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97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네 명은 식당을 나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올라갔다.
캬아아앙! 왜애애애앵!
이블린의 방 앞에 다다르니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아까보다 더 소름 끼치게 고막에 와 닿았다.
쾅쾅! 아실과 헨리가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들겼다.
“이블린! 무슨 일이야!”
“문 열어, 얼른!”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결국 무력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타라와 더글러스가 나섰다.
“비켜라, 아실!”
쿵! 타라와 더글러스가 몸을 날렸다.
단단해도 너무 단단한 문은 괴물 같은 힘을 가진 모자가 세 번 정도 몸을 부딪치고 나서야 겨우 넘어졌다.
“이블린!”
문이 넘어지자마자 헨리가 목이 터져라 이블린을 찾았으나 그럴 필요도 없이, 이블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 한가운데에서 소피의 뒤에 숨어 있었다.
“뭐, 뭐야?”
“어, 어라?”
아까의 절박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헨리의 말끝이 이상하게 올라갔다.
큰일이 난 것 아니었나?
모두가 당황한 상황, 지금 이 시각 피해자라는 입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블린이 난데없이 문을 부수고 온 악당들에게 따졌다.
“멀쩡한 문은 왜 부수고 들어와, 노크 몰라?”
“아, 아니. 우린 네게 큰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아실이 드디어 이블린 앞에서 말다운 말을 내뱉었지만 이블린의 기분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질러진 방 안,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와 짐이라도 싸고 있었던 듯 열려 있는 트렁크.
“너 그 짐 뭐야! 설마 또 가출이라도 하려 했던 거니!?”
버벅거리는 아실을 치우다시피 밀치고 헨리가 성난 얼굴로 물었다. 얼떨결에 혼난 이블린은 억울한지 눈썹을 찌푸리고 가시가 잔뜩 돋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파엘이 짐을 보내놨기에 풀어 놓고 있던 것뿐이었는데.”
“어, 어?”
가출이 아니야? 사실 확인을 위해 헨리는 이블린의 옆에 있던 소피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실이라는 듯 소피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의문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는지 헨리가 재차 물었다.
“……그럼 고양이 울음소리는?”
이블린이 퀭한 얼굴로 금희를 가리켰다.
“쟤가 트렁크에서 안 나오겠다고 떼쓰는 소리.”
이블린이 가리킨 곳에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트렁크에 네모나게 자리 잡은 거대 까만 식빵 고양이가 있었다.
골골골골.
심지어 제 몸에 꼭 맞는 커다란 상자를 드디어 차지했다는 게 기분이 좋은지 금희는 눈치 없는 골골송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 * *
바로 몇십 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다.
식당을 패기롭게 뛰쳐나온 건 좋았으나 체력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심지어 체해도 단단히 체한 상태에서 무슨 패기로 4층을 뛰어 올라왔는지.
나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침실의 문을 열었고, 그러기 무섭게 발치에 익숙하고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엥……?”
설마 여기 있을 리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기대를 품고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기대한 만큼의 기쁨을 얻었다.
“금희야!”
왜오옹.
나는 프라비체 저택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금희는 골골거리며 하루 동안 나를 못 본 만큼 열심히 내 드레스에 털을 묻혀 놨다.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금희뿐만이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소피?”
내 당황 섞인 부름에 언제나처럼 소피가 허리를 숙이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셀레스티안 저택에 있어야 할 금희랑 소피가 어떻게 여기 있지? 내가 묻기도 전에 소피가 AI 기계처럼 대답했다.
“후작님의 명령으로 다시 복귀하였습니다.”
찌이잉. 격한 감동에 가슴이 죄여 왔다.
사실 라파엘이 날 프라비체 저택으로 떠밀었을 땐 쪼끔 원망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이 지옥으로 날 떠밀어야 했나, 하며 말이다.
그런데 뒤에서는 이렇게 미리 금희와 소피를 옮겨 놓다니. 칭찬 받아 마땅하다.
서프라이즈 감동 이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피는 두 눈을 그렁거리는 내게 하얀 알약과 시원한 물 한 컵을 내밀었다. 영문을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소피가 말했다.
“소화제입니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어, 어떻게 알았어?”
“아직도 가족분들과 냉전 중이시잖아요. 불편한 식사에선 누구라도 체하지요.”
소피의 행동은 ‘내’가 아닌 ‘이블린’을 위해서다. 그렇지만 감동 받은 건 감동 받은 거였다.
“고마워, 소피이…….”
오늘따라 소피에게 잘해 주고 싶네. 나는 소피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런데 이 배은망덕한 하녀는 주인의 포옹을 받는 대신 내 입안에 냅다 알약을 집어넣었다.
“읍.”
“징그럽게 왜 이러십니까, 아가씨. 약이나 드세요.”
누가 봐도 지금은 감동의 포옹을 할 타이밍이잖아. 하여튼 소피 저 로봇같이 딱딱한 지지배, 라고 꿍얼대려던 순간이었다.
“물도 드시고요.”
소피가 손수 내 입에 컵을 대령해 주었다.
‘……방금 이 행동 덕에 로봇같이 딱딱한 지지배, 에서 로봇같이 딱딱한 하녀로 신분 상승한 줄 알아라.’
그래도 주인 입에 이 쓴 약을 억지로 쑤셔넣은 죄는 치러야 했다.
내가 오늘에야말로 주인으로서의 위엄을 보여 주려 입을 연 그때였다.
“드셨으니 이제 누우셔야죠. 오늘만 특별히 봐 드립니다.”
소피가 카우치를 가리키며 나를 조련했다.
평소엔 먹고 바로 눕기 따윈 못 하게 했으면서, 자기도 쫄렸나 보지?
심지어 금희까지 번쩍 들어 내 가슴 위에 올려 두었다. 금희는 갑자기 들려져 바뀌어 놀란 듯했지만 이윽고 내 가슴 위라는 걸 깨달았는지 눈을 감고 골골댔다.
소피의 배려는 눈물을 저절로 글썽이게 만들 정도로 고마웠지만.
“나 다리 저려.”
금희가 이제 13킬로다.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힘겨워하는 내 모습에 소피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는 얼굴로 아차 했다.
로봇 같은 소피에게서 저런 표정을 보게 되다니. 소피도 아닌 척 어지간히 내가 걱정되었나 보다.
“어, 음……. 그, 어떡하죠.”
소피는 고장난 기계처럼 삐걱댔다. 자기 몸무게 가지고 뒷담을 한다고 느꼈는지 금희가 내 가슴과 명치를 밟고는 내 허벅지를 발판 삼아 힘차게 뛰어내렸다.
“악!”
“아가씨!”
와, 장난 아니고 진짜 허벅지 잘리는 줄 알았다. 나는 금희를 홱 쏘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금희 너!”
흥. 금희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불쾌하다는 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아오, 얄미워!”
왕와웅.
말대꾸를 짧게 한 금희가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피는 사죄를 담아 다리를 마사지해 주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알면 잘 좀 주물러 봐. 옳지, 거기.”
소피의 마사지는 참 신기했다.
웬만한 부티크에서 받는 마사지보다도 심신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걱정까지는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필살 마사지 기술을 선보였는데도 내 기분이 풀어지지 않으니 소피는 다른 뇌물을 바칠 준비를 했다.
“따뜻한 우유라도 갖다 드릴까요?”
“우유는 무슨 우유야. 술…….”
술이나 갖다 달라고 말하려던 나는 소피의 찌릿 한 번에 쿠션을 끌어안으며 변명했다.
“농담이거든.”
“그러셔야지요.”
소피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참 징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술 먹고 내가 벌인 일들이 얼마나 많나.
나는 체한 내 손끝을 열심히 마사지해 주는 소피를 나지막이 불렀다.
“소피.”
“예, 아가씨.”
“나 그냥 다시 라파엘네 저택으로 돌아가면 안 돼?”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게 뻔하지만 말이라도 꺼내 보았다. 가족들이 걱정할 거라는 대답을 예상했건만, 소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재판까지 셀레스티안 저택은 당분간 비어 있을 텐데요.”
“……뭐?”
비어 있다고? 왜? 소피는 차분하게 라파엘에게 전달받은 사항을 내게 알려 주었다.
“아가씨의 재판 준비를 하느라 당분간 저택을 비울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금희 아가씨를 프라비체 저택으로 되돌려 보낸 거고요.”
“도대체 뭘 준비하려고 저택을 비워? 파그라시움에도 없대?”
“그것까진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다는군요.”
도대체 뭘 하길래 그때까지 자리를 비워?
불안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개인플 하지 말라니까 또 개인플 하고 있네.’
이러다가 발푸르기스의 밤 꼴이 나면 어떡하지.
“아가씨께서 머물고 싶으시다면야 얼마든지 머물다 가라고 하시긴 했지만…… 아가씨는 후작님을 뵙고 싶은 거잖아요?”
“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는 게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심정이었다. 나는 말을 버벅이며 소리쳤다.
“내, 내가 걔를 보고 싶어 한다고? 왜? 안 그런데?”
소피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피의 얼굴이 이렇게 얄미웠던가? 나는 이 건방진 하녀에게 주인의 위엄을 보여 주었다.
“감히 나에 대해 아는 체를 해!? 당장 그 말 취소해!”
“네네. 취소하겠습니다. 아가씨의 감정은 취소가 안 되시겠지만 제 말은 취소가 가능하죠.”
“아오, 저게 진짜!”
열불이 난 나는 카우치를 퍽퍽 쳐대며 분통을 표현했고, 소피는 아무 말도 안 한 척, 후다닥 내게서 떨어져 라파엘의 저택에서 가져온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내 방의 문짝이 부서지게 된 원인이 발생하였다.
와우우웅.
철푸덕.
금희가 내 옷가지에 다이빙을 한 것이다.
언니랑 붙어 있고 싶은데 언니는 약골이라 자신을 받아 주지 못하니 옷에라도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금희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방 한가운데에 떡하니 펼쳐진 트렁크에 자리를 잡았다.
방 안이 어질러지는 건 죽어도 못 보는 소피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가씨. 도와주세요.”
“내가 왜? 나 약골이라 금희 어떻게 못 해. 네가 해. 너 금희 번쩍번쩍 잘 들잖아.”
어떠냐, 아까의 복수다. 나는 얄밉게 한쪽 눈꺼풀을 내리며 날름 혀를 내보였다.
“그럼 제가 금희 아가씨께 손대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그래라, 어디. 금희가 트렁크 안에서 쉽게 나오나 보자.”
금희는 내 말만 들었다. 심지어 금희가 워낙 커야 말이지, 금희 몸에 딱 맞는 상자란 저 트렁크 말고는 없었다.
얼마 만에 제 몸에 꼭 맞는 상자를 찾았는데, 아마 쉽게 안 나올걸?
예상대로 소피가 금희를 들자마자 금희는 온갖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캬오오옹! 왜애애앵!
“제발 좀, 금희 아가씨! 나오세요! 정리해야 합니다!”
우애애애앵!
“어머~ 우리 금희, 목청도 좋아.”
남의 곤란한 상황을 보고 키득댄 벌이었을까.
밖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내가 뭘 할 새도 없이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고양이의 생떼 소리 하나에 문짝이 부서지게 된 지금.
“…….”
모두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어? 오해였네. 쉬는데 방해해서 미안.
아냐, 문 제대로 닫고 나가.
이렇게 상황이 종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프게도 그렇게 끝내기엔 문짝이 처참하게 부서진 후였다.
이 답 없는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서로의 눈치만 보는 우리의 앞에 현자가 나타났다.
“어이쿠. 목청이 왜 이렇게 크나 했더니만 정말로 큰 고양이였네.”
오르페시아는 지금 이 난장판을 보고서도 태평하게 고양이에 대한 감상평을 우선 늘어놓았다. 부서진 문은 뒷전이었다.
“쯧. 또 멀쩡한 재산이나 부쉈군.”
딱! 오르페시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문은 언제 부서졌냐는 듯, 잔해 하나 남기지 않고 부서지기 전 그 상태로 되돌아갔다.
뭐, 뭐지. 오르페시아가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넋 놓고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 순간이었다.
쿵. 문이 굳게 잠겼다.
“뭐야, 문은 왜 잠가!”
“기왕 이렇게 모인 거 아까 못 다한 이야기라도 좀 할까 해서.”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오르페시아는 구세주가 아니라 지옥 불구덩이에서 온 악마라고 말이다.
제각각 일그러지는 얼굴들이 꽤 볼만한지 오르페시아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웃으며 우리를 지나쳤다.
“뭐하느냐? 다들 앉거라.”
오르페시아가 떡하니 상석을 차지하고는 느긋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