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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14)화 (114/154)

114화 - 114화

“더글러스! 빨리 검!”

“뭐, 뭐?”

더글러스는 허둥지둥 품을 뒤지더니 내가 다룰 만한 단검을 찾아 내게 던졌다. 다행히 이번에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정확히 내 앞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어 드레스를 부욱 찢어 버렸다.

이제 내가 발목을 잡을 일은 사라졌다. 더글러스가 잔해 더미를 이리저리 뛰어넘으며 간신히 내게 도달했다.

“이블린, 다친 데는…… 손목에서 피가 나잖냐! 다친 거냐?”

“내 손목보다는 빨리 라파엘 좀 어떻게 해 줘!”

더글러스는 뒤늦게 라파엘의 존재를 깨달았다. 라파엘의 덩치보다 큰 잔해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 것이다. 더글러스는 당장 잔해 더미를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크읏……!”

하지만 더글러스 혼자 잔재를 치우고 라파엘을 꺼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라파엘은 포기했다는 듯 내게 말했다.

“공녀님, 저는 괜찮으니까 어서 공자님과 가십시오.”

“이 멍청아! 널 두고 어떻게 가! 더글러스, 어떻게 못 들어!?”

“젠장, 나 혼자서는……!”

나도 온 몸으로 잔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발만 미끄러질 뿐 어림도 없었다. 잔해를 치우려면 적어도 더글러스와 비슷한 힘을 가진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불안에 떨자 더글러스가 나를 위로했다.

“걱정 마라, 이블린. 어머니가 곧 오실 거다.”

타라가 온다고? 그 소리를 듣기 무섭게, 입구 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이블린!”

타라였다! 타라가 도착했다. 타라와 더글러스의 힘이라면 분명 잔재를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

쿠궁, 쿵!

내가 있는 힘껏 내지른 소리는 출구와 함께 새로 떨어진 잔해 더미에 깔려 버렸다.

천장이 무너져 퇴로를 막아 버렸다.

“아, 안 돼…….”

툭,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몸에 힘이 빠졌다.

이럴 때 내가 마법을 쓸 줄 알았더라면……!

흑마법을 다뤄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지만 처음으로 후회가 되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을 내리쳤다.

쾅!

“헉!”

내가 내리친 곳으로부터 바닥이 쩌적 갈라졌다. 퇴로를 막고 있던 잔재가 산산조각 났다. 더글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네가 한 거냐, 이블린?”

놀란 건 더글러스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놀라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저릿했다.

믿지 못하건 말건 퇴로는 뚫렸다. 그러기 무섭게 타라가 내게로 달려왔다.

“이블린! 이블린, 다친 데는 없느냐!?”

타라는 더글러스보다 가볍게 잔재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도달했다.

살았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외쳤다.

“나는 괜찮으니까 이 잔재 좀 치워 줘, 빨리!”

타라도 더글러스와 마찬가지로 뒤늦게 라파엘을 발견했다.

“더글러스, 네가 저쪽을 잡거라.”

“예, 어머니.”

타라와 더글러스가 잔해를 양쪽에서 잡아 받치는 동안 나는 라파엘을 부축했다. 라파엘이 빠져나오고 타라와 더글러스는 잔해에서 손을 뗐다.

쿵! 듣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렸다. 잠깐 받치고 있었을 뿐인데도 꽤나 무거웠는지 타라와 더글러스가 괴물 보듯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이 무거운 걸 혼자서 받치고 있었단 말이냐?”

“따님을 지켜야지요.”

이제 좀 살겠는지 라파엘이 우스갯소리 하듯 대답했다. 하지만 안색은 창백했다. 팔은 찢어지고 부러졌고, 떨어지는 천장에 맞았던 등뼈도 최소한 금이 갔을 것이다.

“다들 빨리 나와! 곧 무너질 거야!”

우리가 예식장을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예식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크게 다친 건 라파엘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부상자가 속출해 있었다. 라파엘은 일단 바닥에 눕혀 놨다.

바닥에 누우니 슬슬 의식을 놓을 것 같은지, 라파엘은 아까처럼 표정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물었다.

“공녀님, 무사…… 하십니까?”

그 말에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심하게 다친 건 자신인데 이런 상황에까지 날 걱정하다니. 나는 라파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덕분에 무사해.”

“다행입니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의원이 올 거야. 한숨 자 둬.”

라파엘이 눈을 감았다. 불안정하게 들리는 라파엘의 숨소리가 내 분노를 태울 불쏘시개가 되었다.

결혼식은 아주 화려하게 망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망하지 않았다.

달리아와 율리시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미쳤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만 할 선을 넘을 만큼 말이다.

‘그러면 나도 기꺼이 넘어 줘야지.’

나는 본궁 쪽을 스산하게 노려보았다. 내 사람까지 건드린 게 그들의 실수였다.

* * *

예식장이 무너졌음에도 기적적으로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이블린과 라파엘도 무사했다는 뜻이었다.

“젠장할!”

쿵! 율리시즈가 벽을 세게 쳤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이런 소문이 떠돌고 있다.

신이 새로운 황태자비를 반기지 않는다.

새로운 황태자 부부에게 황위를 맡겨도 되나.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부상자는 적지 않다. 그렇기에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일망타진할 생각으로 무너뜨린 거였는데, 황실의 예산을 깎아먹고 불안한 소문을 태울 기름만 퍼부어 준 격이었다.

“젠장할! 망할 공녀, 망할 셀레스티안 후작!”

쾅! 쾅! 율리시즈는 짜증스러운 이름을 내뱉으며 벽에 화풀이를 해 댔다.

‘……헉!’

들어오자마자 율리시즈의 난폭한 모습을 본 달리아는 그대로 뒤돌아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율리시즈가 귀신같이 달리아에게 물었다.

“달리아, 알아 왔나?”

율리시즈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달리아가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죄, 죄송해요, 전하. 제 마법으로도 샬럿 황녀의 거주지는 지금…… 찾을 수가 없었어요…….”

율리시즈는 지금 샬럿을 찾고 있었다.

상드리움의 법상, 황제가 모종의 이유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면 샬럿에게도 후계권이 주어진다. 반역죄만 아니라면, 황위를 잇고자 하는 모든 황위 후계권자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다.

율리시즈는 자신의 능력을 아주 잘 안다.

샬럿은 어려서부터 완성형이었다. 율리시즈가 샬럿을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황태자라는 직위는 영원하지 않다. 황태자 자리를 빼앗기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것이다.

‘왜, 왜 이렇게 됐지?’

율리시즈는 이유를 더듬었다.

간수들 때문인가? 샬럿이 탈출할 동안 기절이나 하고 있었던 간수들을 자르긴 했지만 율리시즈의 마음은 편해지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샬럿을 불러들인 누군가 때문인가?

율리시즈는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저, 전하?”

달리아가 불안하게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을 텐데, 지금은 거추장스러워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달리아 네가 거짓말만 안 했더라면, 공녀와 후작이 샬럿을 끌어들이지는 않았을 텐데!”

전조도 없이 율리시즈의 분노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달리아는 위축되었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왜 나한테 화를 내? 당신이 샬럿 황녀만 잘 막았으면 되는 거였잖아!’

아니면 샬럿을 황제처럼 혼수상태로 만들어 놓든가!

달리아는 그게 불만이었다. 황제는 잘도 혼수상태로 만들어 놓고, 왜 샬럿은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게 두지?

달리아였다면 샬럿을 죽이지는 않더라도 황제와 같은 꼴로 만들었을 것이다.

달리아는 샬럿을 보자마자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 하던 주제에, 만만한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는 율리시즈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이 말을 솔직하게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명심할게요, 전하.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달리아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부부 관계라고 볼 수는 없는 광경이었다.

율리시즈는 한참이나 씩씩거리더니 아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샬럿 황녀가 돌아오는 건 거의 기정사실일 거다. 프라비체 공작가가 밀어 줄 테니 다른 귀족들도 눈치를 보면서 샬럿의 복권을 추진하겠지. 분하지만 내게 대귀족 회의를 막을 수 있는 힘은 없어.”

대귀족 회의는 말 그대로 귀족들만이 참가하는 회의다.

황위 계승권을 두고 자주 열리곤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율리시즈는 낄 수 없었다. 율리시즈는 황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젠장할……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혹시 여기서 율리시즈에게 내쳐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달리아는 더 이상 율리시즈 없이 미래를 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달리아가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저, 전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짓말이나 하지 말고 얌전히 방에 있거라. 그게 날 도와주는 일이다.”

쾅. 율리시즈는 차가운 한 마디를 남기고 방을 떠났다.

달리아는 풀썩 주저앉았다. 숨이 턱 막혀 와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 *

예식장에서 소란이 일어난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샬럿의 등장으로 당연하게도 황위 후계권 이야기가 오갔고 그 결과 대귀족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역시 파그라시움까지는 황태자 놈들이라 해도 못 찾는구나.’

샬럿은 일찍이 유다가 파그라시움 안에 대피시켰다. 덕분에 샬럿은 얄미울 정도로 멀쩡하게 대귀족 회의가 열리는 오늘까지 발 뻗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아침 일찍부터 홀로 나왔다.

“이블린.”

타라가 조용히 현관을 나서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타라는 졸린 기색 없이 나와 내게 물었다.

“오늘도 셀레스티안 저택에 가니?”

“응. 라파엘 상태 봐야지. 날 구해 준 은인인데.”

나는 라파엘에게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대귀족 회의가 굴러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긴 하지만, 나는 작위가 없기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

무엇보다 라파엘이 의식을 되찾을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좀 늦을지도 몰라.”

“그래. 너무 늦으면 데리러 가마.”

평소라면 못마땅해했을 타라도 이번만큼은 그가 내 은인이라는 걸 인정하고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타라는 내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내 손목에 시선을 주었다.

예식장을 탈출할 때 손목을 다치긴 했지만 치료사 덕에 금방 나았다. 라파엘처럼 중상을 입었다면 몰라, 손목 치료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다. 나는 씨익 웃으며 손목을 붕붕 돌려 보였다.

“손목은 이제 완전 멀쩡해. 양산 두 개 정도는 들 수 있어.”

피식, 타라에게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내가 건물에 깔려 죽을 뻔한 이후로 타라는 늘 긴장 상태였다. 타라가 이렇게 웃는 걸 얼마 만에 보는지.

조금이라도 타라가 웃었다는 사실에 나도 안심하고 웃었다. 타라는 내가 걱정하는 바를 알고 있다는 듯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대귀족 회의는 너무 걱정 말거라.”

“……응. 부탁할게, 엄마.”

오늘 있을 대귀족 회의는 타라에게 맡겼다. 나는 안심하고 셀레스티안 후작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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