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96화
오르페시아에게 끌려가다시피 한 식당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자, 어서 먹자꾸나.”
나는 길쭉한 테이블 한가운데에 앉혀졌다. 냅킨이 무릎 위에 올라오고 양손에는 식기가 들려졌다.
“아가, 이 메추리부터 먹어 보렴. 고기가 아주 쫀득하게 잘 익었구나.”
“채소도 꼭꼭 씹어 먹어야 해. 할아비가 이 나이 먹고서도 여전한 미모를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채식이다.”
솔직히 아직 내 정체를 모르는 오르페시아와 피에르가 나를 이렇게 챙기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후식 배도 남겨 놓으렴. 네가 좋아하는 디저트도 있으니까.”
“깨작깨작 먹지 말고 팍팍 좀 먹어라. 속이 안 좋은 거라면 욕심부려서 먹지 말고 말을 하고.”
타라와 더글러스가 이러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둘은 이미 내가 이블린이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텐데?
식사가 넘어가지 않는 건 둘째 치고 헨리와 아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민폐라고 느껴져, 나는 괜히 성질을 부렸다.
“다들 좀 적당히 해. 나 감옥에서도 밥 잘 먹고 지냈거든?”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정보쯤은 이미 입수했다.”
“……쳇.”
“어른들을 만만히 보면 못써요, 아가. 딴 건 몰라도 밥 안 먹었는데 먹었다고 속이는 건 더 안 돼.”
오르페시아가 짐짓 엄한 얼굴로 나를 꾸짖었다. 한국인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다들 밥에 집착하지.
이 악당들은 악녀가 살찌든 말든 관심도 없는지 마구잡이로 내게 음식을 먹이려 들었고, 나는 헨리와 아실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헨리는 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아실은 나를 힐끗거리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나 때문에 불편한 거겠지.’
얼른 먹고 무슨 핑계를 대서든 라파엘네로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걸 들킨 건가, 내 왼편에 앉은 더글러스가 아주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아실은 네게 어떻게 말 붙여야 될지 몰라서 저런다.”
“뭐?”
“네가 먼저 말을 건다면 받아 주긴 할 테지.”
나는 멍하니 더글러스를 바라보았다. 더글러스는 내 집요한 시선에 당황하여 물었다.
“……왜 날 그렇게 보지?”
왜긴 왜야. 나만 보면 시비 걸기 바빴던 더글러스가 내가 감옥 갔다 오니 말투며 행동이 아실화 됐기 때문이지.
사실 더글러스의 태도가 썩 나쁘진 않았다. 사람이란 달면 탐욕스레 삼키고 쓰면 퉤퉤 뱉는 종족이고, 나는 특히나 그 습성이 심한 인간이었다.
‘물론 여태까지 날 엿 먹인 코딱지맛 젤리가 어느 순간 달달하게 리뉴얼 됐다고 해서 무리한 도전을 하지는 않을 거지만.’
정확히 말하면 못하는 거지만. 나는 더글러스의 진짜 동생이 아니니까.
마침 입에 넣은 샐러드가 썼다.
입맛이 확 달아났던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일어날게요.”
“아니 왜?”
아니나 다를까, 오르페시아를 선두로 내게 부지런히 음식을 권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허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배불러서.”
나는 진짜 이블린도 아니면서 그들의 배려를 받는 게 죄송스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여기서 나를 보낼 수는 없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소리쳤다.
“아가! 이것까지만 먹고 가!”
“이 샐러드도!”
“내가 덜어 준 건…….”
“…….”
이 인간들도 참 징하다.
하지만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태평하게 저 가족 식사 자리에 낄 염치가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피곤해서 이만 잘게.”
“아이고, 이블린!”
쾅! 내게 상냥히 대해 준 오르페시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면 오르페시아도 나를 조금쯤은 양심이 있다고 해 주지 않을까.
나는 그대로 4층에 있는 본래 이블린의 방까지 뛰어 올라갔다.
* * *
이블린이 도망치듯 빠져나간 식당은 기다렸다는 듯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쯧!”
오르페시아는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그 소리에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쉽게 식사를 이을 생각을 못 했다.
“자기, 이거라도 좀 먹어 봐요. 응?”
유일하게 오르페시아의 기분을 풀 수 있는 피에르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덜어 주며 달래 주려 애썼지만 이미 오르페시아의 기분은 상할 대로 상해 식사할 기분이 아니게 된 지 오래였다.
탁! 오르페시아는 큰 소리로 포크를 내려놓고 헨리를 노려보았다.
“헨리, 자네.”
“예, 예! 장모님.”
멍하니 그릇만 쳐다보고 있던 헨리가 군기 바짝 잡힌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오르페시아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설교를 시작했다.
“자네는 막내딸이 힘든 옥살이를 하고 왔는데, 그런 식으로밖에 못 하나?”
“어머니, 거긴 사정이…….”
“사정은 무슨 사정!”
타라의 변호는 호통에 잡아 먹혔다.
오르페시아 입장에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이 홀대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자네 자식 그리 대하라고 타라와의 결혼을 허락해 준 줄 아나?”
공기가 얼어붙었다.
오르페시아가 타라의 결혼을 얼마나 반대했는지, 그리고 헨리를 얼마나 탐탁지 않게 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다.
상드리움을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오르페시아는 발걸음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런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헨리 자네. 결혼 전에 내가 분명 말한 적이 있었지. 나는 생물학적 친부라는 작자에게 홀대 받고 살았다고 말이야.”
“……예, 분명 그러셨습니다.”
헨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기억이 안 나겠는가. 헨리가 타라와 결혼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오르페시아는 그때 헨리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입에 담았던 말들을 똑같이 읊었다.
“자네가 그랬지. 자신은 결코 내 아비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뭣하면 옆에서 자네를 감시해도 좋다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자네가 탐탁지 않았지만 결국 타라와의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은퇴해서도 자네의 행동거지를 보고 드와이로 떠나도 괜찮겠다 싶어 마음 놓고 떠났어! 그런데 지금은 뭐지? 자네는 지금 이 상황이 상식적이라 생각하나?”
“…….”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 상황만 놓고 보자면 오르페시아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오르페시아는 지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상황이다. 울컥한 헨리가 지금 이블린은 진짜 이블린이 아니라고, 눈을 그렁이며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왜, 그 아이가 네 진짜 딸이 아니라서 그러냐?”
“……!”
오르페시아의 비웃음 섞인 물음에 쨍그랑, 여기저기서 식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오르페시아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눈치였다. 헨리는 그만 숨 쉬는 법도 잊고 말았고, 타라는 드물게 말까지 더듬으며 충격 받았다는 얼굴을 보였다.
“어, 어머니. 어떻게 그걸…….”
타라는 결코 오르페시아 부부에게 지금 이블린이 진짜 이블린이 아니란 소리를 한 적이 없다. 애초에 이블린의 재판에 저들을 부를 생각도 없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고 무슨 목적으로 온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유추해 낼 수 없었다.
오르페시아는 이 성의 왕인 타라를 손바닥 안에 펼쳐 놓고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둘까지만 알고 열은 모르는 건 여전하구나. 그래 가지고 프라비체를 제대로 이끌 수야 있겠느냐?”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있잖아, 엄마!”
급기야 타라의 입에서 생전 나오지 않던 반말이 나왔다.
타라의 성질머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오르페시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내가 흑마법사니까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
“흑마법사라고? 엄마가?”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타라의 목소리가 천장을 뚫을 뻔했다.
생전 처음 안 사실이다. 30년을 같이 살았는데 어떻게 딸한테 그 중요한 사실을 숨길 수가 있어?
타라는 고개를 돌려 피에르를 노려보았다. 피에르는 마치 뭘 훔치다 걸린 도둑처럼 어깨를 떨더니 작은 휘파람과 함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저 부부가 진짜, 작정하고 나를 속였구나!
왠지 이상했다. 드와이에서 상드리움으로 순식간에 온 것도 그렇고,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이블린에게 마력 진단을 받아 보자던 말도 그렇고!
타라가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언제부터야?”
“언제부터긴. 그것까진 네가 알 필요 없다.”
오르페시아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헨리를 노려보며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독촉했다.
“헨리. 다시 물을 테니 대답해 보거라. 지금 자네의 태도는 그 아이가 진짜 이블린이 아니라 그런 거냐 물었다.”
“……맞습니다.”
헨리가 입술을 꾹 물며 대답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대답에 오르페시아는 아까처럼 호통을 치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헨리 자네. 그 아이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어본 겐가?”
헨리는 변명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이야기는 들어 볼 생각이었습니다.”
“들어 보려던 사람의 태도가 그 모양일 수가 있다니, 놀랍구나.”
오르페시아의 비아냥에 헨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본 순간, 이야기를 들으려던 마음은 사라지고 감정이 북받쳤기 때문이다.
네가 내 딸의 목숨을 빼앗은 거니? 무슨 이유로? 우리 딸에게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겠다 했지만, 입만 열면 언제든지 저런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헨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르페시아의 눈에는 너무나도 훤했다.
“바보 같은 것. 여기서 이블린이 왜 죽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 있나?”
정적이 맴돌았다.
이블린이 왜 죽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이블린을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었던 네 가족은 우습게도 그녀가 왜 죽었는지만큼은 파헤칠 수 없었다.
무서웠다. 이블린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면, 이블린은 이제 정말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 겁쟁이들에게 프라비체의 왕이자 이블린의 유일한 이해자는 친히 대답을 알려 주었다.
“이블린이 죽은 이유는 그 아이가 흑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블린은 어렸을 때 아주 큰 마법을 썼더구나. 그 대가를 치른 게야.”
이블린이 그 정도로 큰 흑마법을 썼다고?
금시초문이었다.
장미 가시에 찔려 피 한 방울만 나도 피울 수 있는 모든 엄살을 피우며 자신을 찾던 이블린이, 어째서 흑마법을 쓴 것만큼은 말하지 않은 거지?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캬오오옹! 창밖에서 사나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실이 기가 죽다 말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길고양이가 들어왔나?”
“아니다. 위에서 들렸어.”
더글러스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아이가 데려온 검은 고양이가 이렇게까지 크게 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마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블린!”
할 수 있는 최악의 상상까지 도달한 헨리가 사색이 되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