차며 웃었다.
“이런.”
달리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얌전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만 뺨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달리아가 율리시즈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전하.”
“많이 아팠을 텐데 의원을 부르지 그랬어.”
율리시즈가 웃는 낯으로 달리아에게 다가와 뺨을 어루만졌다. 달리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맞아서 부은 상처는 건드리기만 해도 아프다.
율리시즈는 건장한 남자에게 맞아 본 적이 없어 그런 걸 모르는지, 달리아가 몸을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앗차, 하며 손을 뗐다.
율리시즈가 달리아의 옆에 앉았다.
“설마 헤베 백작이 나보다 먼저 와서 그대에게 손찌검을 할 줄은 몰랐지. 미안해.”
율리시즈는 다정하게 웃으며 달리아의 이마에 키스했다. 달리아는 키스고 나발이고, 율리시즈를 쳐 내며 울먹였다.
“설마 제가 그날 일을 제대로 못 했다고 이러신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달리아.”
율리시즈가 더 해명을 바라는 얼굴로 물었지만 달리아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남편 된 사람에게도 자신의 가정사 같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럽다. 그리고 달리아는 그러한 종류의 수치스러움이라면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헤베 백작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주의를 주도록 하지. 황태자비의 뺨에 상처라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율리시즈는 다혈질적으로 굴며 달리아를 협박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통해 달리아에게 교훈을 주고 자신은 그 상처를 어루만지도록 바뀌었다. 달리아를 조종할 완벽한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달리아에게 꽤나 먹히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이러지 않으셨는데.’
달리아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율리시즈의 손길마저 아프다고 거절하기엔, 달리아는 애정에 너무나도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달리아는 아까보다 기분을 푼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대귀족 회의, 결국 샬럿 황녀가 복귀한다면서요.”
“그래.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예상 내야. 뭐, 어쨌든 내가 황제 대리 인감을 찍어야만 성립되는 안건이지만 영원히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지.”
율리시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상황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은 이상했다. 위험함을 감지했어도 피할 수는 없었다. 율리시즈가 입을 열었다.
“달리아. 이제 그대는 황태자비야.”
“알고, 있어요.”
“예정대로라면 지금 그대는 황실 최고의 레이디가 되어야 했겠지만, 샬럿 때문에 다 망치게 생겼지.”
설마.
이어지는 말에 달리아는 멈칫했다.
“사교계에서 그대가 샬럿 황녀를 몰아내야 해. 그대 탓에 샬럿 황녀가 돌아오게 되었으니, 되돌려 보내는 것도 그대의 일이지.”
말도 안 돼. 샬럿 황녀와 싸우는 게 왜 내 일이야? 달리아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내 탓이라고 해도 부부인데 왜 같이 책임을 져 주지 않는 거지? 사랑한다며!’
달리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
어느 순간부터 율리시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사실이 뼈가 아프도록 와 닿았다. 율리시즈의 파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행복해 보이지도, 사랑스러워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도살장에나 끌려가는 듯한 달리아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일어서, 달리아. 우리에겐 시간이 없으니까.”
* * *
“아, 일어났다!”
라파엘이 의식을 차리자마자 들은 것은 가장 먼저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도도한 외모처럼이나 항상 까탈스러웠던 목소리는 걱정을 가득 띠고 있었다.
“공녀님……?”
목소리가 왜 그러냐고 물으려 입을 꺼낸 순간, 라파엘은 제 목소리도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열이라도 나는 듯 목은 잠겨 있었고 몸이 나른했다.
시야도 흐릿해서 한참이나 눈을 깜빡여야지만 이블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라파엘, 정신이 들어?”
이블린은 제 침대 맞은편에 앉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파엘을 살피고 있었다.
라파엘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본 것이 이블린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다가도, 어째서 이블린이 여기에 있는지를 떠올렸다.
“공녀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까 여기 있지! 그보다 너 등뼈 나갔었어! 팔도 부러졌다더라!”
“아, 역시.”
“역시이?”
이블린의 언성이 높아지자 라파엘은 아차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자잘한 부상 정도야 두 명의 목숨값으로는 차고도 남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하면 공녀님의 화를 부추기기만 하겠지.’
라파엘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통증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요……. 아니, 감각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독한 치료 받아서 그래. 치료 마법도 만능은 아니라고 잠깐 스쳐갈 부작용이랬어.”
“아하…….”
“너 사흘이나 기절해 있었어, 알아?”
이블린이 눈썹을 찡그리며 심통을 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킥킥 웃었다.
“이걸로 역지사지가 되셨으면 좋겠는데요.”
“죽는다, 진짜.”
이블린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꼭 저렇게 협박을 한다. 매번 나누었던 평범한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블린이 라파엘의 손을 잡았다.
“고, 공녀님?”
라파엘이 너무 놀라 말을 더듬었다. 라파엘이 놀라든 말든 이블린은 눈시울을 붉힌 채, 행여 놓치기라도 할세라 라파엘의 손을 양손으로 꽈악 붙들고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
“무엇을…….”
“같이 죽겠다고 하지 말라고.”
“장담은 못 드리겠는데요.”
라파엘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이블린의 얼굴이 더더욱 울상이 됐다. 이블린이 화낼 테니 웃으면 안 되는데 사랑스러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라파엘은 이블린의 손을 꽈악 붙잡고 입을 열었다.
“그보다 공녀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뭔데? 달리아랑 율리시즈 X 됐는지가 궁금해?”
거친 언사에 라파엘이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것도 궁금하긴 하지만 다른 게 더 궁금했다. 라파엘이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죽게 둘 것 같으냐고, 분명 제게 말씀하셨죠?”
“어, 어어?”
“그거 무슨 뜻인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라파엘의 질문에 이블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