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101화
라파엘은 혹을 달고 셀레스티안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앞장서서 걸으며 라파엘이 경고했다.
“재판 전까지 모쪼록 가만히 있어 주십시오.”
“얘, 너 나 못 믿니?”
“안 믿습니다. 당신은 당신보다 만만한 사람 말이면 귓등으로 듣지 않습니까.”
“사람 보는 눈은 여전히 정확하네.”
여자와 라파엘이 주고받는 말은 공갈빵처럼 안에 찬 바람이 가득 차 있었다. 라파엘은 자신의 방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3층 끝방을 여자에게 내어 주었다.
“재판 날까진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일에 지장을 만드는 건 질색이라서요.”
이블린이 들고 오는 사고를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쌀쌀맞음이었다. 여자는 불쾌한 듯 눈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너 가난하니? 집이 왜 이 모양이야?”
여자가 불편해하는 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숙소의 질이었다.
라파엘은 일부러 소박하기로 유명한 이 저택 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방을 내주었다.
이블린이 지내던 사치스러운 방이 있긴 했지만 여자에게 내어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라파엘은 시치미를 똑 떼고 말했다.
“제 진짜 집도 아닌데 꾸며서 뭐에 씁니까. 이 방이 최선입니다. 참으세요.”
“얘 좀 봐라? 나도 좀 호화로운 데에서 잠 좀 자자. 연장자를 대하는 태도가 영 아니네.”
“그 긴 시간 동안 드와이에서 호의호식하셨을 거 아닙니까. 이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짐승이죠.”
라파엘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여자에게 방 안에 들어가길 종용했다. 여자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라파엘은 문을 닫아 버렸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대충 알아서 사람 부르십시오. 그럼.”
“잠깐.”
쿵. 문틈에 여자의 발이 끼었다. 발이 빨갛게 부었는데도 라파엘이나 여자나 놀란 기색은 없었다. 특히 여자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라파엘을 흘겨보더니 손을 척 내밀었다.
“약속한 보수는 언제 줄 거야?”
라파엘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모든 일이 끝나면 드릴 겁니다. 당신의 무얼 믿고 먼저 넘기겠습니까.”
“여전히 의심이 많구나?”
“의심이 많아서 방지할 수 있는 일들이 무척 많았던 덕이죠.”
하여튼 한 마디도 안 지는 놈. 어려서부터 변한 게 없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발을 뺐다.
이제야 문을 닫을 수 있게 된 라파엘은 한 시름 놓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재판 전까지는 이 집에서 죽은 듯이 있어 주십시오.”
그럼 이만. 라파엘은 문을 쿵 닫고 떠났다. 여자는 눈을 찌푸리듯 접어 웃으며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동생들이라고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다 버르장머리가 없어.”
남동생들은 어렸을 때 기강을 잘 잡아 놔야 하는데, 일찍이 집에서 쫓겨난 바람에 다 물 건너갔다.
‘율리시즈 놈이야 그렇다 쳐도 라파엘 쟤까지 저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어. 내 팔자도 참 기구하다니까.’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폭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미묘한 의자에 몸을 폭 묻으며 제 신세를 한탄했다.
* * *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는 이블린 프라비체 공녀가 예비 황태자비를 폭행하여 재판이 열린다는 이야기는 현재 할 일 없는 귀족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재판까지 구금되어 있어야 할 이블린이 프라비체 공작가의 권력으로 자택 근신으로 바뀌었다.
프라비체의 권력이 과연 예비 황족 폭행죄까지 뒤집을지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반면, 달리아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어둑한 방 안 까득, 까드득 손톱을 갉아 먹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달리아는 초조하게 침대 구석에 웅크리며 손톱이 피범벅이 되어도 이빨질을 멈추지 않았다.
‘라파엘 님한테 못난 꼴을 보인 것도 모자라 공녀까지 놓쳤어. 이제 난 끝이야!’
라파엘은 처음 보는 낯선 모습으로 자신과 율리시즈를 위협했다. 무력이라곤 하나도 쓸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지팡이를 마치 엽총처럼 들고 말이다.
‘셀레스티안 후작. 자네까지 구속되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물러나는 게 좋을 거다.’
‘무죄 판결이 그렇게 어려운 요구였나요? 몰랐군요. 비밀이 만천하에 공개 되어도 상관없나 보죠?’
라파엘은 씨익 웃으며 율리시즈와 달리아의 심장을 손안에 쥐었다.
존재감 없는 그깟 후작 하나. 처리해 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율리시즈가 검을 빼 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참고로 지금 날 죽이면 후회할 겁니다. 당신들의 대화는 모두 기록되고 있으니까요. 지금조차.’
짤랑― 라파엘이 지팡이에 달린 영상석을 자랑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아직도 칼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은 율리시즈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그대로 상드리움의 하늘에 이 영상이 송출될 겁니다. 볼만하겠군요. 전하께서 내 요구를 들어준다면 부숴 드릴 수는 있지만.’
‘감히 내게 협박을 해!?’
‘그러게 듣는 귀 많은 황궁에선 조심하였어야지요. 자,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요?’
라파엘은 재차 영상석을 인질로 잡고 얄밉게 물었다. 분하지만 약점을 쥐고 있는 건 라파엘 쪽이었다.
율리시즈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내걸 수 있는 최대한의 조건을 내걸었다.
‘……무죄 판결은 어렵다. 구금에서 자택 근신으로 대기 정도로는 바꿔 주지.’
‘전하!’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블린을 공개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어떻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을 해!?
이블린이 자택 근신을 하는 사이에 분명히 수를 써 놓을 텐데!
맞은 건 자신인데 결정은 율리시즈가 하다니, 너무 불합리했다.
그러나 율리시즈는 달리아의 합당한 항의를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렸다.
‘그대는 가만히 있어, 달리아.’
‘……!’
나보고는 황제를 죽이라 해놓고, 정작 자신까지 들킬 것 같으니 꽁지를 내빼다니.
만약 자신이 연루된 게 아니라면 달리아는 지금 기꺼이 라파엘에게 무릎 꿇고 부탁했을 거다. 당장 그 영상을 상드리움 전역에 송출해 달라고.
둘의 싸움이 어지간히도 재밌었는지 라파엘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그들의 화를 돋우었다.
‘흠. 더 선심 써 주시는 게 좋을 텐데 아쉽게 됐군요. 하지만 뭐,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따라야죠. 재판에서 이기는 것쯤은 쉬운 일이니까.’
‘일이 끝났으면 빨리 물러나라. 그건 내놓고.’
율리시즈가 살벌하게 읊조렸지만 당연하게도 라파엘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오히려 맞경고를 날렸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블린이 무죄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건 전하의 선택에 따른 결과입니다.’
달그락. 라파엘은 말 그대로 영상석을 버리듯 율리시즈의 발치에 던져 주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달리아로 옮겨 갔다.
라파엘의 총구가 율리시즈에게만 향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라파엘은 달리아에게마저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자작극을 벌이면서까지 이블린을 해치고 싶었습니까?’
라파엘은 혐오 어린 한 마디를 달리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고는 떠났다.
달리아는 라파엘이 인간적으로 좋았다. 그런 사람에게서 비웃음을 사는 건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이었다.
‘도대체 라파엘 님은 공녀의 어디가 좋아서 우릴 위협하는 거야?’
달리아는 배신 당한 기분이었다. 라파엘은 달리아에게 율리시즈가 발푸르기스의 밤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율리시즈에게 사랑 받을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블린과 라파엘이 약혼 관계라는 건 알고 있다. 자신과 라파엘의 관계는 남에 가깝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나를 그렇게 경멸하지? 이블린은 실제로 때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그동안 날 얼마나 위협해 왔는데!
내 힘도 빼앗아 가고!
‘같은 흑마법사라 해도 나는 이 힘으로 아직 사람을 해친 적이 없어! 하지만 공녀는 그 프라비체 출신이잖아. 그럼 공녀가 더 나쁜 거잖아!’
어쩌면 라파엘은 이미 그른 걸지도 모른다. 이블린이 흑마법사인 걸 알면서도 약혼까지 한 모양이니 라파엘도 더 이상 선량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달리아는 정신을 차렸다.
‘셀레스티안 후작님이 상대라고 망설일 이유는 이제 없어. 여자한테 미친 남자는 위험해. 제대로 나도 방비를 해 둬야 해.’
재판 때 입 하나 잘못 놀리면 끝이었다.
이건 이블린도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긴 하다만 이블린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지 않은가. 반면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때였다. 똑똑,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도움도 되지 않는 누군가가 달리아를 찾아왔다.
“달리아, 아비다.”
“……아버님.”
달리아가 산발이 된 머리로 헤베 백작을 맞이했다. 헤베 백작은 달리아의 몰골을 보고 기함을 토했다.
“아무리 공녀의 처분이 가벼워졌다 해도 그렇지, 무얼 걱정하느냐? 넌 예비 황태자비다. 그 눈엣가시 같은 공녀 따위 황태자비가 될 네 발아래인데, 할 걱정도 없어 괜한 걱정을 사서 하는구나.”
헤베 백작이 멋대로 촛불을 켜 담배를 뻑뻑 피우기 시작했다. 퀴퀴한 냄새에 달리아가 코를 틀어막고 헤베 백작을 노려보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프라비체 공작가가 무슨 짓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 봤자 황족이 될 네겐 당해 내지 못해.”
멋도 모르는 소리. 달리아는 아직 황족이 아니다. 예비 황태자비의 신분은 아직 달리아를 지켜 줄 수 없다.
헤베 백작은 담배 냄새가 섞인 숨을 내뱉으며 달리아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달리아, 내 딸아. 나도 네가 걱정하고 있는 바를 알아.”
“……?”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달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헤베 백작이 속삭였다.
“결국에 프라비체 공작가의 권력을 이루는 건 돈이야. 그 막대한 자본이 황실마저도 우습게 보게 만드는 거다. 하지만 그걸 단번에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어 두렵겠느냐.”
그걸 누가 몰라. 프라비체 공작가에게서 돈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진작 율리시즈가 그랬을 거다.
달리아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애써 구겨 넣고 헤베 백작의 말을 마저 들었다.
“정 네가 불안하다면 재판 당일 내가 크게 한 건 터뜨려 주마. 그렇다면 프라비체 공작가가 재판관을 매수하든 어떻든, 공녀는 네가 원하는 대로 몰락할 거다.”
척, 헤베 백작이 손을 내밀었다. 무엇을 달라고 하는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 * *
드디어 다음 날, 재판 날이 찾아왔다.
정신 상태는 아주 오랜만에 안녕했지만 내 얼굴 상태는 안녕하지 못했다. 잔뜩 울어 팅팅 부은 얼굴을 보자마자 소피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벌에 쏘이셨나요?”
“뭐라고?”
“얼음팩을 가져오겠습니다.”
소피가 후다닥 도망갔다.
소피 쟤, 은근 나한테 무례하다.
잠시 뒤 소피가 얼음찜질 팩을 들고 왔다. 소피는 내 얼굴에 차가운 팩을 올려 주며 나와 나란히 누워 있는 금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쌍둥이 같네요.”
“알아. 내가 금희만큼 귀엽긴 하지.”
“아뇨, 얼굴 부은 거요.”
이런 씨. 금희는 너무 잘 자서 부은 거고.
얼음팩과 찬물 세수와 차가운 화장품의 마법으로 어떻게든 평상시의 미모를 복구하고 1층 홀로 내려갔다.
나를 수송하기 위해 황실에서는 마차가 보내졌다.
마차에 올라타기 전, 프라비체 노부부와 프라비체 형제가 나를 붙들고 온갖 걱정과 위로를 늘어놓았다.
“이블린, 아가. 걱정 말렴. 무슨 일이 있어도 할미가 무죄로 만들어 주마.”
“그럼 그럼. 우리도 다 무죄로 살아왔어. 우리 손녀딸 무죄로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냐.”
“정 뭣하면 내가 감옥에 대신 들어가 줄게.”
“너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아실. ……이블린 너는 별일 없을 테니 절대로 기죽지 말고 있어라.”
더글러스가 아실을 타박했다. 평소라면 아실이 더글러스에게 핀잔을 주었을 텐데, 요즘 들어서는 더글러스가 형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왜 기죽어? 이블린 프라비체가 언제 기죽는 거 봤어?”
이블린은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집안의 3대 독자로 태어난 남자 만큼이나 기 한번 죽지 않고 살아왔다.
비록 김금희는 가족들에게 호구나 잡힌 불쌍한 장녀였지만 이블린은 재판장에서도 기죽을 일이 없고, 없어야만 했다.
내 대답에 안심이 되었는지 가족들은 드디어 나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이제 곧 마차에 타야 하는데 타라와 헨리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얼굴도 못 보고 가는 건 아니겠지? 하고 내가 불안해하던 그 순간이었다.
“이블린!”
“엄마, 아빠!”
저 멀리서 타라와 헨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무얼 하느라 늦은 거지? 시간 개념이 철저한 그들로서는 드문 일이었기에 나는 샐쭉하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하다, 이블린. 찾을 게 좀 있어서.”
“이거 가져가렴.”
“이건…….”
전에 헨리가 나와 대판 싸우고 난 후 준 선물이었다.
그땐 내 것이 아니라 열어보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걸 왜 지금 주지? 라고 생각한 그때, 헨리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네 거야.”
“어?”
“네 거라고. 누가 뭐라 해도 이 선물의 주인은 너야.”
“…….”
헨리의 눈은 나를 보고 있었다. 이블린을 바라볼 때랑은 확연히 다른 눈이었다. 어떻게든 내게 가족으로서의 신뢰를 주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곱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품에 꼬옥 안고 슬며시 웃었다.
“다녀올게. 좀 있다 봐.”
“그래. 좀 있다 보자꾸나.”
나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수송 마차에 올라탔다.
재판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선물 포장을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웬 얇은 반지 하나와 쪽지가 있었다.
[너는 누가 뭐라 해도 아빠의 딸이고 프라비체의 일원이야. 당당하게 굴렴.]
고작 두 문장. 고작 두 문장이었지만 세상 그 어떤 말보다 지금의 내게 가장 큰 힘을 불어넣어 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