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99화
“아가씨,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아.”
눈을 뜨니 이미 훤한 대낮이었다.
어제 언제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어도 이 시간에 일어났다는 건 꽤나 잤다는 뜻인데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묘하게 더운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내 모습과 겉모습도 딱히 소피가 커튼을 걷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래?”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 드려야겠군요.”
“그래, 그렇게 해 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피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웠다.
안 그래도 프라비체 일가 얼굴을 보기 껄끄러웠는데, 소피가 먼저 말을 꺼내 줘서 다행이었다.
소피가 가져올 식사를 기다리려 주섬주섬 일어나려던 그 순간, 이불에 스친 부위가 따끔따끔 아파 왔다.
‘헉, 설마.’
몸이 무거운 것 같은데다 덥더라니, 몸살인가?
‘옥살이가 힘들긴 힘들었나 보네.’
어쩜 이렇게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몸살이라니. 역시 세계관 최강 약골 이블린이다.
‘거기에 내 스트레스가 더해지니 최강이구만.’
나는 일어나는 걸 포기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확히 말하면 몸살이라는 걸 자각하자마자 몸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맞았다.
잠시 후 소피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어, 들어와…….”
나는 물 먹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은쟁반을 들고 들어온 소피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는 익숙하다는 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으셨습니까.”
“……일어나기 힘들어서 그런 거거든?”
“부축해 드릴 테니 일어나십…… 아가씨?”
소피가 한숨과 함께 내 팔을 부축한 그 순간, 소피는 뒤늦게 내 몸에서 열이 펄펄 끓는다는 걸 알아챘다.
“아가씨, 열이…….”
요즘 소피의 인간다운 표정을 참 많이 보네.
소피가 내 이마를 짚은 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 좀 재밌었다.
나는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며 신신당부를 했다.
“나 아픈 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알겠지…….”
“아, 아가씨!”
소피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나는 시야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그 시각 프라비체 일가는 웬일로 오찬을 함께한 것도 모자라 식사를 마치고서도 누구 하나 자리를 일어서는 일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답답한 네 명의 피붙이들을 보며 오르페시아가 혀를 찼다.
“나 같으면 손가락만 쪽쪽 빨면서 기다리느니 찾아가서 식사라도 같이하자고 그랬을 거다.”
뜨끔. 정곡을 찔린 네 명이 똑같이 눈동자를 굴리며 오르페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으유, 답답이들. 오르페시아는 그렇게 꿍얼거리더니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마저 불평했다.
“이미 점심이 훌쩍 지났으니 저녁에라도 말 걸어 보든지. 난 이만 일어나 볼란다.”
“같이 가요, 자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오르페시아의 뒤를 피에르가 졸졸 쫓아갔다.
식당에 오도카니 남겨진 네 사람은 서로에게 중대한 역할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형, 네가 걔한테 가서 저녁 같이 먹자고 말해 봐.”
“내가? 그 아이가 잘 따랐던 건 너 아니냐. 내가 가봤자 욕먹을 거다.”
“요즘엔 걔가 내 눈치 본단 말이야! 그나마 형은 만만하잖아.”
“강경책을 쓸 거라면 차라리 아버지가 가는 게 낫지 않나?”
“……난 못 가. 여보, 차라리 당신이 가 주면…….”
“나도 차마 낯짝 좋게 그 아이에게 식사 같이하자고는 못 하겠는데.”
나이를 가리지 않고 서로에게 떠넘기는 모습이 참 프라비체다웠다.
결국 아주 공평한 방법, 제비뽑기로 이블린에게 식사 권유를 하러 갈 사람이 정해졌다.
당첨을 뜻하는 포크를 뽑은 순간부터 헨리는 울상이 되었다.
총대도 정해졌겠다, 타라는 드디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갈까.”
“예, 어머니.”
다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식당에서 죽치고 앉아 있느라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그렇게 네 명이 식당을 나선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피가 보였다.
소피는 사람 깐깐하게 뽑기로 유명한 프라비체 저택 내에서도 가장 일을 잘하는 하녀였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저렇게 티를 내고 다니지는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
안 좋은 일이 있음을 감지한 타라가 소피를 불러 세웠다.
“소피.”
“주, 주인님.”
소피가 프라비체 일가를 발견하고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늘 무표정했던 얼굴이 저렇게 망가질 수 있다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타라가 물었다.
“이블린은 아직 안 일어났나?”
“……예,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소피는 금방 목소리를 정돈하고 대답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타라는 눈썹을 들어 올린 채 소피를 떠보았다.
“저녁에는 내려와서 식사를 하라고 전해 주겠나?”
“그게…….”
“그게?”
타라가 소피의 말을 따라 하며 말끝을 올렸다.
소피는 직감했다. 이제 와서 거짓말을 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사실은…….”
“사실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아픈 걸 절대 말하지 말라는 이블린의 신신당부가 떠올랐지만 이미 다 들킨 거 방법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도 먹고 살아야죠. 어떻게 주인님께 거짓말을 해요.
프라비체 공작가에서 잘리더라도 얼마든지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소피는 괜히 그렇게 핑계를 댔다. 안 그러면 이블린이 나중에 일어나서 난리에 난리를 피울 테니까.
소피는 이블린에게 닿지도 않을 짧은 사과와 자기합리화를 끝낸 후 아까의 말을 이었다.
“사실은 아가씨께서 지금 몸살을 앓고 계십니다.”
“뭐?”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미루던 네 사람이 이번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블린의 방으로 달려갔다.
* * *
‘아, 죽겠네…….’
몸에는 힘이 안 들어가고 정신은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아파서 다행이라는 아까의 정신머리를 혼쭐내 주기라도 하는 듯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약…… 해열제라도 먹으면 좀 낫겠는데…….’
소피한테 이따 가져다 달라고 해야지, 라고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금희야, 괜찮니?”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들은 지 아주 오래된 목소리였어도 내 머리는 착실하게 그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 입에 담았다.
“엄마……?”
“그래, 금희야. 정신이 좀 들어?”
잠깐, 금희?
나는 뒤늦게 위화감을 느끼고 두 눈을 번쩍 떴다.
엄마였다. 이블린의 엄마 타라가 아니라, 김금희의 엄마.
뭐지? 나 분명 엄마랑 손절하고 집 나왔는데, 왜 여기에 엄마가 있지?
엄마는 내 이마를 걱정스럽게 짚었다. 차가운 감촉이 기분 좋아 아까까지 품던 의문은 싹 날아갔다.
“아직도 열이 펄펄 끓네. 집에 해열제가 있던가…….”
“엄마, 나 아파…….”
나도 모르게 아이 같은 칭얼거림이 입 밖으로 나왔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을 칭얼거림을 엄마는 그때만큼은 받아 주었다.
“그래. 오늘은 유치원 쉬자. 선생님한테는 말해 뒀으니까 걱정 말고 푹 쉬어.”
엄마는 내 이마에서 차게 식힌 수건을 갈아 주며 평소와는 다른 아주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금희야. 죽은 먹을 수 있겠어?”
“몰라……. 졸려…….”
“뭐라도 먹어야 약을 먹지. 자, 일어나서 한 숟갈이라도 들어 보자.”
엄마는 나를 일으키고는 후후 불어 식힌 소고기죽 한 숟가락을 내 입 앞에 갖다 주었다.
솔직히 너무 아파서 무슨 맛인지도 느낄 수 없었고, 무언가를 먹는 것조차 고역일 정도로 어질어질했지만 엄마가 기껏 나만을 위해 끓여준 죽을 버릴 수는 없었다.
힘들게 한 그릇을 겨우 비운 후 기다리고 있는 건 어린이용 시럽 해열제였다.
인공적인 딸기맛 뒤에 숨겨진 텁텁함에 나는 인상을 썼고, 엄마는 내게 물을 건네주었다.
물까지 꼴깍꼴깍 마신 뒤에야 나는 다시 누울 수 있었다.
“엄마, 나 이제 자도 돼……?”
“그래, 한숨 푹 자자. 자고 일어나면 좀 나을 거야.”
엄마는 드물게 상냥한 목소리로 내 배를 토닥여 주었다.
엄마는 평소에 내게 엄했지만 내가 아플 때만큼은 달랐다.
그래서 난 가끔 아프고 싶었다. 열이 펄펄 끓는 동안은 김금수 자식보다 내가 우선이 되곤 했으니까.
‘나중에 보니까 그것도 착각이었지만. 그때 그 소고기죽에 들어갔던 소고기…… 알고 보니 김금수 자식 소불고기 해 주고 남은 고기였지.’
어쩐지 코딱지만큼 들어갔더라니, 하고 내가 코웃음을 친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내가 그걸 알게 된 건 저녁에 잠깐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을 때,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보게 돼서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현실을 자각했다.
‘맞다. 나 김금희 아니지.’
이블린인 것도 아니지만 김금희인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를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는 건 세상에서 왕따를 당하는 기분과도 같았다.
참을 수 없이 서러워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아직 꿈속에 있는 건지, 엄마가 내 눈물을 닦아주며 엷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금희, 많이 아픈가 보네. 눈물까지 흘리고.”
“엄마…….”
“응, 엄마 여기 있어. 우리 금희, 안심하고 코 자자.”
나는 나중에 엄마가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를 위로해 주는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 손이 아니면 누구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비참한 기분에 나는 눈물을 멈추긴커녕 더 쏟아 내었다.
* * *
“엄마…… 엄마…….”
이블린은 열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엄마를 찾았다. 그녀가 찾는 게 타라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누구나가 알 수 있다.
타라와 헨리는 말없이 이블린을 지켜보았다.
아실이 숨을 헐떡이며 헛소리를 내뱉는 이블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분명 원래 가족들과 틀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더글러스 역시 이블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소곤소곤 말했는데도 시끄러웠는지, 이블린의 눈꺼풀이 살짝 올라갔다. 당황한 아실이 뒤늦게 입을 가렸다.
“아.”
“너 때문에 깼잖나, 아실.”
“형 때문이잖아!”
더글러스의 책임 전가에 아실이 조그맣게 떽떽거렸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두 아들놈을 치우고 타라가 앞에 나섰다.
“정신이 좀 드니?”
반도 뜨지 못한 눈으로 이블린은 프라비체 일가를 차례대로 훑어보더니 이내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또다시 누군가를 찾았다.
“엄마…….”
열에 들뜬 소리가 어쩐지 잠이 덜 깬 것 같았다.
홀로 얼마나 앓았을까. 그때 자신이 괜한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가 이렇게 혼자서 마음앓이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항상 밝은 모습이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마음의 병이 신체까지 번져 죽었다고 했지…….’
문득 불안해졌다. 설마 이번에도 그렇게 죽는 건 아니겠지.
진짜 얼굴도 모르는 아이지만 그렇게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몇 달뿐이었더라도 가족으로서 함께 살았던 정이 있다.
타라가 이블린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엄마 여기 있다.”
“아빠도 여기 있어.”
부부는 이심전심. 헨리 역시 똑같은 생각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블린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블린은 혹여 놓칠세라 헨리의 손을 꽈악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안쓰러워서일까, 안타까워서일까.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헨리는 홀린 듯 이블린이 덮은 이불 위를 토닥여 주었다.
아실과 더글러스 역시 아까보다 눈에 힘을 풀고 이블린을 간호했다. 물수건을 갈아 주는 건 그들의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이블린의 숨소리가 안정되며 새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실이 가장 눈에 띄게 안도했다.
“다행이다. 이제 좀 약효가 도나 봐요.”
“……그러게.”
헨리가 이블린을 토닥이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프라비체 일가는 저도 모르게 한시름 놓고 똑같은 마음으로 웃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역시 자신들은 이 아이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