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95화
“할머니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사정없이 볼이 문대진 채 소리치듯 물었다. 분명 선대 프라비체 부부는 은퇴 후 귀족들의 휴양지라고 알려진 드와이 섬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내 질문에 오르페시아는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버럭 호통을 쳤다.
“손녀딸이 구금됐다는데 당연히 할미가 구해 주러 와야지!”
미친, 나는 설마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밖에 나왔는데도 간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프라비체의 이름으로 간수들을 다 죽여 버린 건 아니겠지?
그러면 죄가 추가된다. 내가 시종을 매수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중죄다.
다행히 그건 아닌지 오르페시아의 뒤에 밀려나 있던 라파엘이 자세히 말해 주었다.
“감옥 구금에서 자택 근신으로 바뀐 것뿐입니다. 누굴 해치거나 한 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공녀님.”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라파엘이 핼쑥해 보이지?
나는 오르페시아의 기질을 떠올려 보았다. 오르페시아 역시 프라비체의 일원답게 끔찍한 손녀 바보였다.
“그런데 둘이 왜 같이 왔어?”
라파엘에게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손녀딸, 할미 오랜만에 보는데 자꾸 저놈한테만 관심 줄 게니?”
오르페시아가 내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투정을 부렸다.
내가 진짜 이블린도 아닌 거 다 들킨 마당에 이런 스킨십은 불편하다. 오르페시아의 손을 내 얼굴에서 떼어 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손에 힘이 왜 이렇게 없어. 못 본 새에 이렇게 삐쩍 말라가지고는 할미는 걱정이구나.”
게다가 이런 걱정까지 받았다.
‘망할, 이 집안은 이블린 빼고 다 힘이 왜 이렇게 세.’
이블린이 프라비체 전대미문의 약골인가.
아무래도 오르페시아를 떼어 내긴 글렀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오르페시아와 최대한 거리를 두며 투덜거렸다.
“왜 라파엘이랑 같이 왔는지나 말해 줘.”
“집에 돌아가서 말해 주마.”
오르페시아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척척 걸음을 옮겼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마트에서 집에 안 간다고 떼쓰는 아이처럼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집에 안 가!”
“뭐?”
“할머니 혼자 가, 난 라파엘네에 있을 거니까! 그치?”
내가 라파엘에게 눈빛으로 도움 신호를 보내자 오르페시아가 귀신같이 알고 저지했다.
“어허, 아가. 말이 되는 소리를. 후작은 따로 할 일이 있다고 집을 비운다는데, 거기에 있긴 뭘 있겠다고.”
“뭐? 무슨 할 일!”
“공녀님의 재판 준비로 잠깐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떼를 쓸 수도 없다. 하지만 프라비체 저택으로 돌아가는 건 무섭다. 거기에는 내 편이라곤 없으니까.
내가 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숙인 그 순간이었다.
“괜찮습니다, 공녀님.”
“……!”
라파엘이 어느샌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손이야 한두 번 잡나.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지?’
라파엘이 날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서인가? 아니면 지금 내게 라파엘이 꼭 필요해서 그런가?
이유야 어쨌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해 불만 하나 내뱉을 수가 없어졌다. 오르페시아가 못마땅하게 라파엘을 흘기긴 했지만 그는 기 하나 죽지 않고 내 손을 꼬옥 붙잡은 채 나를 다독여 주었다.
“분명 잘 풀릴 겁니다, 공녀님.”
……나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라파엘이 저렇게 말한다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집으로 갈게.”
“예.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라파엘의 응원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오르페시아에게 이끌려 귀갓길에 올랐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프라비체 저택은 변한 게 없었다.
“역시 사람은 익숙한 곳에서 쉬어야지. 안 그러냐, 아가?”
오르페시아는 고향에 돌아온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데 비해 나는 마치 교도소에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라파엘의 괜찮다는 다독임은 이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효력을 잃고 만 것이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상대가 프라비체라면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현명하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다 다굴을 당할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좋아. 일단 노공작부터 따돌려 볼까.’
힐을 벗어 던지고 전력 질주로 도망친 다음, 길거리에 나가 삯마차를 타고 라파엘네로 가자.
거기에 내 마음의 안정 금희가 있다.
마침 오르페시아는 향수를 느끼듯 저택의 장식품 하나하나를 둘러 보고 있었다.
‘좋아. 지금이다.’
힐을 벗어 던지기 위해 다리를 살짝 든 순간이었다.
“아가. 도망칠 생각 마라.”
뜨끔. 어떻게 알았지. 오르페시아는 마치 내가 다리를 내리길 기다리고 있는 듯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드레스 안에서 들어 올린 다리를 슬며시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오르페시아가 다시 걷기 시작했고, 나는 종종걸음으로 오르페시아의 뒤를 따르며 성질을 냈다.
“내가 언제 도망가려 했다고? 잠깐 걸음 좀 멈춘 거 갖고 그래? 힐이 벗겨지려 해서 그런 거거든?”
“힐을 벗어 던지고 도망가려 했지 않느냐? 할미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어요.”
그 정도면 괴물 아냐?
하지만 내가 도망가려고 한 걸 안 걸 보면 정말 괴물이 맞을지도.
아무래도 오르페시아가 있는 한 도망치긴 글렀다. 나는 방금 세운 도망 계획을 얌전히 걷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무거운 걸음걸이에서 눈치를 챈 건지, 오르페시아가 나지막이 나를 달랬다.
“다들 걱정하고 있다. 적어도 얼굴만이라도 보여 주렴.”
“…….”
저절로 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걱정은 무슨. 오히려 날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면 몰라.
저절로 가시 돋힌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노공작은 타라에게 이야기를 들었을까?’
내가 진짜 이블린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동시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내적 갈등을 겪는 사이, 우리는 언제나 가족들이 모이던 홀에 도착했다.
“자, 들어가자꾸나.”
오르페시아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의 심정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무거운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프라비체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왔구나, 이블린.”
내 예상과 다르게 내 귀에 가장 먼저 꽂힌 말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타라의 마중이었다.
조심스레 눈을 떠 보니 타라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르페시아는 쯧쯧 혀를 차며 타라를 흘겨보았다.
“어미는 안 보이니?”
“어머니 걱정을 내가 왜 해요.”
“이 지지배가?”
타라의 싹수없는 대답에 오르페시아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끝을 높였다.
싸움 나는 거 아냐? 내가 조마조마하게 오르페시아의 눈치를 살피려 눈동자를 굴린 그 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밀색 머리의 노신사와 눈이 마주쳤다.
“……?”
젊었을 적 미모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잘생긴 노신사였다. 다정한 녹색 눈은 어쩐지 헨리와 닮아 보이기도 했고, 라파엘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노신사는 마치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익숙하게 오르페시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달래 주었다.
“어서 와요, 자기. 뭘 또 오랜만에 와서 싸우려 그래요.”
“아니, 피에르. 저 지지배가 오랜만에 본 엄마한테 말을 저렇게 하잖아.”
“타라가 저러는 게 한두 번인가. 자기가 좀 봐 줘요. 응?”
노신사가 애교스럽게 오르페시아를 뒤에서 껴안았다.
이 노신사의 정체는 피에르 프라비체. 선대 프라비체 공작 부군이었다. 그는 오르페시아와 함께 나이테를 둘렀다는 것을 증명하듯 익숙하게 오르페시아의 화를 풀어 버렸다.
“내가 피에르 때문에 너 봐주는 줄 알아, 타라. 어?”
말투는 저래도 성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피에르는 소년처럼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오르페시아를 바라보았다.
그게 눈꼴 시려웠는지 타라는 마치 반항기의 아이처럼 별꼴이라는 듯 받아쳤다.
“어머니가 안 봐 줘 봤자예요, 이제.”
“저저, 저 지지배가 또?”
또 모녀 싸움이 시작되었다.
말려도 끝이 없겠다 싶었는지 피에르는 더는 싸움을 말리지 않고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환영해 주었다.
“오랜만이구나, 아가야. 고생 많았구나.”
“으, 응. 그렇지 뭐…….”
“자, 어서 앉자꾸나. 우리 손녀딸 발 아플라.”
나는 오르페시아와 피에르에게 호위를 받듯이 소파로 이끌려져 갔다.
하필이면 내 자리의 맞은편에는 헨리와 아실이 있었다.
내가 앉는 동안 헨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고, 아실은 나를 훔쳐보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홱 돌려 안 본 척 하기 바빴다.
옛날 같으면 내게 시비나 걸기 바빴을 더글러스가 헨리와 아실보다 먼저 내게 위로를 건네는 웃기는 상황이 펼쳐졌다.
“고생 많았다, 이블린. 조금 야위었군.”
“…….”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더글러스의 모든 말을 시비조로 받아쳤을 나 역시 아무런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이 묘한 공기를 읽어내지 못할 오르페시아가 아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나와 프라비체 일가를 둘러보며 혀를 끌끌 찼다.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구나.”
낮은 목소리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르페시아의 첫 표적은 헨리였다.
“헨리 자네. 지금 내 손녀딸을 홀대하는 겐가?”
“아, 아닙니다!”
헨리가 서둘러 고개를 들어 빠릿빠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오르페시아의 더더욱 호통을 쳤다.
“아니긴 뭘 아니야! 아실 너도 마찬가지다. 옥살이하다 온 애를 그리 무시해야 속이 시원하더냐?”
“제가 언제요……!”
다음 표적은 아실이었다.
망할, 이러다 오르페시아가 가고 나면 난 죽은 목숨이다.
내가 오르페시아를 저지하려던 그때였다.
꼬로로록.
“…….”
모두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악녀였다. 이렇게 요란하게 배꼽시계를 울리는 악녀라니, 있을 수가 없다.
그래도 오르페시아의 주의를 돌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런, 아가가 배고팠나 보구나.”
“그, 그게.”
“그러고 보니 감옥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 했겠지. 자, 가서 뭐라도 좀 먹자꾸나.”
손녀를 굶길 수 없다는 건 상드리움의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헨리와 아실이 공격당하는 상황만큼은 종료시켰으니 다행이었다.
내가 죽을 만큼 창피하다는 점 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