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 100화
“아오, 머리야…….”
내가 열에 녹아 흐물거리는 젤리 같은 몸을 겨우 일으킬 수 있게 된 건 새벽쯤이었다.
‘지금 몇 시야…… 아, 배고파.’
위장이 배고픔을 호소하는 걸 보니 이제 좀 살 만한가 보다. 내가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린 그 순간이었다.
“일어났니?”
“으악!”
순간 귀신인 줄 알고 쫄았다. 아니, 차라리 귀신이면 나았을 거다.
나는 벌렁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머리맡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고, 공작님. 공작 부군.”
“몸은 이제 좀 괜찮니?”
타라가 물었다. 헨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는 불편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은데…… 두 분 다 왜 여기 계세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니?”
앗차. 나가라는 말로 들렸나.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다들 절 보기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타라와 헨리의 얼굴이 또다시 괴롭게 일그러졌다.
내, 내가 무슨 못할 말을 했나? 아까부터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저런 표정을 지으니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다.
더는 이 둘과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 물러나 달라고 말하려던 그때, 나보다도 빠르게 헨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생각을 해 봤어, 아가.”
“……무슨 생각을요?”
나는 불안하게 물었다. 설마 짐을 싸서 집을 나가라든가, 금희와 함께 집을 나가라든가.
그런데 헨리가 준 대답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네가 계속 이 집에 있어 주면 좋겠다고 말이야. 우리 가족으로서.”
“……뭐요?”
“안 되겠니?”
헨리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내 눈치를 보며 다시 물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헨리가 내게 이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절 미워하는 거 아니었어요?”
“뭐?”
타라와 헨리가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놀라지? 나는 재차 물었다.
“따님의 몸을 빼앗은 제가, 미우시잖아요.”
뭐야, 나 왜 이래? 마치 서운한 사람처럼.
“아니야!”
타라와 헨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들은 내 질문에 많이 놀랐는지 의자에서 튕겨져 나올 듯했다.
타라가 처음 보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린 네가 밉지 않아, 아가.”
“……왜요? 미워야지 정상 아니에요?”
이블린 프라비체는 프라비체의 금지옥엽이고 김금희는 김씨 집안의 구박데기다.
이블린이면 몰라 김금희는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툭, 투둑. 손등 위로 뜨거운 비가 내렸다. 진짜 나를 들키기 싫었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물었다.
“이블린이 절 불렀다고 생각해서 미워하지 않는 건가요?”
그렇다면 더더욱 슬플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대체품이어야만 사랑 받을 수 있다고 느껴지니까.
차마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앉은 소파 옆이 가라앉았다.
“아가, 날 좀 보련?”
“…….”
“응? 아빠가 부탁할게.”
나는 헨리에게 약하다. 내게 처음으로 사랑받는 딸의 기분을 알려 준 헨리의 말을 도저히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헨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이블린의 얼굴이더라도 김금희로서 우는 모습은 예뻐 보일 수가 없을 텐데, 헨리는 마치 나를 만지면 부서질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어루만지듯 내 뺨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내게 사과했다.
“미안해, 아가.”
“……!”
“널 미워할 일이 아닌데도 널 미워했어. 어떻게든 널 미워할 이유를 만들려고 했고.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었어. 정말로 미안하다.”
설마 내가 사과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블린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인 만큼, 내가 일부러 이블린의 몸에 들어온 게 아니더라도 나를 평생 미워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니 타라와 헨리가 내 양손을 각각 잡고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무리 네가 진짜 이블린이 아니더라 해도 우리는 네가 계속 여기 있어 주면 좋겠구나. 우리의 딸로서.”
“저는 진짜 이블린이 아니에요. 진짜 이블린이 돌아올지 말지도 장담드릴 수 없…….”
“이블린은 돌아오지 않을 거야.”
헨리가 내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헨리가 이블린을 이렇게 포기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놀란 얼굴로 눈썹을 늘어뜨리며 헨리를 바라보았다.
헨리는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돌아오겠니. 게다가 이제 와서 너를 내쫓고 싶지도 않아. 이미…… 가족으로서 함께한 시간이 생겨 버렸잖아.”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는……!”
“고작이 아니야. 우리에게는 큰 이유야. 하지만 네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세상에는 아무 이유가 없어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구나.”
이유가 필요 없는 일도 있다, 라니.
그런 말이 세상에 어딨어.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가슴은 숨을 못 쉴 정도로 죄여 왔다.
‘이유가 없어도, 이 집에 있어도 되는 건가?’
내게 있어 너무나도 유리한 말이었다. 내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타라와 헨리는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헨리에게 경고했다.
“진짜 이블린이 알면 아빠가 날 버렸다면서 노발대발할 거예요.”
“그러진 않을걸. 우리 딸은 우리가 잘 알지. 그 아이는 우리가 슬퍼하지 않도록 너를 남기고 간 거야. 우리가 서로에게 의지되는 좋은 가족이 될 거라 믿고.”
“……킁.”
지금 내 얼굴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겠다. 분명 못생겨졌을 것이다. 헨리가 하하 웃으며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우리 막내딸은 눈물이 참 많구나.”
“……막내 아닌데. 제가 이블린보다 나이 더 많은 거 알잖아요.”
“몇 살?”
“……스물일곱.”
“어이쿠. 더글러스보다 많네. 그럼 첫째 딸 할래?”
“장녀는 싫어요. 그냥 막내 할래.”
내 말도 안 되는 고집에도 헨리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고, 나 역시 오랜만에 보는 헨리의 미소에 얼굴 근육이 조금 풀어졌다.
그 틈을 타 타라가 물었다.
“네 진짜 이름, 혹시 저 고양이 이름이니?”
나는 타라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세상모르고 배를 뒤집어 까고 쿨쿨 자고 있는 금희가 보였다.
같은 금희인데 쟤는 저렇게 편하게 자네.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맞아요.”
“금희야.”
타라가 내 이름을 불렀다. 헨리 역시 내 손을 꼬옥 잡아 주며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었다.
“금희야.”
타라와 헨리에게선 절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내 진짜 이름이 나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제 이름이 불리는 걸 알았는지 잘 자고 있던 금희가 귀를 열심히 파닥이더니 눈을 떴다.
잘 자서 퉁퉁 부은 얼굴로 금희는 왜옹, 가는 울음소리를 내며 꼬리를 바짝 세운 채 내게 다가왔다. 금희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무거워.’
감동적인 상황에도 금희는 여전히 무거웠다. 그래도 행복의 무게였다. 나는 금희의 배를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이미 그 이름은 얘한테 줬어요. 사람들 시선도 있으니까, 엄마 아빠만 괜찮다면 이블린의 이름을 쓰게 해 줘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
나 역시 타라와 헨리를 힘껏 껴안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다시 한번 잘 부탁해. 엄마, 아빠.”
이 순간 라파엘이 보고 싶었다.
네 말대로 전부 다 잘 풀렸다고 말이다. 그럼 아마도 그는 제 일처럼 기뻐하겠지.
커다란 짐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 * *
그 시각, 라파엘은 유다와 조슈아를 이끌고 절벽 길을 오르고 있었다. 유독 체력이 저질인 유다가 헉헉댔다.
“허억, 허억…… 켁켁.”
“괜찮습니까, 유다 님?”
“괜찮…… 허억, 휴. 아니, 안 괜찮습니다. 보스, 잠깐 쉬었다가…….”
“잔말 말고 걸어.”
악덕 보스 라파엘은 유다의 숨이 넘어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절벽 길을 올랐다.
유다는 거의 반시체 상태로 조슈아의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만약 조슈아가 없었더라면 유다는 이 인적 없는 길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힘들어하는 상태였다.
“다 왔군.”
라파엘은 숨 가쁜 기색 하나 없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외딴 섬나라 드와이 중에서도 지형이 험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이름도 없는 절벽 위 저택이었다.
라파엘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저택의 문을 망설임 없이 열고 들어갔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웰컴 탄환이 라파엘을 맞이해 주었다.
“어머, 너였구나?”
“……알면서도 총을 쏩니까.”
구불거리는 금발, 별을 박아 넣은 듯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미녀가 2층에서 엽총을 거두며 키득키득 웃었다. 태평한 라파엘과 달리 조슈아와 유다는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여자는 겁에 질린 둘을 보며 물었다.
“저것들은 뭐야?”
“제 부하들입니다.”
“나한테 주려고?”
“설마. 당신을 모시기 위해서 데려온 겁니다.”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모시다니. 여자는 드와이에서 나갈 수가 없다. 라파엘이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라파엘은 2층을 올려다보며 설명했다.
“당신 동생이 제 고용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율리시즈가? 어마마마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예비 황태자비와 황태자 전하께서 작당하고 폐하를 시해하려 들었습니다.”
“……뭐라고?”
빠직. 여자가 쥔 난간이 부서졌다. 손에 돌가루가 박혀도 여자는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이를 아득 갈았다.
“상태는 어떠시지?”
“아직 돌아가시진 않았지만 시간문제일 겁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제 의뢰인과 폐하를 동시에 처리할 요량 같아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네 의뢰인을 살려 주면 어마마마도 살 수 있다 이거니?”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율리시즈 황태자를 몰아내야 황제 폐하께서 살 수 있다는 말이죠. 제 의뢰인을 구하는 건 폐하를 구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라파엘이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고 머리를 꼬았다.
“그런데 말이야. 난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는걸.”
“……거절하겠다고요?”
“알잖아. 나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거.”
여자가 킥킥 웃었다. 저 여자가 협조적으로 나올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큰 한숨을 쉬며 품에서 푸른 벨벳 상자를 꺼내 여자에게 보였다.
“제게 협조하신다면 이걸 드리도록 하죠.”
“그게 뭔데?”
“당신이 파그라시움에 가짜를 흘려보낼 정도로 탐내 하던 것입니다.”
“……!”
여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동안 별짓을 다 해도 라파엘이 저걸 제게 넘기는 일이 없었는데, 저걸 주겠다고? 이쯤 되니 여자는 라파엘의 의뢰인이 궁금해졌다.
“네 의뢰인이 누구길래?”
“프라비체 공녀님이십니다.”
스산하게 빛나던 여자의 눈이 순간 유해졌다.
여자도 이블린 프라비체를 안다. 황궁에 자주 놀러오던, 새끼 고양이처럼 귀여운 아이였다. 저를 볼 때마다 언니, 언니 거리며 잘 따르던 기억이 있다.
눈엣가시 같은 율리시즈를 몰아내면 그토록 탐내던 물건도 구할 수 있고, 어마마마도 구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여자가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왔다.
“출발하기 전에 그것부터 부수고 가죠.”
“아, 맞다.”
여자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팔목을 들어 올렸다. 여자의 손목에는 마치 수갑처럼 딱 붙어 있는 팔찌가 반짝였다.
“유다.”
“네, 보스.”
라파엘의 명령에 유다는 양해를 구하는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고, 여자는 기꺼이 팔을 내밀었다.
유다의 손짓 한 번에 팔찌는 빠각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여자를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
“가자, 안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