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102화
재판 시작 전, 율리시즈는 달리아를 찾아가 손을 잡아 주었다.
“달리아, 우리 둘이서 말만 잘 맞추면 공녀 하나 보내 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아요, 전하. 그것보다 아버님은…….”
달리아가 말끝을 흐렸다. 율리시즈는 씨익 웃으며 달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베 백작은 걱정 마. 원하는 대로 돈 좀 쥐여 줬으니 재판장엔 올 생각도 못 하고 도박장에나 갔을 거다.”
달리아는 율리시즈에게 고맙고도 미안했다. 율리시즈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망할 혈육 때문에 율리시즈의 재산을 축내게 되다니. 달리아가 율리시즈의 품에 답싹 안겼다.
“이번에 재판만 끝나면 저희는 결혼하는 거죠?”
“물론이지. 모황을 대신해 내가 정무를 본 지도 꽤 됐어. 우리가 빠르게 식을 올린다고 해서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다.”
“약속해 주세요.”
“약속할게, 달리아.”
율리시즈와 달리아는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율리시즈는 달리아를 우선 재판장으로 보내고 천천히 준비를 했다.
그가 정복을 갖춰 입는 도중,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전하. 셀레스티안 후작이 알현을 청했습니다.”
“굳이 재판 도중에? 치워라.”
율리시즈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시종장은 고분고분 율리시즈의 지시를 따랐다.
“전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느덧 재판장에 출석할 준비도 끝났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복도로 나오는데, 율리시즈의 구두 끝에 무언가가 채였다.
뭐지? 중요한 날에 밖에 나오자마자 구두 끝에 무언가 채인다는 건 상드리움에서는 흉조에 속했다.
율리시즈는 자신이 찬 무언가를 확인했다. 평범한 종이 쪼가리였지만 황궁 복도에 이딴 종이 쪼가리가 나뒹굴어 다닌다는 건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율리시즈는 종이를 확인했다.
“……!”
그리고 율리시즈의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
* * *
“어딜 다녀오십니까?”
라파엘이 자신을 뒤따라온 갈색 머리의 여자에게 핀잔을 주었다.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게 누가 나한테서 눈 떼래?”
세 살도 아니고 서른은 먹어 놓고 무슨 헛소리지? 라파엘이 질색했고 여자는 깔깔 웃었다. 재판장에 들어서기 전 라파엘은 경고했다.
“뒤쪽에 최대한 조용히 앉아 계십시오. 제가 신호할 때가 아니라면 나서지 마시고요.”
“알았어, 알았어. 나 참, 귀에 딱지 앉겠어.”
여자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재판장에는 사람이 벌써부터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소문 좋아하는 귀족들은 일찍이 모여 종달새처럼 정보를 주고받았다.
“프라비체 선대 공작 부부가 와서 공녀를 풀어 주었다던데요.”
“어머, 난 다르게 들었는데. 후작이 황궁에서 난리를 쳤다는데?”
“셀레스티안 후작이 말입니까?”
“그래, 그 셀레스티안 후작이.”
“말도 안 돼요.”
“원래 남자들은 가끔 여자 일이라면 눈이 뒤집어지잖아. 그자도 똑같았던 거지.”
황족 폭행에 관한 재판인지라 고위귀족까지 참석했음에도 시끄럽게 삐약거리는 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소란 속 여자는 이미 착석했고, 라파엘도 가장 앞자리까지 걸어나갔다. 라파엘은 저를 둘러싼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했다.
‘웬일로 맞는 말이 퍼지는군.’
소문이란 때로 터무니없는 말이 퍼지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웬일로 사실이 퍼졌다.
조금만 더 들어 볼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쥐 죽은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재판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프라비체 일가가 재판장에 들어선 것이다.
프라비체 일가는 아까까지만 해도 이블린을 입에 담았던 자들을 차례차례 노려보며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라파엘이 프라비체 부부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늦으셨군요.”
“그러는 후작이야말로 일찍 왔군. 꽁무니 내뺀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럴 수야 있나요. 한번 맡은 의뢰는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라파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재판관이 입장했다. 재판관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고, 피고. 양쪽 다 입장하십시오.”
이블린이 차가운 얼굴로 걸어 나와 모두의 앞에 태연하게 자리를 잡았다. 달리아도 조용히 착석했다.
겉으로 보기엔 이블린과 달리아 둘 다 하나도 꿀릴 것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재판관보다 한 층 위에, 본디 황제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율리시즈까지 착석했다. 율리시즈를 본 라파엘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안색이 왜 저러지?’
율리시즈는 그냥 보기에도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설마. 라파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젠장, 믿을 사람을 믿었어야지. 라파엘이 탄식하며 이블린 쪽을 확인했다. 이블린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그나마 공녀님께 접근 안 한 게 다행이군.’
사사로운 분노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라파엘은 자세를 바로 했다.
재판관이 피고와 원고를 한 번씩 번갈아 본 후 이블린에게 물었다.
“이블린 프라비체 공녀. 재판에 앞서 성실하게 재판에 임할 것을 맹세하십시오.”
“맹세합니다.”
이블린이 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관이 재판봉을 들어 올렸다.
“그럼 지금부터 이블린 프라비체 공녀의 예비 황족 폭행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땅― 재판이 시작되었다.
* * *
살면서 재판장에 서 본 건 처음이다. 나는 묘하게 긴장되는 마음 반으로 선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재판관이 재판의 시작을 열었다.
“피해자인 예비 황태자비께서 먼저 진술하십시오.”
“예, 재판관님.”
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리아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황태자비로 결정된 후, 저는 심사 위원으로 힘써 주었던 프라비체 공녀님을 치하하기 위해 황궁에 초대했습니다. 공녀님께서는 처음에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시려는 듯하더니 갑자기 제 방을 헤집고는 저를 폭행하셨어요.”
“무슨 대화를 나누었지요?”
“그냥 경합에 대해서 수고했다는 말을 한 게 다였습니다.”
하, 웃기는 소리.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내 불량한 태도에 재판관은 찌릿 눈치를 주었다.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재판관이 물었다.
“목격자는 있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목격하셨습니다.”
“황태자 전하, 목격한 바를 진술하여 주십시오.”
재판관에 부름에도 율리시즈는 멍하니 방청객들을 내려다보았다. 얼빠진 모습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저 새끼가 내 목숨 건 재판이 장난인가.’
집중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꼬운 건 재판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재판관이 다시 한번 율리시즈를 불렀다.
“황태자 전하?”
“어…… 아. 그래, 뭐라 했지?”
“나와서 목격한 상황을 증언해 주십시오.”
재판관의 요청에 율리시즈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내려와 증언대에 섰다. 율리시즈는 증언대에 서서도 좀처럼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굴 보느라 저래?’
짜증이 나서 나 역시 율리시즈의 시선이 향한 곳을 슬쩍 훔쳐보았다.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
누군가가 내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였다. 어쩐지 카밀라가 생각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는데, 카밀라는 아니었다.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눈을 가진, 카밀라보다 좀 더 성숙해 보이는 여자였다.
‘뭔데 아는 척이지?’
찜찜해진 나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율리시즈의 증언이 시작되었다.
“증언하겠다. 공녀는 예비 황태자의 초대를 받아 입궁했다.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에 나는 자리를 비켰었지.”
이상하게 율리시즈의 증언에 달리아의 손이 움찔 떨렸다.
부들부들 말아 쥐는 게 어쩐지 제 생각대로 되지 않는 모양새 같았다. 율리시즈도 뒤늦게 아차 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예비 황태자비의 방을 예의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비 황태자비에게 준 아티팩트가 반응하더군. 문을 열어 보니 예비 황태자비는 테이블과 떨어진 곳에서 주저앉아 있었지. 양 볼이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공녀는 마치 범죄 현장을 들킨 것처럼 나를 보고 당황했었지.”
“프라비체 공녀. 사실을 인정합니까?”
재판관이 내게 물었다. 나는 단박에 대답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뭐?”
율리시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달리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똑바로 진술했다.
“예비 황태자비 전하 역시 평소에 저를 못마땅해하였습니다. 제게 복수할 심산으로 자작극을 벌인 거예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의 뺨을 쳐 댔습니다.”
“감히 내 증언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냐?”
율리시즈가 험악하게 물었다.
하지만 난 율리시즈가 무섭지 않다. 내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할 수 없는 이상 율리시즈보다 만만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가 예비 전하를 폭행하는 모습은 직접 보지 못하셨잖아요?”
내 발언에 재판장이 술렁였다. 여기저기서 그러고 보니, 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재판관이 조심스럽게 황태자에게 물었다.
“황태자 전하, 프라비체 공녀의 말이 사실입니까?”
“그건…….”
“직접 목격했는지 아닌지 말씀해 주십시오.”
율리시즈가 주춤했다. 달리아의 눈짓에 율리시즈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을 맞췄다.
“직접 목격했다. 공녀는 지금 신성한 법정에서 거짓을 입에 담는 건가?”
“거짓말은 황태자 전하께서 하고 계십니다. 만약 황태자 전하께서 폭행현장을 직접 목격하셨다면 처음부터 제가 헤베 영애를 폭행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발언하셨겠지요. 저는 무고합니다.”
율리시즈와 달리아는 사귀는 사이에 입도 안 맞춘 건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어쩐지 역*재*라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도 증언의 모순을 꼬투리 잡으며 박박 우기다 보면 무죄가 되었다.
재판관이 달리아 측을 조용히 시키고 내게 물었다.
“그럼 프라비체 공녀, 묻겠습니다. 어째서 예비 황태자비께서 스스로의 뺨을 쳤습니까?”
재판관의 질문에 달리아가 동요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달리아를 흘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아무래도 제가 눈엣가시여서 절 처리하려고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 그런! 아니에요, 재판관님! 공녀의 말은 모두 억지입니다!”
달리아가 학을 떼고 부인했다. 그러나 상당히 그럴싸한 말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소곤대는 소리가 내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하긴, 프라비체 공녀가 얼마나 예비 황태자비 전하를 괴롭혀 왔나.”
“그런데 복수하는 방식이 너무…….”
뒷말을 삼킨 게 어떤 의미일지는 너무 뻔했다. 치졸하고 얕은수라는 말이겠지.
재판관이 재판봉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다들 정숙, 정숙!”
재판장이 조용해졌다. 재판관은 달리아 쪽을 바라보았다.
“…….”
달리아는 제대로 멘탈이 나간 듯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여기서 휴식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재판관이 선언했다.
“10분 휴식을 가지고 재판을 재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