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109화
귀족들에게도 율리시즈와 달리아의 결혼 소식이 닿았다.
율리시즈가 성급히 결혼식을 준비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기에 다들 불안해하고 있었다.
“헤베 영애한테 제국의 안살림을 맡겨도 되나?”
“재판장에서의 일은 꽤 볼만했지.”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 샬럿 황녀 말이에요.”
귀족들의 살롱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 한가운데에서 카밀라는 부채로 입을 가렸다. 그러자 모두의 이목이 카밀라에게로 쏠렸다. 조용한 몸짓 하나로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카밀라가 우두머리 사자처럼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웬만하면 입에 담지 말죠, 우리. 말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는 거 다들 알잖아요?”
“맞아요. 카밀라 님의 살롱에서 정치적으로 불경한 말이 오고 가는 건 좀 불쾌하네요.”
“어머, 내 마음을 알아주는군요? 역시 마그리타 양.”
“제 마음이 카밀라 님 마음이죠.”
경합 때만 해도 마그리타는 카밀라에게 좋은 감정을 품지 않았다. 마그리타의 파혼 원인이 카밀라와 빅터의 바람이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마그리타가 마음에 들었던 카밀라가 경합이 끝난 후 자신이 아는 가장 괜찮은 남자를 마그리타에게 소개시켜 준 결과, 둘은 이렇게 살롱의 호랑이와 여우가 되었다.
대화의 주제는 사업으로 돌아갔다.
카밀라는 때때로 질문에 대답을 해 주면서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따돌림 당하지 않는 이상 중앙 세력들은 샬럿 황녀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보면 되겠군.’
라파엘이라면 결혼식 때 샬럿 황녀의 존재를 터뜨릴 거다. 그렇게 된다면 율리시즈가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샬럿의 귀환을 모두가 알 수밖에 없다.
유폐 당한 황녀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율리시즈가 경계하겠냐마는, 아무리 유폐 당했다고 해도 그 명령을 내린 황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황녀에게도 자연스럽게 황위 계승권이 돌아가게 된다. 그게 상드리움의 법이었다.
‘샬럿 황녀가 공식적으로 황위 계승권을 얻게 되면 황제 폐하가 계신 곳까지 발걸음하는 건 일도 아닐 테고…… 율리시즈 황태자와 헤베 영애의 몰락은 정해져 있겠네.’
아, 불쌍한 헤베 영애. 괜히 아군을 잘못 선택한 바람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할 뿐만이 아니라 목까지 날아가겠구나.
카밀라는 마왕성에 갇힌 불쌍한 공주님을 동정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 * *
“라파엘.”
“예, 공녀님.”
“결혼식까지 앞으로 한 달도 안 남은 거 알지?”
“물론 알죠.”
라파엘의 잔망스러운 눈망울에 내 이성이 빠직 끊겼다. 아는 놈이 이래? 나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라파엘을 닦달했다.
“지금 옷 보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아?”
“이왕 벌어진 거 어쩌겠습니까. 예쁜 옷이라도 입어야죠.”
맞는 말이긴 하다. 귀족들은 걸치는 것까지 재산 자랑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부티크나 와서 카탈로그나 보고 있는 건 성질 급한 K―이블린에겐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집에 있어도 딱히 할 일은 없지만.’
마법을 익히고 싶어도 유다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지, 나비를 더 찾고 싶어도 내 남은 나비는 오베론과 달리아가 나눠 가지고 있지.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부티크에서 라파엘과 민폐 하객룩 맞추기뿐이었다. 그때, 라파엘이 가장 화려한 디자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좋겠군요.”
“……나 하얀색 안 받는데.”
“왜죠?”
내 말에 라파엘이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안 받는 건 안 받는 거지, 왜라고 할 게 있나.
‘솔직히 안 어울린다는 건 오바긴 하지. 피부만 놓고 보면 여름 쿨톤이니까 안 어울릴 수도 없고.’
그렇지만 나는 이블린이 되어서 단 한 번도 흰색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남들은 다 하얀 잠옷 입고 잘 때도 나는 검은 잠옷 입고 잤고, 하물며 침구도 검은색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진짜 이블린은 검은색이 취향이었고, 나는 금희 털 때문이었다. 검은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는 흰옷을 못 입는다.
무엇보다 악녀가 흰옷이라니? 웨딩드레스도 검은색으로 맞출 것만 같은 이블린 프라비체가 흰옷을 입는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아, 진짜 하얀색 안 받을 것 같은데.”
악녀의 품위가 상할까 푸념하는 나를 보며 라파엘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직원에게 손짓했다.
내게 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명령받은 직원은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10분 정도 지났을까. 직원은 하얀 드레스가 여러 벌 걸린 행거를 끌고 왔다.
“뭐야, 너 뭔 말 했어.”
“그냥 하얀 드레스 입을 수 있는 건 다 가져오라고요.”
“이놈이 또 쓸데없는 짓을? 그럴 시간에 네 향수 정보나 알려 달라니까?”
“향수 안 씁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 이제 대놓고 거짓말한다.
라파엘은 도망치듯 일어서더니, 행거에 걸린 드레스를 하나하나 살펴보다 가장 눈에 띄는 디자인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이 디자인 공녀님 취향이군요.”
라파엘이 라파에몽이 된 지도 거의 반년. 척하면 척 내 취향을 맞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도 이건 거의 웨딩드레스 아니야?”
“뭐 어떻습니까. 실제로 이걸 입고 갈 것도 아니고 흰색이 잘 어울리는지 보기만 할 뿐인데요. 그리고 분명 잘 어울리실 겁니다.”
말은 잘하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입고 싶긴 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도 살면서 웨딩드레스 한 번쯤은 입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못 이기는 척 손을 내밀었다. 라파엘이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별로면 그냥 나올 거야.”
“예.”
라파엘은 뭐 그리 신나는지 생글생글 웃었다. 그 모습이 괜히 얄미워 나는 신경질적으로 피팅룸을 닫았다. 환복을 위해 따라 들어온 직원이 소곤거렸다.
“어쩜, 후작님께선 너무 자상하시네요. 두 분이선 좋은 소식 없으신가요?”
“그런 말 마. 우리 아빠가 들으면 기절해.”
프라비체 소유의 부티크 직원이라 그런지 그녀는 찰떡같이 알아듣곤 더 물어보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나한테는 좋은 아빠여도 남들한테는 그냥 악덕 상사였으니까.
‘아빠, 미안…….’
직원의 손이 착착착 빠르게 움직였다.
새삼 생각하지만 예식용 드레스는 입는 것도 힘든 편이었다. 밀려드는 갑갑함에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이 시대에도 코르셋 비슷한 건 있다. 다만 내장과 갈비뼈를 짓눌러 허리를 얇게 만드는 용도는 아니고, 군살 정리 및 허리를 꼿꼿하게 펴 주는 용도였다.
‘중세 사람들 진짜 리스펙이다. 어떻게 이것보다 더한 걸 걸치고 지냈냐.’
뭐, 사회가 눈치 주니까 눈물 흘리면서 했어야겠지…….
다행히 샘플 드레스라 해도 내 사이즈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드레스에 몸을 욱여넣지 않아도 되었다. 직원이 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고는 말했다.
“다 되었어요. 어떠세요, 공녀님?”
“오…….”
솔직히 이 얼굴에 안 어울리는 색이 어딨겠냐마는, 하얀 옷을 입은 악녀는 상상이 가지 않아 불안했었다.
그런데 이 미모에 불안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 나는 그 말의 산증인이었다.
‘천사가 따로 없네, 아주.’
나는 거울을 이리저리 살피며 내 미모와 하얀 드레스의 조화에 감탄을 뱉어 냈다. 그러다 문득 나를 좋아하는 라파엘이 내 천사 같은 모습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빨리 커튼 걷어 봐.”
“네, 공녀님.”
촤악. 커튼이 열리자마자 라파엘의 놀란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역시 내 미모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괜히 장난기가 솟아올라 나는 개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
나는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한껏 예쁜 척을 떨었다.
“마음껏 감탄하도록 해.”
눈을 감고 내 미모를 자랑하고 있는데 놀라울 만큼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어, 그러고 보니 이거 왠지 결혼 전 웨딩드레스를 피팅해 보는 예비 신부와 신랑 같은 상황 아닌가?
민망해진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런데 라파엘은 내가 아까 본 얼굴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파엘?”
라파엘은 여전히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고, 눈을 뜬 채로 기절한 듯 눈꺼풀도 깜빡이질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깨달았다.
“야, 숨 쉬어!”
라파엘 얘는 정말로 내 미모에 놀라 숨 쉬는 법도 까먹은 거다.
* * *
“기절했대요.”
나는 라파엘을 놀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부티크를 나와서도 나는 라파엘의 주위를 이리저리 맴돌며 라파엘을 놀렸고, 라파엘은 얼굴을 붉혔다.
“그만 좀 하세요!”
“야, 내가 그렇게 예뻤니? 하여튼, 천하의 라파엘도 내 미모 앞에서는 껌뻑 죽는구나? 미인계에 약한 타입인 줄은 몰랐네.”
깔깔깔. 내 웃음소리가 높아질수록 라파엘의 수치심은 짙어져 갔다.
라파엘의 붉은 얼굴은 보기 드물다. 나는 라파엘의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 고개를 요리조리 기울였고, 라파엘은 내게서 시선을 돌리려 필사적이었다.
“예, 예! 공녀님의 미모가 아름다워 잠시 넋을 놓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놀리세요!”
“싫은데? 이렇게 재밌는데 왜 그만 놀려야 돼?”
“제발요.”
“제발요, 상드리움 최강 귀염둥이 사랑둥이 미녀 이블린 님. 해 봐.”
내 당당한 요구에 라파엘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사고친 직후의 금희처럼 뻔뻔하게 왜, 뭐, 하는 눈빛으로 되돌려 주었다.
“왜, 문제 있어?”
“……없어서 문제죠.”
“그 말은 내가 상드리움 최강 귀염둥이 사랑둥이 미녀라는 말에 반박할 게 없다는 뜻이지?”
라파엘이 미간을 짚는 척 얼굴을 가렸다. 그래 봤자 나는 라파엘을 올려다보는 입장이었기에 그가 내 넘칠 듯한 귀여움을 참느라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걸 다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걸음을 빨리했고, 마차에 다 와서 나는 투덜거렸다.
“아니, 생각해 보니 웃기네. 넌 나랑 데이트도 하고 돈도 받고. 이게 무슨 횡재야? 나머지 250골든은 내가 받아야 되는 거 아냐?”
“드릴까요?”
라파엘이 문을 열어 주며 냉큼 대답했다. 덕분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설마 진짜 준다고 할 줄은 몰랐다. 물론 준다면 받긴 하겠지만 라파엘이 주는 돈은 깨끗한 돈인지조차 의심스럽기에 살짝 꺼려진다.
‘여태 가족들도 나한테 세금 안 뗀 돈 주긴 했을 텐데.’
나는 짧은 고민을 끝냈다.
어차피 가족은 가족이고 남은 남이다.
“됐어. 헛소리 마.”
나는 라파엘을 새침하게 무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라파엘이 맞은편에 앉자 마차는 바로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진짜 향수 뭐 써?”
“안 쓴다니까요.”
따위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던 도중이었다.
끼이익.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길고양이가 뛰어드는 바람에……! 괜찮으십니까?”
마부의 사과가 들렸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라파엘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마차가 갑자기 멈춰선 반동으로 의자에서 미끄러진 나를 잡아 주었다. 그사이에 라파엘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향기가…….’
깨끗한 박하향과 비누향, 따스한 햇살 냄새가 훅 풍겼다. 라파엘의 당황한 얼굴은 아직까지도 붉어져 있었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어도 우리 둘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서로의 눈 안에 서로를 가두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 라파엘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를 제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괜찮…….”
내가 대답을 잇지 못한 건 내 가슴이 터져라 쿵쿵 울려 대는 심장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보고 만 것이다. 라파엘의 목덜미가 무척이나 붉어진 것을.
그리고 내가 그의 타이를 잡아당긴 것은 아주 충동적인 일이었다.
박하사탕 맛이 훅 입안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