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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11)화 (111/154)

111화 - 111화

라파엘과 다시 볼 기회는 싫어도 생기게 되었다. 미리 맞춰 둔 민폐 하객룩의 가봉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둘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거리를 유지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는 길 마차에서도 숨 막혔는데 돌아갈 때도 그럴 수는 없다.

“있잖아……!”

“저기, 공녀님……!”

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젠장, 이 패턴을 내가 겪을 줄은 몰랐다. 라파엘을 희롱했다는 죄책감을 빠르게 덜기 위해 나는 선빵을 쳤다.

“나 먼저 말할게!”

“먼저 말씀하십시오!”

라파엘이 고집이 안 세서 다행이다.

나는 숨을 들이켜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목에 돌이 박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 성추행해서 미안하다고?’

아주 바람직한 사과의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과를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부끄럽고 낯뜨거워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싶었다.

‘아냐, 미쳤어? 제대로 사과해!’

나는 내면의 비양심을 후려쳤다. 관계의 오해는 대부분 대화의 부재에서 일어난다.

예전이면 몰라, 라파엘은 내게 은인이다. 갈 곳 없던 나를 받아 주었다. 계약이 끝나더라도 성추행범과 피해자의 관계보다는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남기 위해, 나는 눈 딱 감고 외쳤다.

“그때는 갑자기 키스해서 미안! 내가 미쳤었나 봐!”

내 외침 비슷한 사과에 라파엘은 손사래를 치며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괘, 괜찮습니다! 오히려 좋았, 아니. 이게 아니라.”

“……좋았다고?”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거 진심인가? 나는 라파엘에게 기어가다시피 몸을 내빼고 물었다.

라파엘의 푸른 눈 안에 눈을 반짝거리는 내가 보였다. 라파엘은 부끄러운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모자라 고개를 돌렸다.

“……네. 첫 키스였으니까요.”

“첫 키스였다고?”

“그러면 안 됩니까?”

놀림 당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라파엘이 샐쭉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안 되긴. 너무 좋아서, 아니. 신기해서 그랬다.

‘하긴, 결벽증도 있고 연애에도 관심 없어 보였지.’

라파엘은 내 무언을 무언가의 압박으로 받아들였는지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필요하시면 가끔씩 하셔도 됩니다.”

얘가 지금 무슨 헛소리야? 내가 무슨 욕구 불만의 화신인 줄 알아?

“그럼 지금 해도 돼?”

안녕하세요, 욕구 불만의 화신입니다.

이 와중에 라파엘의 입술을 탐하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얼굴로 첫 키스였다니, 묘한 정복감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첫 발도장을 찍었다면 그다음은 뛰어들다시피 파고들어 스노우 엔젤을 만들어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라파엘, 싫으면 제대로 말해. 지금 너한테 키스해도 돼?”

내 직설적인 물음에 라파엘이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라파엘의 손을 조심스럽게 치우고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라파엘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능숙하게 굴 것처럼 생겨서는 숙맥 같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내가 라파엘에게 키스를 하기도 전에 라파엘의 것이 먼저 내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

뭐야, 첫 키스라며. 왜 이렇게 잘해. 얼마나 잘하는지 거의 내가 라파엘을 쓰러뜨리다시피 하고 있는 자세였는데 어느샌가 라파엘이 내 위에 있었다.

“으응, 음……. 하아, 잠깐만.”

“조금만 더요.”

숨이 차서 라파엘을 밀어내도 라파엘은 자석처럼 내게 다시 들러붙어 입술을 탐했다.

이거 관계가 역전된 거 아닌가? 잠시 억울했지만 라파엘이 다시 내 입술을 덮은 순간 모든 생각은 날아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밖에 있던 직원들이 속닥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바쁘신 것 같으니까 나중에 다시 오자.”

“네.”

……다음부터는 장소를 좀 가려야겠다.

* * *

이후, 나와 라파엘과의 기묘한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계약 위반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계약서엔 서로 반하지 말 것, 이라고만 적혀 있지 입술을 탐하지 말라고는 적혀 있지 않았었는데.

무엇보다도 서로 합의하에 진행한 것뿐인데 문제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결혼식은 앞으로 일주일로 바짝 다가왔다.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 라파엘의 저택에 왔다.

“제가 전해드려도 되는데요.”

“됐어. 이왕 돈 쓴 거 생색 제대로 내야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쪽, 뺨에 라파엘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당황한 내 얼굴을 보고 라파엘이 혹시 자신이 실수했나, 하며 불안하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싫으셨습니까?”

“아, 아니. 그냥 놀라서.”

키스는 심심찮게 했지만 뺨에다가 뽀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키스랑은 다른 의미로 얼굴이 화끈거려 나는 서둘러 라파엘을 내보냈다.

“얼른 다녀와.”

“예, 공녀님.”

10분도 되지 않아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네가 날 응접실에 다 모실까?”

“가 보면 압니다.”

“알려 주면 어디가 덧나나.”

작은 불평과 함께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샬럿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언제 불평불만을 했냐는 듯 반갑게 내게 다가왔다.

“어머, 이쁜아. 안녕? 언니 보러 왔니?”

“맞아.”

설마 내가 고개를 끄덕일 줄은 몰랐는지 샬럿이 입꼬리를 올린 채 놀란 눈을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샬럿에게 말했다.

“별일은 아니고. 결혼식 날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알릴 거라면서?”

“맞아.”

“그때 입을 옷, 아직 안 정했지?”

“아마도?”

“잘됐네. 저거 입어.”

나는 미리 옮겨 둔 토르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토르소에 걸려 있는 건 황금색의 화려한 예복이었다. 군데군데 박혀 있는 푸른 사파이어와 진주는 누가 보아도 최상품이었다.

샬럿은 내 서프라이즈 선물에 놀란 듯 눈썹을 들어 올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왕 등장할 거 화려하게 등장해야지. 그렇지, 샬럿 황녀?”

내 말에 샬럿은 서서히 입꼬리를 올리더니 소파 뒤에서 날 껴안고는 내 볼을 콕콕 찔러 댔다.

“요거 요거, 이래서 내가 널 안 예뻐할 수 없다니까? 어쩜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짓만 할까?”

“아, 치워.”

“누구랑은 차원이 달라. 라파엘 쟤는 내가 거적데기 입고 결혼식 가도 몰랐을걸?”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옷은 드릴 생각이었어요.”

“그래 그래, 그러시겠지~”

라파엘이 작게 반발했지만 샬럿은 흥얼거리듯 비아냥거리며 가볍게 흘려들을 뿐이었다.

샬럿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튼 옷 고마워. 덕분에 초라한 등장은 면하겠네.”

“알면 뒷일 잘 부탁해.”

“그럼, 물론이지.”

샬럿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 하나만은 타라와 동급으로 무서워서 새삼 샬럿이 내 편이라는 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적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우…….’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샬럿은 기분이 여간 좋은 게 아닌지 드레스 주위를 맴돌더니 즉흥적으로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에잇, 기분이다. 언니가 상 하나 줄까?”

“허튼짓 마십시오.”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아닐까?

라파엘이 사납게 샬럿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언제 샬럿이 라파엘에게 겁먹은 적이 있었나. 샬럿은 사뿐사뿐 내게 다가와 유혹하듯 내 귀에 속닥이며 물었다.

“너, 라파엘 좋아하지?”

“……!”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샬럿에게서 떨어졌다. 얼굴이 붉어진 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샬럿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혹적으로 웃었다. 라파엘은 못 들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 반, 경계 어린 표정이었다.

“뭐라고 하신 거죠?”

“넌 알 거 없어, 라파엘.”

샬럿은 라파엘의 물음을 가볍게 누르고 또다시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언니가 제대로 밀어 줄게.”

밀어 주긴 뭘 밀어 줘? 황제가 돼서 밀어 주겠단 거야?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샬럿은 장난스레 윙크했다.

* * *

율리시즈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예비 신부를 보며 감탄했다.

“아주 아름다워, 달리아.”

부드럽게 퍼지는 하얀 웨딩드레스는 달리아의 하얀 피부와 은발과 어우러져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부케는 달리아의 눈동자색과 맞춘 노란 달리아 꽃이었다.

“감사해요, 전하.”

달리아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초췌함은 감출 수 없었다. 율리시즈는 살짝 패인 달리아의 볼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레 말했다.

“체중 조절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

“그날 전하께 가장 예뻐 보이고 싶은걸요.”

“지금도 내 눈에는 그대가 가장 아름다워.”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뺨에 작게 입 맞춘 후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이었다.

“그대의 힘이 필요해, 달리아.”

“제힘이요?”

달리아가 불안하게 물었다. 율리시즈는 달리아가 공포에 떨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달리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더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들어주지 않을 거야?”

“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 드릴 거예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을지는…….”

달리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 자신감 없는 모습에 율리시즈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혹시나 율리시즈에게 버림 받을까, 달리아는 덜컥 겁이 나 고개를 젓고 재빨리 소리쳤다.

“하, 할 수 있어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전하?”

“그래, 아주 바람직해.”

그제서야 율리시즈는 아까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달리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달리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듯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

율리시즈의 부탁을 들은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율리시즈에게 허리가 단단히 붙잡혀 있어 도망치지는 못했다.

율리시즈가 물었다.

“겁이 나나?”

“그, 그게…….”

“뭐, 이해해. 당연히 그럴 거야. 그대는 착했으니까.”

착했으니까. 명백히 지금은 아니라는 뉘앙스였다. 율리시즈는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포식자처럼 달리아의 눈을 제 눈동자 안에 가두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 그대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재판을 열 수 있는 거짓을 입에 담는 여자야. 이번 일도 다를 거 없어. 그대가 하지 않은 척 시치미만 떼면 돼. 거짓말이랑 별다를 게 없지?”

율리시즈가 눈빛으로 대답을 종용했다.

그럼에도 달리아에게서는 네, 이 한 마디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이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

달리아는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자신에게서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율리시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달리아에게서 부정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지 자신만만해 보였다.

‘앞으로 한고비만 더 나아가면 돼. 이 한고비만 넘기면 황태자비, 아니 황후가 될 수 있어.’

그럼 이블린도, 라파엘도 다 이기게 된다.

즉, 인생의 승리자는 두 사람이 아닌, 달리아 자기 자신이란 소리였다.

하지만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인간임을 저버려도 되는 걸까?

‘……이미 흑마법에 손을 댔어. 더는 돌아갈 수 없어.’

달리아는 결심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그 부탁, 들어 드릴게요.”

“아주 좋아.”

율리시즈가 달리아를 품에 꼬옥 껴안았다. 달리아는 양심에서 피어나는 질문의 싹을 잘라 내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전하의 말만 잘 들으면 전하는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실 거야. 그거면 돼.’

결혼식까지 앞으로 일주일.

달리아의 화려한 제2의 인생까지 앞으로 일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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