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110화
“이블린 왔니?”
집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건 헨리와 금희였다. 내가 이 집의 진짜 딸이 된 이후부터 금희는 내 방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었다.
나는 금희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며 헨리에게 물었다.
“나 왔어. 저녁 뭐야?”
“우리 딸이 좋아하는 양고기.”
맛있겠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에 배가 엄청 고팠다. 헨리가 내 겉옷을 받아 주며 물었다.
“딸, 혹시 어디 아프니?”
“아니, 왜?”
“뺨이 붉네. 열이 나는 거 같은데?”
헨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를 짚었다. 이마에 닿은 헨리의 손이 차가웠다.
“세상에, 정말로 열이 나네? 밖에 많이 추웠니?”
“아니? 나 원래 화가 많아서 열이 많아.”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얼버무렸다. 헨리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긴 했으나 배고프다는 내 한 마디에 일단 우리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우리 손녀딸 왔구나. 어서 앉거라.”
가장 먼저 오르페시아가 나를 맞이했다. 식사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난 얼마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벌써?”
타라가 걱정스레 물었고 나는 핑계를 대며 일어났다.
“살쪘어, 요즘.”
“뭐가 살쪄!”
“뼈랑 가죽밖에 안 남아서는, 더 먹어!”
우리집 호들갑 대마왕 헨리와 아실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입맛이 없던 나는 가족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금희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소피, 바로 목욕물 좀 준비해 줘.”
“예, 아가씨.”
온몸을 구석구석 빡빡 씻은 후에도 나는 목욕물에 한동안 더 몸을 담그고 있기로 했다.
“너무 오래 계시지 마시고요.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어우, 잔소리. 알았어.”
촤악. 커튼이 쳐지고 소피가 욕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포커 페이스는 무너졌다.
‘와씨, 제정신?’
첨벙, 첨벙. 나는 얼굴에 요란스럽게 물을 끼얹으며 절규했다.
‘욕구 불만이야? 미쳤어, 이블린? 입술 박치기부터 하면 어떡해!’
내가 미쳤었다. 술도 안 마셨고 새벽도 아닌데, 환한 대낮 마차에서 외간 남자 멱살이나 잡고 입술을 희롱하다니. 라파엘에게 고소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첨벙! 나는 목욕물에 냅다 얼굴을 박아 버렸다.
‘미쳤어, 앞으로 걔 얼굴 어떻게 봐!’
술을 먹지 않아서 실수였다고 할 수도 없다. 아직도 당황하던 라파엘의 얼굴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무리 라파엘이 날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키스 당하는 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블린, 미치려면 곱게 미쳤어야지.’
차라리 이대로 죽고만 싶었다. 창피해서 얼굴을 도무지 들 수가 없었다.
“푸하.”
잠시 후, 나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욕조에 몸을 깊숙이 담근 채 보글보글 물거품을 뿜어내며 곰곰이 생각했다.
‘일단 편지를 쓰자. 편지로 사과하는 거야.’
좋아. 그렇게 결심한 나는 욕실에서 나왔다. 화장품을 바르는 동안 소피가 내 머리를 말려 주더니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까부터 표정이 멍하신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나는 냅다 부정했다. 그런데 이게 잘못이었다.
“너무 오래 목욕하신 게 아니냐고 물어보려 했을 뿐인데요.”
젠장. 수상하고도 재밌는 냄새가 난다는 소피의 시선에 나는 시선을 슬금슬금 돌렸다. 소피는 이 재밌는 놀림거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후작님과 데이트하고 오셨지요.”
“민폐 하객룩 맞추는 데이트도 있었나?”
흥흥. 나는 어색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마저 화장품을 치덕댔다. 그러나 소피의 집요한 시선은 내가 편지를 쓰려고 책상에 앉아서도 계속되었다.
“후작님께 편지 쓰시려고요? 잉크는 이게 좋겠습니다. 말린 꽃도 넣어 보죠.”
나는 소피가 분신술이라도 익힌 줄 알았다. 소피가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가져오며 참견해 대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소피의 도움으로 꽃과 향수를 뿌린 성추행에 대한 사과 편지가 완성되었다.
“완벽하군요.”
완벽은 개뿔. 나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으며 소피에게 화풀이를 했다.
“나가!”
소피가 아쉬운 얼굴로 방을 나갔다.
하지만 소피가 나가서도 나는 제대로 된 사과의 문장을 적지 못했다. 아까 소피의 참견으로 완성된 편지라도 따라 쓸 걸, 하고 후회했지만 정신 사나운 상태에서 썼더니 뭐라고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젠장, 편지는 때려치우자.”
이 정신으로는 제대로 된 사과의 문장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잠이나 자자.’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다음에 맑고 건강한 정신으로 다시 정성 들여 사과문을 쓰는 거다.
그렇게 결심하고 침대에 엎어지려 했건만, 금희가 먼저 한가운데에서 배를 까고 자리 잡고 있었다.
“금희 비켜. 언니 누울 거야.”
우애앵.
“어허.”
애애앵.
“아니, 야. 솔직히 침대 이렇게 넓은데 너만 한가운데 누워 있는 게 말이 돼? 반띵하자니까?”
금희는 불만스러운 듯 꼬리로 시트를 탁탁 쳐 대더니 마지못해 비켜 주었다. 나는 금희가 따끈따끈하게 데워 둔 자리에 풀썩 누웠다.
편지 쓰는 것도 눕는 것도 오늘따라 힘들었다. 피곤함에 절을 대로 절은 나는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내 웨딩드레스 차림에 넋을 놓았던 라파엘의 얼굴, 내 놀림에 붉어진 라파엘의 얼굴, 내가 키스하자 은하수가 흐르듯 반짝거리던 라파엘의 푸른 눈이 떠올랐다.
‘……미쳤나 봐.’
나는 이불을 쥐어뜯으며 스스로의 상상에 학을 뗐다.
내가 왜 키스부터 갈겼을까. 결국 나는 이불을 팡팡 걷어차기 시작했고 금희는 나랑 같이 못 자겠다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한편 라파엘도 이블린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라파엘은 마차에 실려 가는 내내 멍하니 입술을 매만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집에 도착하고, 잘 준비를 마치고 나서도 라파엘은 아직까지도 꿈속에 있는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블린과 키스했다.
‘꿈인가?’
라파엘은 스스로의 뺨을 쳐 봤다.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설마 자신이 억지로 이블린을 붙잡고 한 건 아니겠지? 라파엘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고 다행스럽게도 아니었다.
이블린이 자신의 타이를 잡아당겨 직접 입술을 부딪혔고 혀까지 넣었다.
화아악, 라파엘의 얼굴이 사정없이 붉어졌다.
‘아니, 왜? 날 불편해하시는 거 아니었나?’
라파엘이 호감을 드러낼 때마다 이블린은 얼굴을 구기며 불편한 티를 냈다. 거기다 의뢰가 끝나면 더는 보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어느 순간 이블린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고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다.
그랬는데, 설마 이블린이 먼저 키스해 올 줄은 몰랐다.
이블린 스스로도 놀란 것 같기에 라파엘은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욕구 불만이신가?’
그건 아니다. 이블린은 라파엘을 단 한 번도 그런 눈으로 훑어본 적이 없었다. 뭣보다 이블린 스스로도 놀라 도망가지 않았나.
그래,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자, 라며 라파엘은 그 상황을 잊으려 했지만 심장이 여전히 튀어나올 듯 쿵쿵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이블린과 닿았던 제 입술을 더듬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웠어.’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리자 라파엘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라파엘은 침대 기둥에 쾅 머리를 박았다. 당장 이마의 아픔보다도 아까 한 키스의 감촉이 더 선명했다.
실수였든 아니든, 첫 키스의 경험은 라파엘의 상상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고, 자신이 이블린을 좋아하는 감정이 생각보다 훨씬 더 진심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또…… 해 주셨으면 좋겠다.’
* * *
이블린과 라파엘이 몽글몽글한 감정을 피워 내고 있는 한밤중이었다.
“달리아, 아비 왔다.”
헤베 백작의 목소리에 달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율리시즈의 허가 없이 달리아 스스로 열 수 없었던 문이 아주 간단하게 열리며 헤베 백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시간엔 무슨 일이세요?”
“아비가 딸 좀 보러 오면 안 되냐?”
이 시간에 노크도 없이 함부로 오니까 그러는 거다,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달리아는 말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는 달리아를 훑어보며 헤베 백작이 흡족스럽게 입을 열었다.
“못 본 새에 살이 좀 더 빠졌구나. 하기야,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데 응당 관리해야지. 네가 알아서 관리를 잘하니 아비는 마음이 놓인다.”
달리아는 지금 날이 갈수록 비쩍 마르고 있다. 지금 달리아의 모습은 좋은 말로도 건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헤베 백작은 그저 아름다운 게 좋은 거라며 껄껄 웃었다.
달리아는 의자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전하께서 부르셨나요?”
“그래. 너도 곧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될 테니 미래의 폐하께서 좀 더 큰 영지를 받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구나.”
“……더 큰 영지요?”
“그래. 이 아비도 이제 대영주가 되는 거야. 자칼리 백작령이 얼마 전 국가에 반환되었다는데, 흉년은 어차피 잠시뿐이고 곧 곡창지대로서의 명맥을 갖출 테지.”
하. 멀쩡한 헤베 백작령도 말라비틀어지게 둬 놓고, 다 죽어 가는 자칼리 백작령을 어떻게 살린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 마디 했다가는 열 마디가 넘는 비난을 들을 것이 분명하기에 대신 달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 그래. 그리고 좋은 소식도 하나 있다.”
무슨 좋은 소식? 헤베 백작이 말하는 좋은 소식이란 늘 달리아에게 나쁜 소식이었다. 달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새 부인을 맞을 참이다. 이제 너도 결혼했으니 나도 내 자유를 찾아야지. 결혼식은 조용하게 할 거다. 나도 그녀도 나이가 들어서 식을 제대로 올리고 싶어도 몸이 따라 주질 않아.”
순간 달리아는 화병으로 헤베 백작의 머리를 내치는 상상을 했다.
딸이 결혼하는데 아비라는 작자는 재혼을 하겠다? 사람들이 보면 참 좋은 말 오가겠다.
“아무튼 결혼 축하한다, 달리아. 딸을 잘 둬서 아비가 대영주도 다 되어 보는구나. 그럼 그때까지 관리 열심히 하고.”
헤베 백작은 간만에 와서는 달리아의 화를 돋우는 이야기만 잔뜩 하다 갔다.
“하. 재혼?”
헤베 백작이 나간 후, 달리아는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저런 것도 아비라고……!”
달리아는 테이블에 있는 것들을 팔로 쓸어버리려다 멈칫했다.
여기서 온전히 달리아의 것인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부술 수 없었다.
소리라도 마음껏 지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궁인들이 율리시즈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칠 것이 분명했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제 상황에 달리아는 입만 뻐끔거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몸을 꽉 죄이는 코르셋은 달리아가 거친 호흡을 내뱉는 것조차 용인하지 않았다.
“후우…… 후우…….”
여기서 또 실신할 수는 없다. 달리아는 비틀비틀 간신히 일어나 커튼이 쳐진 벽으로 향했다.
“아직, 아직 흡수해야 할 힘이 산더미야.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어…….”
율리시즈와의 결혼은 결국 달리아의 선택이었고, 달리아의 신분을 위로 올려 줄 기회였다.
‘바깥과 단절되어 요즘 돌아다니는 소문은 잘 모르지만 다들 날 무시하고 있는 게 분명해…….’
도망치는 건 옛적부터 틀렸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이 길로 아득바득 살아남아야만 했다.
사람들이 다시는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도록 높은 신분으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촤악, 커튼을 거칠게 젖힌 달리아는 표본의 유리문을 하나하나 열었다. 한 마리, 두 마리, 나비에 손을 댈 때마다 달리아의 안색은 급격히 나빠져 갔다.
‘앞으로 한 달.’
결혼식 때 분명 샬럿은 나타날 것이다. 자신은 그 전에 샬럿이 황궁으로 돌아와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단단히 각오해 놔야만 했고, 그를 위해선 힘을 키워야 했다.
설령 흑마법에 잠식돼 몸이 까맣게 말라비틀어져 간대도 말이다.
생각에 빠진 달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