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108화
딸꾹. 하필이면 또 딸꾹질이 터졌다. 달리아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말씀을, 흐끅.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달리아는 울먹이며 잡아뗐다. 평소의 율리시즈였다면 여기서 달리아의 거짓말을 모른 척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율리시즈가 목에서 피가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들었냐고 내가 지금 묻고 있잖아!”
고압적인 태도에 달리아가 움츠러들었다.
율리시즈의 폭력적인 성격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고, 이전에도 간간이 겪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이러다 정말 율리시즈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달리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너무 무서워 대답도 못 하고 있으니 율리시즈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역시 그대였구나, 달리아.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해?”
“거,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았…….”
“지금도!”
움찔. 달리아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율리시즈는 시트로 시선을 내린 달리아의 턱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재판 때 샬럿에게 맞아 난 상처와, 스스로 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너무 아팠다.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고통 따위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으르렁거렸다.
“달리아. 내가 황제의 친자든 아니든, 황태자는 나고 앞으로도 나일 거다. 그리고 너는 내 비가 되고 황후가 되어 제국을 다스리게 되겠지. 설마 개고생 해 가며 얻은 기회를 발로 찰 건가?”
“아, 아니에요. 안 그래요. 약속, 흐끅. 할게요!”
달리아는 거의 빌듯이 외쳤다. 그럼에도 율리시즈의 신뢰는 얻을 수 없었다.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방을 둘러 보았다.
항상 커튼에 가려져 있던 벽 속,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보라색 나비 표본이 보였다.
재판 때 달리아가 흑마법 심판을 받길 거부했던 모습이 율리시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달리아, 혹시나 해서 묻는데.”
율리시즈의 눈에 비열함이 깃들었다.
“그대, 흑마법사가 되었나?”
달리아의 동공이 작아졌고, 율리시즈는 환희했다.
‘역시. 달리아는 흑마법사가 맞았어. 우리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이거였다. 달리아가 마탑에 있었을 때부터 계속 숨기고자 했던 게 바로 이거였다!
이로써 서로 들키면 안 되는 약점을 하나씩 잡았다.
‘아냐, 이 정도로는 부족해.’
율리시즈가 꿍꿍이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달리아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뭐, 뭐하는 거예요!”
달리아가 겁에 질려 소리쳤지만 율리시즈는 듣지 않았다.
달리아는 이내 지금 율리시즈가 자신을 끌고 가는 곳이 황제의 침실임을 깨달았다.
쿵! 털썩.
황제의 침실에 처넣어지듯이 들어온 달리아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아픔보다도 지금 이 상황이 무서웠다. 달리아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율리시즈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도대체 무슨…….”
그러자 율리시즈가 차갑게 웃으며 명령했다.
“폐하께 저주를 걸어.”
“……네?”
“폐하께 저주를 걸라고.”
율리시즈가 짜증난다는 듯이 달리아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재차 말했다.
“읏……!”
달리아는 반발하려 들었지만 율리시즈에게 대들기엔 어림도 없는 힘이었다.
율리시즈는 두려움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하는 달리아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내 말 들어라. 이게 흑마법사인 그대와 황제의 친자가 아닌 내가 둘 다 살아남는 방법이야.”
어서. 율리시즈가 조용히 재촉했다.
마치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기분이었다.
“흐윽…… 윽…….”
결국 달리아는 울면서, 황제에게 영원한 잠의 저주를 걸었다.
그리고 마치 포상을 내리듯, 율리시즈는 눈물로 얼룩진 달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인자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사람들과 만나지 말거라.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 * *
“둘이 무슨 사이야?”
내 물음에 라파엘은 얼굴을 찌푸렸고, 샬럿은 싱글싱글 웃으며 역으로 내게 물었다.
“무슨 사이 같아?”
심지어 소파 뒤로 와 라파엘의 머리에 팔을 얹고 있었다.
‘지금 남의 노예한테 뭐하는 거야?’
황녀고 나발이고 권력을 휘둘러 주려던 차였다. 라파엘이 질색하며 샬럿을 거칠게 밀어냈다.
“친한 척 그만하십시오.”
‘잘한다, 내 노예!’
나는 눈썹에 힘을 빡 주고 라파엘에게 응원을 보냈다. 샬럿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라파엘을 힐난했다.
“너 내가 창피하니?”
“조금 많이요.”
라파엘이 샬럿을 외면하고 내게 오해 말라는 얼굴로 못을 박았다.
“그냥 제 수많은 거래처 중 하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샬럿 황녀는 아닌 것 같은데?”
“샬럿 황녀어?”
앗차. 그만 경칭을 생략해 버렸다. 내가 프라비체 실드와 라파엘 실드를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그냥 언니라고 불러. 서운하게 황녀가 뭐니?”
“……뭐? 요?”
“아, 그래. 이참에 존대도 집어치워. 너 옛날엔 나보고 언니, 언니 하면서 엄청 잘 따랐는데 기억나니?”
당연히 ‘님’자 안 붙였다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재판에서 예비 황태자비 뺨도 치는 또라이라서 그런가, 서운한 포인트도 참 남다르네.
‘아니, 그것보다 이블린이 저 또라이한테 그랬다고? 언니라고?’
역시 프라비체의 리틀 악당은 싹부터가 달랐구나.
만약 나였으면 아무리 어린 치기로라도 샬럿을 언니라고 부르지는 못했을 거다.
나는 두 번째 제안만 받아들이기로 하고 샬럿에게 쏘아붙였다.
“언니는 무슨 언니야. 난 오빠 놈들밖에 없어.”
“남자 형제 있어서 뭐에 쓰니?”
“용돈 받는 데 쓴다, 왜.”
“그래도 언니 하나 있으면 좋아. 난 남동생 말고 여동생이 좋더라. 남동생들은 커 가면서 귀여운 맛이 없어지던데 이쁜이는 여전히 귀엽구나?”
“귀여운 건 또 알아 가지고. 그래도 안 돼.”
내 단호한 거절에 샬럿이 작게 투정을 부리며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은 쥐뿔도 소용없다는 얼굴로 샬럿을 내쫓았다.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재판에서의 일 때문인지 샬럿의 이미지는 툭 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 같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샬럿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아쉬운 내가 참아야지, 뭐.”
샬럿은 떠나기 전 내 코를 톡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잘 생각해 봐, 이쁜아. 언니가 너 도와줬으니까 말이야.”
‘어……?’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언니가 너 도와준 거야.’
그리고 아주 흐릿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이블린과 샬럿이 정말 친했나? 뭔가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궁금증을 해소할 틈도 없이 샬럿은 등장 때처럼 요란하게 문을 쿵 닫고 돌아가 버렸다. 라파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아냐, 됐어.”
아니, 잠깐만. 문득 이걸로 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중요한 게 아직 남았다.
“샬럿 방은 몇 층에 있어? 설마 내 방 내준 거 아니지?”
“공녀님의 방과 정 반대편에 있는 다락방 내어 주었습니다.”
좋아, 만족스러워. 괜히 내 라파에몽이 아니었다. 완전히 마음을 놓은 나는 샬럿 때문에 잠깐 잊고 있던 원래의 방문 목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라파엘.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예?”
“어쨌든 유폐된 황녀를 네가 데려왔으니 너도 공범인 거잖아? 황태자 놈이 너한테 해코지할 텐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일단 유다를 죽게 둘 수는 없으니 적당한 때 그를 데려와야지요. 그 뒤는 제가 샬럿 황녀에게 대가를 치르게 될 테고요.”
“대가라면?”
“별 건 아닙니다. 황제 폐하와 만나게 해 주는 게 다예요.”
하지만 황제는 지금 쓰러져 있다. 황제와 샬럿이 만나려면 황제를 치료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율리시즈는…….
라파엘은 내 생각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되겠지요. 그렇다면 의뢰는 끝이 나겠군요.”
아, 그렇지. 원작 커플이 죽으면 더 이상 내가 그들과 엮일 거리도 없어지니까. 라파엘과의 인연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의뢰가 끝나면 라파엘을 볼 일은 더 이상 없겠지.’
처음에는 의뢰가 끝나면 라파엘도 예외 없이 인연을 끊어 버리려 했다. 그런데 도움 좀 크게 받고 정이 들었는지 이제 와서 아쉬웠다.
라파엘은 묘하게 풀이 죽은 나를 위로하듯 말을 돌렸다.
“밤이 깊었군요. 돌아가실 거라면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굳이?”
“예. 공녀님을 대신해서 공작 내외분께 깨져야지요.”
이 자식, 그냥 해 본 말인데 농담을 다큐로 받네. 이래서 내가 라파엘에게 정을 붙일 수밖에 없다.
안 해도 되는 일을 굳이 해 주는데, 그것도 부모님한테 대신 혼나준다는데 안 고마워할 수가 있나.
‘하여튼 은근 착한 놈이라니까.’
나는 복잡미묘한 심경으로 씨익 웃으며 라파엘의 손을 잡았다.
“그래. 가자.”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깔루아 밀크 탓에 취기가 돌았는지, 나는 발을 헛디뎠다.
“어어!”
어차피 넘어져도 소파 위로 넘어지겠지만 드레스를 입은 채로 넘어지면 제대로 일어서는 것도 광대 짓이 된다.
라파엘의 앞에서 쪽팔린 꼴 많이 보였지만 드레스 자락에 허우적대는 모습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하, 그래. 어차피 나중에 인연 끊길 거, 내가 웃긴 추억 하나 만들어 준다.’
나는 희생정신을 발휘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
나 왜 안 넘어졌지? 무언가 나를 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며 눈을 떠 보니 라파엘이 나를 잡아 주고 있었다.
“조심히 일어나세요.”
“어, 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두근두근. 전에도 느꼈지만 라파엘한테서는 깨끗하고 시원한 비누 향이 났다.
내가 바로 서지 않고 한참을 품에 안겨 있으니 라파엘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공녀님?”
한밤중이고, 취기도 살짝 돈다. 그리고 단둘뿐이며, 내 마음은 이전에 비해 훨씬 편해졌다. 나는 나지막이 라파엘의 이름을 불렀다.
“라파엘.”
“예.”
라파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평소와 다른 내 목소리에 그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계약이 끝내기 전에 알아채서 다행이었다.
내가 입을 열려던 그 순간, 라파엘 역시 나와 똑같이 입을 열었다.
“너 향수 뭐 써?”
“조금 더 다가가도 되겠습…… 뭐라고요?”
라파엘이 쓰는 향수 물어보는 걸 까먹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