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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돈 쓰는 게 일이랍니다 (98)화 (98/154)

98화 - 98화

회장님처럼 앉아 대화를 시작하려던 오르페시아는 구석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을 굴리던 소피를 향해 말했다.

“아, 자네는 나가 봐도 되네.”

이 무거운 분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 소피는 냉큼 허리를 숙였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소피는 튀었다.

순간 나도 그런 소피를 따라 퇴장하고 싶었지만 어림도 없는 바람이었다.

오르페시아가 느긋한 사자처럼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음, 그래.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꼬. 혹시 먼저 말 하고 싶은 사람 있나?”

“저요.”

가장 먼저 손을 든 건 타라였다.

그녀가 무엇을 물어볼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너는 어쩌다 이블린의 몸에 들어오게 됐니?”

그런데 이런 얘기를 오르페시아가 있는 데에서 해도 돼?

나는 급하게 오르페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오르페시아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주 평안해 보였다.

그리고 오르페시아에게도 알 권리가 있다. 오르페시아는 이블린의 할머니가 아닌가.

그렇게 내가 입을 열려던 순간,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헨리였다.

움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손이 떨렸다.

‘아냐, 김금희. 죄지었어? 당당히 굴어.’

나는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고 최대한 담담하게, 쫄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저도 몰라요. 죽은 줄 알았는데 눈 떠 보니까 여기였으니까요.”

“죽었다고?”

그건 생각 못 했다는 듯 아실이 언성을 높였다. 당장이라도 이것저것 캐묻고 싶어 하는 아실을 한 손으로 저지하고 타라가 마저 질문했다.

“어쩌다 죽게 됐지?”

여기가 취조실인가? 순간 헷갈렸다.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고, 나는 본의가 아니더라도 그 몸을 차지했으니 최대한 내 결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암으로요.”

“암?”

아, 여긴 암이라는 개념이 없나.

나는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간단하게 풀어서 덧붙였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걸리는 병이에요.”

정말로 스트레스만으로 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의학적 지식이랄 게 없으니 그냥 그런 걸로 치고 얼버무렸다.

그런데 설마 내가 그런 병으로 죽었다고는 상상하지 못한 걸까, 아실이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대체 뭐에 스트레스를 받았길래 그런 병까지 걸려서 죽은 거야?”

그리고 나는 울컥한 걸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김씨 가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냐, 울지 마. 약해 보이잖아!’

그렇게 내가 두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너, 너 울어?”

“……!”

망할. 내 눈물샘은 튼튼한 편이라 눈물 한 방울 안 흘렀을 텐데 어떻게 안 거지.

사람은 보통 너 울어? 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눈물샘을 억제하기 어렵다.

결국 투둑, 하고 손등에 내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걸 보고 더글러스가 아실의 등을 후려쳤다.

“너는 왜 애를 울리냐.”

“아, 아니! 이게 그렇게 울 만한 질문이야!?”

여기서 악당의 면모를 다 보게 되네.

당연히 울 만한 질문이지. 하지만 저들이 이해해 줄 리는 없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대답했다.

“가족 때문이에요.”

“가족?”

설마 가족 때문에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오르페시아까지 눈이 커다래졌다.

“도대체 어찌하면 가족들 때문에 죽을 병에 걸려?”

결국 이 이야기까지 해야 되는구나.

나는 눈을 천천히 굴리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차마 그들의 얼굴을 보고 말할 수는 없는 수치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저한테 큰돈이 생긴 날부터였어요.”

원래도 손절하고 싶던 인간들을 정말로 손절할 수밖에 없게 된 그날의 일을 나는 히끅거리며 모두 입에 담았다.

“……병이 진행될 대로 진행돼서 치료는 어느 순간 포기했어요. 그렇게 죽고 눈을 떠 보니까 저는 여기로 와 있었어요.”

여기가 내가 읽은 책 속의 세상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딱히 해도 되지 않을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적막을 깨고 오르페시아가 감상평을 남기듯 입을 열었다.

“그것참 교육 못 받은 자들이로구나. 어찌 지들 막내딸한테 그랬다니?”

“제가 살던 곳은 원래 딸 착취하는 게 너무 당연한 곳이에요.”

딱히 동정표를 사려고 한 발언은 아닌데, 여기저기서 동정 어린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어쩐지 길거리에서 동냥하며 살아가는 걸인이 된 것 같아 창피해졌다.

나는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당당한 척 스스로를 변호했다.

“제 사정이 어찌 되었든 따님의 몸을 빼앗게 된 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죽었다고 남의 몸으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가 사는 곳은 흑마법은커녕 마법도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제가 이블린의 몸에 들어오게 된 과정에서 제가 쓴 술수는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속이게 되어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에 대한 그들의 원망을 최대한 덜어 보기 위함도 있었고, 프라비체 일가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나 보다.

“죄송하지만 장모님,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천하의 이블린 프라비체가 고개를 숙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헨리가 충격 받은 얼굴로 먼저 방을 뛰쳐나갔다.

이어서 아실과 더글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님, 저도 먼저 일어나 볼게요.”

“……저도 일어나 보겠습니다.”

오르페시아는 떠나려는 이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푹 숙인 시선 끝에 타라까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쉬거라.”

유일하게 타라만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 주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와 문을 닫을 때의 소리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을 보아 나를 한순간 돌아보았던 것 같다.

북적북적했던 방이 순식간에 휑해졌다.

“…….”

내게 가해지는 압박이 사라지니 그나마 좀 숨통이 트였지만 이내 아까 압박의 크기만큼 서러워졌다.

내가 일부러 이블린의 몸을 빼앗은 게 아니라 해도 그들의 눈에 나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다.

“……흡.”

나는 붉어진 눈시울을 가리기 위해 더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오르페시아가 내게 위로를 건네왔다.

“너무 상처 받지 말거라, 아가. 저들에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는데 너를 원망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

나는 바닥을 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왜 다들 제가 진짜 이블린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는 걸까요. 처음부터 들키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좀 더 나았을 텐데.”

“직접 낳은 자식 하나 알아보지 못하면 안 되지 않겠니.”

“……제 진짜 부모님은 내가 바뀌어도 못 알아봤을걸요. 당신들이 특별한 거예요.”

보통 빙의물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빙의했다는 사실을 쉬이 들키지 않는다. 그런데 프라비체 일가는 만나는 인간들마다 내가 이블린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프라비체 일가에게서 이블린을 빼앗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물었다.

“원래 이블린을 불러올 방법은 없어요?”

오르페시아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내게 다가오더니, 처질 대로 처진 내 어깨를 다독여 주며 말했다.

“슬프지만 없구나.”

……손길이 다정하기에 희망적인 대답을 기대했더니만.

오르페시아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르페시아가 아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 흑마법은 모두 대가가 있다는 것 알고 있지?”

“……네.”

“진짜 이블린이 무얼 위해 널 불러 놓고 사라졌는지 모르겠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르페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힌트를 내어 주었다.

“이블린은 그래 보여도 제 가족 하나는 끔찍하게 아꼈어. 그러니 답도 간단하지.”

“가족을 위해 날 불렀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가짜인 제가 어떻게 이블린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겠어요.”

“물론 너는 진짜 이블린이 될 수는 없지. 그럴 필요도 없어.”

“……?”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오르페시아를 올려다보았다. 오르페시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은 일단 자는 게 좋겠구나.”

오르페시아가 대답을 얼버무렸다.

뭐야, 알려 줄 것처럼 굴어 놓고 왜 안 알려 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히 지금의 나는 당장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보다 휴식이 필요했다.

“그럼 쉬거라, 이블린.”

“…….”

내가 이블린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나를 이블린으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는 살면서 이렇게 큰 문제를 직면해 본 적이 없었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비틀리면 화를 내고 뒤돌아섰다. 다시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회피하고만 살았던 나는 도저히 이 상황을 견뎌 낼 수가 없었다.

‘일단 잘까…….’

여기서 눈물이나 짠다고 해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침대까지 터벅터벅 걸어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그래, 그래도 전보다 상황은 나아. 내가 밝힐 수 있는 사실은 전부 다 밝혔어.’

아까까지는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는데, 웃기게도 이제 와서는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 한편이 공허하기도 했다.

나는 폭신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어딘가 숨어 있다가 나온 금희가 내 머리맡에 올라와 골골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괜히 나를 여기로 떠민 라파엘을 원망했다.

‘라파엘 이 멍청이. 잘 풀리긴 뭐가 잘 풀려.’

나를 원망하고 싶은 사람들의 집에서 지새우는 밤은 지독하게 길고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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