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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05)화 (105/154)

105화 - 105화

재판이 끝났다.

당연히 나의 승소였다.

샬럿의 등장으로 인해 율리시즈는 급하게 재판을 끝내도록 명령했다.

웬만하면 라파엘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오고 싶었지만, 재판이 끝나자마자 가족들에게 연행되다시피 돌아와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블린, 벌써 일어났어? 좀 더 자지 않고.”

내가 웬일로 점심 전에 일어나 식당으로 나오자 헨리가 후다닥 뛰쳐나와 걱정스레 말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만큼 잤어.”

평소에는 점심에 일어나도 몸이 무거웠는데 무거운 고민 하나가 줄어 집이 집다워진 덕일까. 아주 간만에 푹 잤다.

나는 자연스럽게 더글러스의 자리까지 다가가 그의 의자를 발로 툭툭 쳤다. 더글러스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왜, 뭐. 원래 내 자리잖아.”

“……완전히 멀쩡해졌나 보군.”

더글러스가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다는 듯한 썩은 얼굴로 자리를 비켰다.

내가 자리를 갈취한 걸로 보이지만 사실은 더글러스가 내 자리를 갈취한 것이니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상석에 가장 가까운 자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블린의 자리였으니까.

맞은편에 앉은 오르페시아 부부가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느냐?”

“응. 할머니 할아버지도 좋은 아침.”

“어제 재판 수고 많았다. 저녁도 못 먹고 잤다던데, 배고프지? 얼른 먹자꾸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포크를 들었다. 가장 먼저 샐러드와 생연어를 집어 먹으니 아실이 놀랬다.

“이블린, 너…….”

아실이 무슨 말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블린은 생연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입맛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하려나?

“오늘은 디저트 배 남겨놔야 해. 알았지?”

“…….”

그 얘기였냐.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뭐 만들었는데?”

“크림브륄레.”

“나쁘지 않네.”

사실 완전 좋아한다. 그럼에도 툴툴댄 이유는 이블린 흉내가 아니라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구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맛있게 잘 먹기였다.

오늘따라 입맛이 좋았던 내 입은 쉴 새가 없었다. 더글러스가 한 마디 했다.

“천천히 좀 먹어라.”

소식가인 내가 간만에 많이 먹는 건데 그걸 또 핀잔을 주네. 물론 참지는 않았다.

“이미 세 접시째 먹고 있는 놈이.”

난 아직 한 접시째였다.

더글러스는 이 집안 유일한 대식가다. 헨리는 중년이 되며 뱃살 나오면 안 된다고 조절 중이었고, 타라와 아실은 적당히 많이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아실이 만든 디저트가 나왔다. 한 입 떠먹기도 전에 아실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때, 이블린? 맛있어?”

“아직 먹지도 않았어.”

하여튼 아실 성질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 아실의 재촉에 나는 설탕 코팅을 경쾌하게 깨트리고 작게 한입 먹었다. 맛이 꽤 괜찮았다.

“맛있네.”

“그렇지? 이 기회에 오빠 디저트 브랜드 하나 더 만들까?”

여기 경제생태계의 황소개구리가 있다. 아주 그냥 다 먹어 치워라.

나를 낚으려 했던 아실은 의도치 않게 헨리를 낚았다.

“좋겠네, 그거. 이블린이랑 쇼핑하고 아실네 디저트 가게에서 수다 떨면 딱이겠어.”

“아빠는 초대 안 했는데.”

아실이 쌀쌀맞게 거절했다. 나도 모르게 깔깔 웃음이 터졌다.

“내친김에 오늘 좀 나갈까? 아빠랑 쇼핑 좀 하고 아실이 들일 가게 자리 좀 알아보자.”

재판도 끝났겠다, 가족들과의 응어리도 풀었겠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나는 자비를 베풀었다. 내 자비에 우리집 남정네들(더글러스 제외)이 기뻐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오르페시아 부부에게도 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오늘 뭐해?”

“노인네들이야 할 일이 무어 있겠느냐. 우리는 오랜만에 타라와 시간 좀 보내련다.”

“그러든가요.”

타라가 덤덤하게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말은 저래도 살짝 기뻐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황실 쪽은 어떻게 되어 가지? 내 재판은 끝났어도 황실은 이래저래 시끄러울 것이다. 나는 타라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엄마. 어제 샬럿 황녀가 돌아왔잖아.”

“아, 그랬지.”

“……유폐 당한 황녀를 데려온 건 결국 라파엘인데, 둘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내 질문에 식당이 싸악 가라앉았다. 다들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긴 한데 직접 말하기 꺼려지는 것 같았다.

타라는 내게 굳이 알려 들 필요는 없다며 경고했다.

“이블린. 앞으로 당분간은 라파엘과 엮이지 말거라.”

“뭐?”

“이 이상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샬럿 황녀를 데리고 온 건 셀레스티안 후작이다. 그러니 책임 역시 그가 응당 져야 해.”

“그래도 날 도와주려고 그런 거잖아.”

“이블린.”

타라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 말고는 딱히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수 있었다.

너까지 잃고 싶지 않다, 이런 말일 것 같았다.

여태 내가 친 사고를 떠올리니 입을 다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지니 헨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자자, 딸. 이제 그만 일어나자! 지금부터 나갈 준비 해도 늦었어!”

“오빠도 나갈 준비하고 올게!”

다들 내 기분 하나에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안쓰럽고도 고마웠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우리집 남정네들에게 말했다.

“알았어. 다들 준비하고 나와.”

“……그럼 나도.”

더글러스가 따라 일어섰다. 나는 물론 헨리와 아실까지 네가 왜? 라는 얼굴로 더글러스를 쳐다보았다.

“더글러스 너도 가니?”

“형도 가?”

더글러스가 묘하게 상처 받은 얼굴이었다. 솔직히 더글러스가 호감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따돌림 당하니 불쌍하게 느껴지긴 했다.

나는 너른 아량을 발휘하여 더글러스에게 선심을 써 주기로 했다.

“더글러스도 당연히 가겠지. 그치?”

내 물음에 더글러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윽고 더글러스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와 헨리 둘이서 부티크 스트릿을 활보하고 다닌 적은 있어도 거기에 시커먼 남정네 둘이 더 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나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텄으며 본의 아니게 골목길 깡패가 된 심정을 맛보았다.

“야, 눈에 힘 풀어.”

“그게 됐으면 진작 했다.”

“형은 왜 저렇게 인상이 더럽나 몰라.”

“아실 너 지금 네 엄마 욕했니?”

헨리가 발끈했다. 하기야, 더글러스가 타라를 좀 닮았어야지. 만약 여기가 집이었다면 아실은 헨리한테 등짝을 얻어맞았을 거다.

우리는 첫 번째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다 같이 오셨군요.”

“잘 지냈어? 우리 딸 재판 끝난 기념으로 옷 좀 사 주러 왔어.”

헨리가 내 어깨를 살포시 잡으며 웃었다. 샬럿 황녀의 존재는 철저히 가려졌지만 내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 앞에 디자이너는 내 무죄 판결을 축하해 주었다.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공녀님.”

“뭐, 꽤 고생했지.”

하루 동안 귀족 전용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까.

소파에 앉으니 직원들이 알아서 카탈로그를 바쳤다. 나는 천천히 카탈로그를 둘러 보았다.

“이거 예쁘다, 이블린.”

“그러네. 딸이랑 잘 어울리겠어.”

아실과 헨리는 내가 좋아할 만한 옷을 단번에 알아보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조금 다른 걸 사 보고 싶어졌다. 아무리 좋아하는 옷이 있어도 같은 스타일만 내내 입으면 좀 질리지 않겠나.

‘그렇다고 또 너무 얌전하고 유치한 건 싫단 말이지.’

뭐가 나랑 어울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더글러스가 대뜸 다른 카탈로그를 보여 주며 말을 걸었다.

“이건 어떠냐.”

더글러스가 보여 준 건 밑단이 풍성한 머메이드 라인의 드레스였다. 헨리와 아실이 핀잔을 주었다.

“얘, 너는 동생 취향도 모르니?”

“이건 이블린이 싫어하는 홀터넥 스타일이잖아. 그치? 이블린은 홀터넥보다는 목걸이를 화려한 걸 하는 걸 더 좋아하지?”

선생님은 내 편이죠, 그쵸? 아실이 유치원생처럼 편가르기 싸움을 하듯 내게 물었다.

나는 흠, 눈썹을 들어 올리며 디자인을 뜯어 보았다.

아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건 이블린의 취향이지, 나는 어느 쪽도 상관없다. 오히려 홀터넥과 이어진 오프숄더 시스루 소매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앉기도 편해 보이네.’

다행히 여기 드레스는 지구의 중세 드레스처럼 고래뼈 크리놀린을 입지 않는다.

폭신한 옷감이 방석을 대신하는 것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풍성한 드레스 탓에 미끄럼틀 타듯 의자에서 주르륵 미끄러질 뻔한 적도 있었다. 이걸 입으면 허리 좀 덜 세워도 되겠지.

“이걸로 줘.”

나는 더글러스가 고른 디자인을 가리켰다. 우리집 남자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

나는 간간이 간신배들의 조언을 듣는 왕처럼 패션에 조예가 깊은 우리집 남자들의 추천을 받아 가며 부지런히 드레스를 골랐다.

카탈로그의 마지막 장까지 넘기니 디자이너가 직원에게서 건네받은 종이를 내게 주며 물었다.

“선택하신 드레스 목록을 추려 왔습니다. 이렇게 제작 들어가면 될까요?”

“아니?”

내 대답에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사람 봐라. 내가 이것만 살 리가 없지 않은가.

“고양이용으로 한 벌씩 더 맞춰 줘. 10킬로 넘는 엄청 큰 고양이가 입을 거야.”

우리 금희, 기다려. 언니가 꼬까옷 사 들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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