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103화
달리아는 곧바로 대기실로 뛰쳐 들어왔다. 피가 바싹바싹 말라 도저히 재판장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율리시즈가 뒤늦게 달리아의 대기실로 들어와 달리아를 감싸 안았다.
“달리아, 괜찮나?”
“전하……!”
달리아는 율리시즈를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율리시즈가 처음부터 말을 거지같이 하는 바람에 초반부터 이블린을 몰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율리시즈는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느꼈는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미안해, 달리아. 내가 책임지고 공녀를 가두어 줄 테니까 그만 화를 풀어 줘, 응?”
사실 율리시즈도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율리시즈는 방청석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재판관의 질문은 제게로 향했고, 당황한 율리시즈는 바보 같은 대답을 내놓고 말았던 것이다.
“달리아, 빨리 끝날 재판을 길게 끌게 된 건 미안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이성적으로 굴어야 해.”
달리아는 마음 같아서는 율리시즈를 비난하고 싶었다. 애초에 감정적이었던 게 누군가.
‘진짜로 프라비체랑 척질 각오를 했었다면 그날 바로 공녀를 사형에 처했어야지! 그날 후작한테도 쫄아서 공녀를 풀어 준 게 도대체 누군데!’
율리시즈가 공녀를 풀어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렇게 초조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달리아가 물었다.
“……아까 전하가 보고 계셨던 사람, 누구예요?”
율리시즈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달리아가 율리시즈의 손목을 잡고 흰자를 드러내며 물었다.
“설마 아버님은 아니겠죠?”
“아니야!”
율리시즈가 단번에 대답했다. 달리아는 율리시즈의 성격을 안다. 율리시즈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달리아, 아까도 내가 말했잖아. 헤베 백작은 지금쯤 도박장에 있을 거다. 절대로 헤베 백작은 아니야.”
“그럼 누군데요?”
“지금 재판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고,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 본 거였다. 그러니까 달리아,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율리시즈는 또 말을 돌렸다.
달리아의 속이 오래 끓인 수프처럼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그럼에도 달리아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율리시즈는 자신이 굽힐 땐 굽히지만, 달리아가 화를 빨리 풀지 않으면 역으로 달리아를 위협한다. 율리시즈의 사과는 자기 만족용인 거다.
“달리아.”
어서 기분을 풀라고 율리시즈가 재촉했다. 달리아는 붉어진 눈 안에 율리시즈를 담더니 힘없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제서야 율리시즈는 기분을 풀고 달리아를 안아 주었다.
“고마워, 달리아. 이어지는 재판에서는 내가 확실하게 도와주도록 할 테니 안심해.”
율리시즈의 넓은 품은 평소와 다르게 불편했다.
달리아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더 이상 율리시즈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 *
“아오, 달리아 저 망할 것!”
휴식시간을 받아 대기실에 들어오게 된 나는 답답함을 표출할 방법이 없어 쿠션만 퍽퍽 때려댔다.
저 망할 것을 어떻게 잡아다 족치지? 내가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계십니까?”
“아, 라파엘.”
대기실에 들어온 라파엘은 움푹 패인 쿠션을 보고 라파엘은 대충 내가 방금까지 뭘 했는지 짐작한 듯했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내게 공감해 주었다.
“거짓말을 정말 잘하는 작자들이더군요. 화가 나실 만도 합니다.”
“아, 그니까! 진짜 저것들 때문에 내가 화병 걸려 죽겠어!”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라파엘은 푸흡 웃었다. 나는 순간 인내심을 시험 당했다.
“웃겨? 너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설마요.”
하여튼 대답은 잘해요. 라파엘은 금세 표정을 정돈하고는 내게 물었다.
“제가 일이 있어 며칠 파그라시움을 비운 것 알고 계시지요?”
“당연히 알지.”
“재판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비장의 수를 데려왔습니다.”
“……데려와?”
사람을 데려왔다는 뜻인가?
내가 궁금해 미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라파엘은 검지로 입술에 갖다 대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아직은 비밀입니다. 어디에 듣는 귀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렇다면야.”
나는 짧게 납득했다. 확실히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라파엘의 비장의 수가 까발려졌다간 달리아 측에서 알고 대처해 버릴지도 모른다.
아, 그러고 보니 가족이랑 잘 해결되었다는 말도 해야 하는데.
내가 뒤늦게 입을 열려던 그때, 문지기가 노크와 함께 고했다.
“피고인. 곧 재판장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어느새 휴식 시간이 끝나 재판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럼 다시 재판장에서 뵙죠.”
좀처럼 내가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라파엘이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저 여유롭다 못해 상대하는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저 미소를 짓는 남자가 내 편이라는 게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래, 나는 파그라시움의 일짱을 거느리는 악녀.
재판에서 못 이길 리가 없지. 나는 못 다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하고 재판장으로 척척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럼 재판을 재개하겠습니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휴식을 가지고 온 달리아는 아까보다 안정되어 보였다. 나는 불안해졌다.
‘저러면 곤란한데…….’
아까처럼 멘탈이 나가 있어야 내가 무죄로 빠져나가기 쉬웠는데. 나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재판관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예비 황태자비 전하께 다시 묻겠습니다. 스스로의 뺨을 쳐 자작극을 벌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여론은 이미 내 쪽으로 기울여져 있었다. 아까 달리아가 지나치게 동요한 데다가 요즘 나는 꽤 얌전한 편이었고, 라파엘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달리아를 아니꼬와 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달리아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공녀는 지금 거짓을 늘어놓고 있어요.”
재판관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이쪽도 저쪽도 전부 서로 네 탓이다를 반복하는데다 목격자도 없으니 재판관 입장에서는 머리가 퍽 아플 거다.
하는 수 없이 내가 ‘그 벽’에 대해서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외람되옵지만 공녀에게 흑마법사 심판을 요구합니다.”
뜬금없는 달리아의 발언에 청중이 혼란에 휩싸였다. 몇몇은 달리아를 헛된 발버둥을 치는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달리아는 꿋꿋했다.
“사실 이블린 프라비체 공녀는 경합 결과를 조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가 쓰러지시고 경합 결과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저를 흑마법으로 살해하려 했어요!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황태자 전하께서 제때 오시지 않았더라면 전…….”
그때였다.
흐윽! 달리아가 눈물을 쏟아 냈다.
젠장, 말싸움은 선수치는 놈과 목소리 큰 놈의 승리라더니 제대로 당했다. 나는 뒤늦게 재판관에게 호소했다.
“오해입니다, 재판관님. 오히려 저는 헤베 영애를 고발합니다. 헤베 영애의 방에 수상한 벽이 있었어요!”
“수상한 벽이라뇨?”
“곤충 표본으로 벽이 메워져 있었습니다. 헤베 영애는 그 벽을 커튼으로 가려 놓았어요. 제가 그 벽을 발견하자 돌변해서 스스로의 뺨을 쳐 댔습니다!”
나와 달리아, 둘 중 누가 더 흑마법사 같냐고 길 가는 사람 열 명을 붙잡고 묻는다면 9명은 나라고 대답할 거고, 그중 한 명은 프라비체의 악독함을 늘어놓으며 당장 나를 화형시키자고 할 거다.
하지만 내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애초에 흑마법사일 가능성이 있는 쪽은 원래부터 마법사였던 헤베 영애 아닌가요? 저는 마법을 쓸 줄도 모릅니다!”
나는 진심 100%를 담은 눈으로 재판관에게 어필했다.
뻔뻔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내 행동에 달리아가 표독스럽게 물었다.
“진짜 흑마법사는 공녀면서, 감히 예비 황태자비가 될 나를 흑마법사로 모는 건가요?”
“그러는 예비 비전하야말로 무슨 근거로 날 흑마법사로 몰고 있는 거죠?”
서로 증거도 없이 박박 우기기만 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흑마법은 상드리움에선 중죄였다. 이를테면 한국의 마약 검사와 같은 엄청난 불법 행위에 해당되었다. 말이 나온 이상 확인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 재판관이 달리아에게 물었다.
“헤베 영애에게 묻겠습니다. 프라비체 공녀의 말대로 방에 곤충 표본 벽이 있습니까?”
“없어요!”
달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재판관은 결국 본인에게서 진실된 이야기를 듣는 걸 포기했는지 달리아를 담당하는 궁인을 소환했다.
소환된 궁인은 어리둥절하게 재판장에 들어섰다.
“이름과 나이, 직업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 저는 알마라고 하고요. 23살로 예비 황태자비 전하의 시중을 들고 있는 황궁 소속 시녀입니다.”
“헤베 영애의 방에 수상한 벽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알마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뭔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어, 없습니다.”
아오, 저 구라쟁이! 신성한 법정에서 악녀 역할인 나만 진실을 내뱉고 있다. 나는 알마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재판관에게 말했다.
“재판관님, 저 증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녀야말로 억지 그만 부리게!”
율리시즈가 가장 높은 자리에서 혼자 편하게 잘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나를 비난했다.
“재판관! 황제 대리 권한으로 명하네. 당장 이블린 프라비체에 대한 흑마법 심판을 진행하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율리시즈는 분노한 얼굴로 재판관을 향해 명령했다.
재판관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피곤한 얼굴로 재판봉을 내리쳤다.
“오베론 매그너스 마탑주를 불러오세요. 이블린 프라비체에 대한 흑마법 심판을 진행합니다.”
* * *
오베론이 법정으로 소환되었다. 오베론은 급하게 불려 왔음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법정 가운데에 섰다.
“마탑주 오베론 매그너스, 법정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오베론 마탑주께 이 자리에서 이블린 프라비체에 대한 흑마법 심판을 요청 드립니다.”
재판관의 말에 오베론의 붉은 눈이 내게로 향했다.
“프라비체 공녀님. 앞으로.”
오베론은 달리아에게 내 나비를 준 당사자다. 오베론이 내게 어떤 심판을 내릴지는 너무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심판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오베론을 노려보았다.
‘똑바로 해, 똑바로…….’
피식, 오베론이 웃음을 흘렸다. 이게 지금 웃어? 누군 지 한 마디에 목 잘릴 위기에 처했는데?
‘아니, 애초에 이 새끼도 흑마법사인데 얘가 날 심판해?’
그렇지만 여기서도 오베론이 흑마법사라고 주장했다가는 이블린 프라비체는 아무에게나 흑마법사라고 주장하는 멍청이다, 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 뻔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오베론은 한 손은 내 머리 위에 얹고 다른 한 손은 돌을 쥐고 선언했다.
“지금부터 흑마법 심판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