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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104)화 (104/154)

104화 - 104화

파앗. 오베론이 쥔 돌이 붉게 빛났다.

흑마법 심판의 원리는 단순했다.

오로지 백마법에만 반응하는 마탑의 감별석은 마탑주가 힘을 불어넣음으로써 기능하는데, 마탑주와 연결된 사람이 만약 백마법사라면 하얗게, 흑마법사라면 검게 변한다. 만약 아무런 힘도 없다면 빛나지 않는다.

모두가 오베론의 손바닥 위 작은 돌에 집중했다.

오베론의 마력이 기분 나쁘게 내 몸을 훑고 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뱀이 몸 위를 기어 다니는 기분이라 빨리 끝내라고 하려던 그때, 오베론이 내게 속삭이며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블린?”

오베론이 서늘한 눈으로 물었다. 나는 하, 하고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너 같으면 알려 주겠니?”

“저놈이 도와준 거야?”

오베론이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오베론의 눈동자가 데구룩 굴러가 내 뒤를 노려보았다. 라파엘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작게 혀를 내밀며 얄미운 대답을 돌려주었다.

“메롱이다.”

오베론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돌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검거나 희게 변하지 않았다. 결국 오베론이 한숨을 쉬며 마력을 거두고 선언했다.

“이블린 프라비체 공녀는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말도 안 돼요!”

달리아가 떨어질 듯 난간 밖으로 몸을 내빼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감추었다.

‘고마워, 아빠!’

재판 전 아빠가 내게 준 선물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여기서 당하고만 있어야 했을 거다.

달리아가 거세게 항의했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프라비체 공녀는 분명 흑마법사……!”

“예비 전하, 내가 말했잖아요. 난 흑마법은커녕 마법도 못 쓴다니까? 마탑주께서 몸소 증명해 준 걸 왜 자꾸 뒤집으려 하죠?”

나는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렸다. 달리아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고, 나는 이때를 틈타 재판관에게 요구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한 가지 요청 사항이 있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프라비체 공녀.”

“예비 비전하께서 저를 흑마법사로 지목하셨기에 저는 흑마법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비전하 역시 흑마법 심판을 거쳐야 공평한 것 아닐까요?”

“……!”

달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달리아의 황금색 눈동자 가득 불안이 맺혔다. 재판관은 율리시즈의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그것이…….”

나는 재판관에게만 보이도록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돈! 돈 줄게! 너희 돈 좋아하잖아!’

상드리움의 판사들도 한국의 판사들 못지않게 돈을 좋아한다. 어차피 달리아가 결백하면 심판을 거쳐도 딱히 변하는 건 없고, 만약 달리아가 흑마법사라면 재판관이 공을 세우는 것이다.

거기에 돈까지 준다니. 재판관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예비 황태자비께도 흑마법 의혹이 있었으니 심판을 거치는 것이 상드리움의 법에 알맞겠지요. 마탑주님, 부탁드립니다.”

달리아가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얄밉게, 하지만 달리에게만 보일 만큼 재빨리 혀를 날름 내밀었다.

‘메롱이다.’

이대로 달리아는 파멸의 길을 걸을 것이다. 상드리움에서 흑마법사는 무조건 사형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순간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찜찜해졌다.

달리아가 얄미운 건 맞다. 하지만 내 말 한 마디로 달리아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내가 직접 달리아를 죽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모두에게 착한 동화 속 주인공은 아니지만, 입에 칼을 물고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시민이었다. 하지만 말은 이미 뱉어졌고 오베론이 달리아에게 명령했다.

“그럼 예비 비전하께선 앞으로.”

내 생각에 달리아와 오베론은 한패다. 어쩌면 오베론이 달리아를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게 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달리아는 지나치게 겁먹어 있었고, 오베론의 얼굴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이대로라면 달리아가 죽는다.

오베론이 훔친 내 나비를 이어받았다는 죄로.

‘……어떡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방청객들 사이에서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내가 없는 사이 황실도 많이 개판이 됐네. 흑마법 심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열 정도로 흑마법사가 이렇게 많아졌나?”

대체 누가 신성한 재판 중에 저런 불손한 소리를 내뱉지?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집중되었다. 말을 꺼낸 여자는 꽤 주목 받는 걸 즐기는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나와 눈이 마주친 갈색 머리의 여자였다.

“재판 중입니다! 정숙하고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재판관이 여자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여자는 재판관의 말은 귓등으로 듣는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듯, 성큼성큼 법정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말이야, 애초에 그딴 심판 벌일 필요 없다는 거 알고 있어? 재판의 결과를 가릴 증거가 이미 있거든.”

무슨 소리야? 덕분에 심판이 중지된 건 고마웠지만 여자가 하는 소리는 통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율리시즈에게 시선이 갔다. 율리시즈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지나치게 떨고 있었다.

“너, 너는…….”

율리시즈가 아는 사람인가? 율리시즈 말고는 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라파엘 쪽 사람인가?’

라파엘이 비장의 수를 데려왔다 했댔지.

그런데 도대체 누구기에 율리시즈가 저렇게 겁먹었지?

“뭣들 하냐,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

율리시즈의 기겁 어린 명령에 장식처럼 서 있던 기사들이 여자를 끌어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제게 가장 먼저 달려든 기사를 아주 가볍게 제압했다.

“커헉!”

“으윽!”

황실의 무력의 상징인 기사들은 지푸라기처럼 맥없이 없이 쓰러졌다. 누구 하나 여자에게 손끝 하나 닿을 수 없었다.

“아악!”

여자가 마지막 기사까지 제압했다. 꽤 격렬하게 움직인 덕에 여자의 머리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대머리가 아닌 이상 머리카락이 머리에서 떨어질 리가 없다. 가발이 떨어졌다.

“헉……!”

갈색 가발이 벗겨지고 드러난 머리카락은 찬란한 금발이었다. 갈색 머리일 땐 못 알아보던 사람들도 여자가 원래 머리카락을 드러내자 하나둘씩 여자를 알아보기 시작했는지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켰다.

‘저 사람은…….’

나 역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블린의 기억이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갑자기 받게 된 주목이 나쁘지 않은지 여유롭게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깔깔 웃었다.

“기사들 수준은 왜 이렇게 떨어졌대? 이래 가지고 상드리움의 기사라고 할 수 있겠어?”

율리시즈고 귀족들이고 할 것 없이 여자를 귀신 보듯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저 여자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샤, 샬럿…… 황녀.”

누군가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여자의 이름을 흘렸다.

얇게 구불거리는 금발, 별을 박아넣은 듯한 푸른 눈. 놀라울 정도로 프레데리카 황제의 젊은 시절을 빼다 박은 듯한 모습을 자랑하며 여자가 대답했다.

“안녕? 오랜만인데 다들 알아봐 주네?”

샬럿 황녀는 자신을 보고 기겁한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하나하나 다 눈을 맞춰 주며 손을 흔들었다.

“유폐된 황녀가 어떻게 여기에…….”

샬럿이 싱긋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가 저렇게 사이코패스처럼 보일 수가 없었다. 간신히 재판관이 침착함을 되찾고 물었다.

“샤, 샬럿 황녀. 유폐된 그대가 도대체 왜 여기에…….”

“그보다 말이야, 재판관.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

샬럿은 아까 이 재판의 결과를 가를 증거가 있다고 했다. 재판관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앞으로 내뺐다.

“무슨 말이지요, 그게?”

“간단해. 헤베 영애. 내 질문에 하나 대답해 볼래? 너, 프라비체 공녀에게 뺨을 맞았을 때 피가 났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달리아는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렇단 말이지?”

샬럿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샬럿의 시선은 이윽고 내게로 돌아왔다.

“프라비체 공녀. 손톱 좀 보여 줄래?”

“……?”

나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손을 들어 보였다. 샬럿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손톱 길고 예쁘네.”

그야 관리를 받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영문 모를 칭찬을 남긴 샬럿은 성큼성큼 달리아와 율리시즈에게 다가갔다.

뭘 하려고 저러지?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짜악!

“허억.”

찰진 마찰음이 재판장을 울렸다. 샬럿이 달리아의 뺨을 친 것이다.

달리아는 여간 당황한 게 아닌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간신히 고개를 든 달리아의 뺨에서는 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샬럿의 뾰족한 손톱에 크게 긁힌 거다. 사람 뺨을 쳐 피를 내 놓고 샬럿은 태평하게 달리아의 뺨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봐. 나나 프라비체 공녀처럼 손톱이 길면 이렇게 뺨에 상처가 나야 하거든. 그런데 헤베 영애가 말한대로 프라비체 공녀에게 맞았을 때 피가 안 났다고 한다면 말이야…….”

샬럿이 달리아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사람들에게 보였다. 너덜너덜한 손톱이 보였다.

샬럿은 달리아를 향해 싱긋 웃었고, 달리아는 불안을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짜악 하는 소리가 재판장을 울렸다.

“……!”

달리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샬럿이 달리아의 손을 억지로 끌어 그녀의 뺨을 치게 한 것이다.

이번에는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그저 뺨만 붉어졌다.

예비 황태자비가 사람들 앞에서 두 번이나 뺨을 맞았다. 이 충격적인 상황에 모두가 입을 쩍 벌린 가운데 샬럿만이 웃으며 말했다.

“결국 예비 황태자비의 자작극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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