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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13)화 (113/154)

113화 - 113화

“다들 도망쳐!”

예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며 아우성이었다. 나는 이를 아득 짓씹었다.

‘달리아 저게 진짜!’

식장을 무너뜨린 건 달리아다. 그 증거로 달리아는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저게 진짜!’

당장이라도 달리아의 멱살을 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식장이 무너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기사들이 달리아와 율리시즈를 에워싸고 있는 걸 말없이 지켜보았다.

“다들 비켜!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의 안전이 먼저다!”

“황녀 전하를 모셔!”

기사들이 귀족들을 밀치고 율리시즈와 달리아, 샬럿을 피신시켰다. 가만히 있는 나를 향해 라파엘이 말했다.

“공녀님, 저희도 가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이 나를 끌어안고 출구로 향했다.

출구를 통제하는 기사들은 연로한 사람들과 직위가 높은 사람들을 우선해서 피신시키고 있었다.

그 기준대로라면 당장 나와 라파엘을 탈출시켜야 하겠지만, 기사들은 묘하게 우리를 탈출하는 사람들 무리에 끼워 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블린!”

저 멀리서 가족들이 내 이름을 불렀다.

가족들이 나를 데리러 오려 인파를 거슬러 팔을 뻗었으나 만원 지하철에서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뭐하는 거야, 저기 내 딸이 있어! 프라비체 공녀가 아직 저 안에 있단 말이다!”

“이블린, 이블린!”

“이블린, 얼른 나와! 어서!”

기사들은 약속한 듯 나를 뺀 프라비체 일가만을 피신시켰다. 누가 지시했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가족들은 인파에 떠밀려 순식간에 예식장에서 사라졌다. 기사들도 어느새 철수했다. 방해꾼들이 사라진 지금 서둘러 탈출해야 했다. 라파엘이 내 손을 잡고 출구로 이끌었다.

“갑시다, 공녀님.”

“그래.”

여기서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라파엘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한 그때였다.

쿵!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아니, 떨어진 건 샹들리에뿐만이 아니었다. 샹들리에가 박혀 있던 천장까지 함께 떨어졌다.

“공녀님!”

“아악!”

다행히 얼굴이나 팔 따위를 살짝 긁히기만 했을 뿐 무사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망할 드레스!”

드레스가 잔해 더미 사이에 끼었다. 빨리 찢고 도망가려는데 하필이면 원단이 너무 좋은 데다가 안에 겹겹이 받쳐 입은 질긴 속드레스까지 함께 끼인 탓에 찢을 수가 없었다.

“제발 말 좀 들어라, 제발!”

아무리 잡아당겨도 드레스는 찢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가루의 크기는 점점 커져 갔다.

“공녀님!”

라파엘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고 어째서 그가 나를 불렀는지 깨달았다.

“……!”

천장이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아, 망했다. 이번 생은 건물에 깔려서 죽는구나. 나는 다가올 고통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 * *

가장 먼저 탈출한 율리시즈는 바로 샬럿을 찾았다. 하지만 샬럿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누가 숨겼는지는 뻔하다.

“프라비체 공. 잠깐 이야기 좀 하지.”

타라는 오르페시아, 더글러스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셋 다 갑자기 끼어든 뺀질이에게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타라는 마지못해 더글러스에게 자리를 피할 것을 명령했다.

“더글러스, 너 먼저 안으로 들어가 있거라.”

“예, 어머니.”

더글러스가 자리를 피했다. 타라는 고개를 돌려 율리시즈를 노려보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바쁩니다. 용건만 빨리 간단하게 말씀하시지요.”

거만한 태도에 율리시즈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이쪽도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율리시즈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대가 샬럿 황녀를 탈출시켰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헛소리 말고!”

율리시즈가 소리치자 오르페시아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것 보게나? 감히 나한테 윽박을 질러?’

오르페시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거다.

황제조차 황태녀 시절, 공작이었던 자신에게 예를 갖췄는데.

오르페시아는 눈썹을 들어 올린 채 율리시즈를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있어 올려다보는 것에 가까웠지만 눈빛만큼은 확실히 율리시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시즈는 뒤늦게야 오르페시아의 기백에 눌려 뒷걸음질 쳤다. 오르페시아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제 손녀딸이 안 보이는데, 혹시 전하께서는 아십니까?”

“……!”

아뿔싸, 율리시즈가 혀를 찼다.

샬럿이 탈출했다는 분노에 휩싸여 그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까먹고 프라비체 일가에게 접근했다. 율리시즈는 뒤늦게 발을 빼려 했다.

“전하.”

타라가 율리시즈를 붙잡았다. 율리시즈는 눈알만 굴려 타라를 뒤돌아보았다. 타라는 그 어떤 때보다 살벌한 얼굴로 율리시즈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는 제 딸을 잃게 된다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알아 두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럼.”

타라는 율리시즈를 스쳐 무너져 가는 예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실과 헨리가 입을 틀어막고 노심초사 발을 굴렀다.

“이, 이블린은 무사하겠지?”

“무사, 무사해야지! 만약 여기서 잘못된다면…….”

“다들 그런 불안한 말 하지 말거라. 말이 씨가 된다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는 피에르도 상당히 불안해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건물이 무너지는 속도가 이상하게 느린 게 다행이야.”

보통 건물에 한번 금이 가면 순식간에 무너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속도가 느렸다.

누구의 짓이냐고 하면 프라비체 노공작과, 카밀라가 아까 몰래 탈출시킨 유다의 짓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좀 버겁군.’

아무리 오르페시아라 해도 이렇게 커다란 건물을 남몰래 떠받치고 있기란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연장자인 자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르페시아는 자신의 체력 소모를 티내는 대신, 불안에 떠는 손주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괜찮을 거다, 아실.”

“할머니…….”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아실이 눈을 그렁이며 오르페시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인파에 떠밀려 멀어져만 갔던 이블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괜찮을 거야. 형이랑 어머니가 갔으니까.’

제발 그때까지 이블린이 무사해야 할 텐데. 아실은 스러져 가는 예식장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 * *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잔해가 떨어졌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

설마 단번에 죽어서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나?

눈을 슬며시 뜨니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무너지고 있는 예식장이었고, 드레스도 여전히 잔해더미에 끼어 있었다.

그렇지만 아까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내 드레스 위로 익숙한 하얀 예복 자락이 보였다. 설마,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

“괜찮으십니까, 공녀님?”

역시나, 라파엘이 나 대신 잔해에 맞았다! 라파엘은 잔해를 등으로 힘겹게 떠받치면서 나를 향해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경악했다.

“지금 내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너 미쳤어!?”

“지극히 멀쩡한 정신으로 한 짓입니다. 그보다 어서 드레스를 찢으시죠. 제 품에 단검이 있습니다.”

라파엘은 잔재를 등과 팔로 떠받치느라 손을 쓸 수 없었다. 하는 다급히 라파엘의 품을 뒤져 단검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건물은 더더욱 빠르게 뭉개져 갔다. 우르르, 쿵! 자잘한 잔재가 다시 한번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꺄악!”

내가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내가 맞은 게 아니었다.

“윽……!”

예상대로 라파엘이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대로 팔을 뻗어 내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잔재를 막은 라파엘의 손끝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라파엘! 라파엘,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서 빨리!”

라파엘의 다급한 재촉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라파엘의 품을 마저 뒤졌다. 다행히 이번에는 단검을 찾았다.

그렇지만 우수수 떨어지는 잔재를 맞으며 드레스를 찢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퍽!

“악!”

퍽, 챙그랑! 드레스를 찢다가 손목에 잔해를 맞는 바람에 단검을 놓쳐 버렸다. 단검은 꽤 멀리까지 굴러갔다.

“망할……!”

어느 정도 찢어졌다면 손으로 찢었을 텐데, 아직 한 뼘도 못 찢었다. 엎드려 기다시피 팔을 뻗어 보아도 팔이 닿지 않아 단검은 주울 수가 없었다.

‘제발 닿아라! 제발!’

팔에 쥐가 나다 못해 어깨 관절이 빠질 정도로 뻗은 보람이 있는지 겨우 차가운 칼날이 손끝에 닿았다. 됐다, 이제 조금만 더 당기면……!

“공녀님, 위험합니다!”

“헉……!”

라파엘이 다급히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쿵! 간발의 차로 머리에 잔해를 맞을 위기를 면했다. 하지만 잔해는 내 위로만 떨어진 게 아니었다. 라파엘이 받치고 있는 커다란 잔해 위에도 떨어졌다.

쾅!

“으윽……!”

쿵, 쿠궁! 쾅!

심지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크고 작은 잔해들이 사정없이 떨어져 라파엘의 몸을 짓눌렀다.

“라파엘!”

틀렸다. 이 망할 드레스 때문에 여기서 라파엘까지 죽을 수도 있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라파엘, 빨리 도망가!”

“예?”

“그 망할 잔해 따위 내팽개치고 그냥 가라고!”

라파엘이 받치고 있는 잔해는 나를 향해 떨어지던 것이었다. 라파엘이 잔해를 내팽개치고 간다면 당연히 그 잔해는 내게로 쏟아진다. 라파엘이 반발했다.

“저보고 공녀님을 죽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여기서 그냥 둘이 같이 개죽음 당할래!? 너라도 살란 말이야!”

“공녀님!”

내 말에 라파엘이 울컥해 소리쳤다. 내가 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발언에 화가 난 듯했기에 나 역시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 나 혼자 죽고 싶어서 너 보내는 건 줄 알아!? 나도 살고 싶어! 죽기 싫다고!”

내 외침에 라파엘이 흠칫 떨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그 누구보다 내 목숨 귀한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라파엘을 보내려고 마음먹은 건 라파엘의 목숨이 내 목숨만큼이나 귀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거, 나는 눈물을 벅벅 닦는 등 남에게 못 보일 꼴사나운 모습은 다 보이며 소리쳤다.

“어차피 드레스가 끼인 시점에서 난 죽을 거였어! 그런데 나 혼자 죽기 싫다고 네 발목까지 붙잡고 싶지는 않다고! 너라도 살란 말이야!”

“……공녀님.”

“빨리 가, 이러다 건물 다 무너지기 전에 가란 말이야!”

라파엘이 충격에 빠진 듯 말을 쉬이 꺼내지 못하더니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랑은 의견이 반대군요. 저는 혼자서만 살아서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죽는다면 같이 죽겠습니다.”

“이 미친놈아, 내 말 좀 들어!”

“싫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까지 죽게 만들지 말라고!”

실랑이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잔해는 계속 무너졌다. 이제 라파엘이 빠져나갈 수 있는 틈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다 정말 둘 다 개죽음 당하겠구나, 싶던 그때였다.

“이블린!”

더글러스의 목소리였다. 식장 입구 쪽에서 더글러스가 보였다. 인파에 떠밀려 한 번 밖으로 밀려 나갔던 더글러스가 다시 돌아온 거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글러스에게 소리쳤다.

“더글러스, 검 같은 거 있으면 아무거나 빨리 이쪽으로 던져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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