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06)화 (106/154)

106화 - 106화

한바탕 쇼핑을 마치니 벌써 하늘이 거대한 무지갯빛으로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실의 경쟁사가 될 곳이라는 디저트 가게로 왔다. 예약을 미리 했는지 손님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메뉴에 있는 거 하나씩 테이블로.”

아실이 자연스럽게 주문을 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실을 불렀다.

“……아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응?”

“레시피 훔치지 마.”

개인 가게 레시피 훔쳐서 승승장구하는 대기업은 세상에 널렸다. 혹시라도 아실이 그런 창피한 짓을 할까 경고했는데, 아실이 기함을 토했다.

“이블린! 오빠가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 보여!?”

“응.”

아실이 반박하려다 평소의 제 이미지를 떠올렸는지 약간 주춤했다. 점점 뾰족해져 가는 내 눈빛에 아실이 다급히 변명했다.

“체면이 있지, 그런 짓은 안 해! 애초에 그럴 수 있는 미각도 없어!”

있는 놈이 더하다고 완전한 자본주의가는 체면도 뭣도 없다. 프라비체 일가는 체면을 챙긴다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가득 티세트가 마련되었다. 나는 얼그레이 케이크를 가장 먼저 집어 들었다.

“어때, 맛있니?”

“괜찮네.”

맛있다는 의미로 말한 건데 어쩐지 아실과 헨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문득 헨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까 부티크에 손수건을 놓고 왔네! 우리 딸, 조금만 기다려. 아빠 금방 올게!”

“나, 나도! 난 장갑 두고 왔어!”

주머니에 구멍이 뚫렸나, 안 그러던 인간들이 뭘 그렇게 흘리고 다녀. 나는 건성건성 그래라, 하며 마저 케이크를 조각냈다.

“…….”

사실 나는 아까 부티크에서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부티크에 한발 먼저 와 있던 귀족들의 대화를 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재판장에 샬럿 황녀가 나타났다는 말이 있던데요.’

‘설마요. 유폐 당한 황녀가 무슨 재주로 여기로 와요?’

그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갑자기 라파엘이 떠올랐다.

샬럿을 데리고 온 건 라파엘이다. 물론 율리시즈가 그걸 알아낼 리는 없겠지만 달리아나 오베론은 다르다.

그들은 마법사인 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들이니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라파엘은 괜찮으려나?’

들키면 아예 대놓고 황실 서열 싸움에 끼어들게 되는 것이다.

샬럿은 척 보기에도 입이 무거워 보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미 율리시즈에게 라파엘이 데려왔다는 말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고작 하루뿐이지만 라파엘에게서 들려오는 소식도 없어서 혹시라도 율리시즈에게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지. 라파엘이 율리시즈 놈한테 왜 당해?’

아무리 신분제 사회에선 황족이 짱이라 해도 샬럿을 데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라파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끄응 골머리를 앓았다.

‘괜히 나 때문에 율리시즈랑 이래저래 얽히게 되네.”

라파엘은 파그라시움의 원칙 중 하나로 내세울 만큼 황실과 엮이기 싫어한다.

그런데 나 때문에 복잡하고 귀찮은 일에 엮이게 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양심이 없다 해도 말이다.

“그렇게 걱정되면 가 보지 그러냐?”

“어?”

더글러스가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혹시 생각이라도 읽혔나. 나는 일단 시치미를 떼 보았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셀레스티안 후작이 걱정되는 것 아니냐.”

“내가?”

더글러스가 이 정도로 눈치가 빨랐나?

당황스러워하는 내게 더글러스가 케이크를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서 아까부터 케이크도 깨작깨작 먹고 있고. 틀리냐?”

시선을 내려보니 쥐가 파먹은 것처럼 옹졸하고 귀여운 포크 자국이 나 있는 케이크가 보였다. 나도 모르고 있었다.

분명 아까부터 부지런히 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지.

“넌 고민거리가 있으면 먹는 것부터 티가 나더구나.”

소름 돋게 왜 그런 걸 알고 있어? 나는 혈육을 향한 약간의 경멸을 담은 눈으로 더글러스를 바라보았다. 더글러스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넌 옛날부터 툭하면 먹는 것 가지고 시위를 했다.”

습…… 이블린이 또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었네.

더글러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영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실제로 프라비체 일가는 라파엘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내 생각이 맞을 거다.

그래도 사람이 기브 앤 테이크는 정확히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선수를 치려던 그때였다.

“아버지께는 내가 알아서 잘 말씀 드릴 테니 가 봐라.”

더글러스가 내게 생각도 못 한 말을 건넸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썹을 찌푸리니 더글러스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잘 말할 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뭐 잘못 먹었어?”

“오늘 내내 너랑 같은 음식 먹었다.”

이 새끼가. 말을 해도 꼭 얄밉게 해요. 나는 포크로 더글러스를 가리키며 비아냥거렸다.

“나 보냈다간 너 아빠한테 등짝 맞는다. 안 그래도 할머니가 라파엘 가지고 한탕 난리쳤다는 얘기 다 들었는데.”

“아버지 손맛이 어머니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하진 않는다.”

“……너 엄마한테도 맞았어?”

“……어머니한테서 검을 배웠으니 안 맞을 수가 없지.”

더글러스는 트라우마가 자극된 듯 포크를 내려놓고 창백한 낯으로 대답했다.

새삼 나와 아실은 정말 곱게 자랐구나, 느껴졌다. 어쩌면 더글러스가 타라에게 굴려지는 모습을 보고 아실이 사업가로 노선을 튼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섣불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글러스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부채를 진 기분이 싫기 때문이다.

더글러스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아주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자칼리 백작령에 흉년이 들었다더군.”

“……벌써? 가 아니고 그래?”

“이미 알고 있던 거군, 역시.”

룰루. 나는 슬쩍 휘파람을 불며 대답을 피했다. 하기야, 타라와 헨리도 이블린이 어려서부터 흑마법사인 걸 알고 있었다.

더글러스와 아실까지 모르는 게 이상하다. 더글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그 땅은 이제 완전 못쓰는 땅이 되었더군. 만약 계속 갖고 있었다면 큰 손해를 봤어야 했겠지. 네 덕분이다, 이블린.”

“그래서 그거랑 이거랑 퉁 치자고?”

“그래.”

“그렇다기엔 너무 손해 아냐? 내가 너한테 엘라 남작령을 준 것도 아닌데.”

“가족이니까 상관없다.”

더글러스 이 새끼, 사업했으면 망했겠는걸. 이렇게 손익 계산이 안 되어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다르게 몸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선 후였다.

“아빠한테 말 잘해 놔.”

“그래.”

“그리고 나 마차 없으니까 저거 타고 갈게. 너희는 알아서 삯마차 불러서 가든지 해.”

“그래라.”

“……삯마차 타는 법은 알아?”

나는 혹시 몰라 물었다. 그러자 더글러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보단 많이 타 봤을 거다. 끽해야 가출했을 때 한 번 타 본 녀석이.”

귀신같이 잘 아네.

실제로 나는 삯마차 타고 가출했었다.

아무튼 내가 더글러스를 걱정할 거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서기 전 더글러스에게 말했다.

“고마워, 더글러스.”

“알면 됐다.”

얼른 가기나 하라는 듯 더글러스가 고개를 홱 돌리고 훠이훠이 손짓을 했다.

하여튼 츤데레 자식. 저런 면모가 귀여워 보일 만도 한데, 끝까지 폼 잡는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역시 내가 더글러스를 혈육으로 보고 있긴 한가 보다.

나는 가게를 나와 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라파엘네 저택으로 가 줘.”

* * *

라파엘의 저택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저택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라파엘이 흐트러진 머리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공녀님?”

“아, 왔어?”

나는 태평하게 손을 흔들며 라파엘을 맞이했다. 이미 한 번 가출한 전적이 있어서 그런가, 라파엘은 온몸으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걱정스레 물었다.

“어, 어떻게 또 여기 계시죠? 설마…….”

라파엘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장난치고 싶다. 나는 입을 비죽였다.

“왜,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그게 아니라, 얼마든지 머무셔도 됩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괜찮냐는 거예요.”

라파엘이 저렇게 말을 더듬는 건 처음 봤다.

내가 좋은 일로 라파엘의 저택을 찾는 일이 없긴 했지. 나는 일부러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안 괜찮아.”

라파엘이 내게 다가오더니 내 앞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날 걱정하는 눈빛에 침울한 척이 저절로 풀릴 뻔했기에 서둘러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라파엘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진짜?”

“예. 의뢰는 완수해야지요.”

웃긴다. 의뢰 때문이 아니라 날 좋아해서 그런 주제에.

놀리는 건 이쯤 할까. 생각보다 너무 괜찮아 보여서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웃겨서 나온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나 대신 아빠한테 좀 혼나 줘.”

“……예?”

“아빠랑 오빠 놈들이랑 쇼핑하다가 너 걱정돼서 말도 없이 와 버렸어. 아마 내일 집 들어가면 뒤지게 혼날 거야.”

나는 양손을 내려 눈만 빼꼼 내밀었다. 배신 당했다는 라파엘의 얼굴에 저절로 눈이 개구지게 접혔다.

“속았지?”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라파엘이 허탈하게 중얼거렸고 나는 버럭 화를 냈다.

“뭐가 이상했는데? 내 연기는 완벽했거든?”

“연기 쪽은 그럭저럭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냥 제가 공작님께 들은 이야기와는 조금 다라서 의아했을 뿐이에요.”

“뭘 들었기에?”

“뭐, 이것저것요.”

이 연기의 실패 원인은 엄마였단 말인가.

나는 쳇, 혀를 차며 움츠렸던 자세를 펴고 발을 쭉 펴고 앉았다. 내 숙련된 노예 라파엘이 일어서며 마실 거리를 준비하러 갔다.

“밤이니 데운 우유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장난해? 밤이면 당연히 술이지.”

“주무셔야죠.”

술이나 데운 우유나 똑같이 마시면 잠이 오곤 했다. 내 고집에 라파엘은 한숨을 푹 쉬며 따뜻하게 데운 깔루아 밀크를 가져왔다.

“오, 센스 있네?”

“감사합니다.”

나는 달달하고 따뜻한 술 겸 우유를 호로록 마시며 라파엘을 칭찬했다. 라파엘이 내 대각선 쪽에 앉아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왜 오신 겁니까?”

“어쩐지 별로 환영하지 않는 말투다? 설마 내 방 벌써 없앴니?”

“환영이야 하죠. 공녀님께서 쓰시던 방도 잘 관리해 뒀습니다. 표정이 괜찮으신 걸 보면 부모님과 잘 화해하신 모양인데, 굳이 제 걱정을 하느라 부모님을 또 걱정시킬 필요가 있으셨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있지.”

나는 라파엘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

“너 황실이랑 엮이기 싫어하잖아. 그런데 나 때문에 팔자에도 없이 황실이랑 휘말리게 됐는데, 양심이 있으면 와야지.”

내 말에 라파엘이 놀란 듯 입이 살짝 벌어졌다. 묘하게 감동 받은 얼굴이기도 했다.

하긴 자기가 좋아하는 초절정 미인 이블린 프라비체가 자기를 걱정해서 와 줬는데 감동 받지 않은 게 이상하다. 나는 따뜻한 컵을 양손으로 꽈악 쥔 채 물었다.

“샬럿 황녀는 지금 어떻게 됐어?”

“황궁 측에서 데려갔습니다. 아마 지금쯤 감옥에 있겠군요.”

뭐야, 이 새끼. 지가 데려온 인간이 감옥에 있다는데 왜 이렇게 태연해?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머, 이쁜이가 왔다기에 와 봤더니, 나를 찾고 있네? 기특하기도 해라.”

“……?”

묘하게 광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샬럿이 어느샌가 응접실에 들어와 있었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게 샬럿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이쁜아. 우리 또 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