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사람과 사자와 황소와 독수리 (2)
이틀 후 사고가 일어났다. 도로 보수 공사 구간을 지나다 마차 바퀴가 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다행히 사람과 말 모두 무사했다. 속도도 느렸고 구덩이도 깊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바퀴와 축에는 상당한 손상이 간 듯했다.
마차는 듣기 거슬릴 정도로 삐걱거렸다. 마부가 불안해하는 말들을 열심히 달래고 얼른 덕분에 그럭저럭 나아가기는 했지만, 속도가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에 들러 수리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득보다 실이 더 컸다. 아무리 제국 직할령 도시라고 해도, 모든 곳에 보안국 지부가 설치된 것은 아니다. 전액 자비로 수리해야 하는 건 물론, 민감한 화물까지 죄다 꺼내서 안전하게 보관하는 건 머리 아픈 일이다.
카인은 고생하는 마부에게 웃돈을 조금 얹어주었다. 같은 보안국 소속인 마부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강권에 가까운 부탁에 결국 받아들였다. 대신 밤을 새워서라도 마사다 시에는 진입하는 조건이었다.
파열음은 커졌고, 마차는 조금씩 더 느려졌다. 횃불을 든 기마 순찰대는 말과 마부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제 갈 길을 갔다.
다행히 마차 축이 완전히 부러지기 전 마사다 시에 진입할 수 있었다. 오전 10시가 넘어서였다. 말과 마부 구하기는 쉬웠지만, 마차 수리는 꼬박 하루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축이 전부 뒤틀렸잖나. 이거 전부 교체해야 해. 조정과 마무리까지 하면 하루 정도 걸릴 거고.”
마사다 지부장이 혀를 끌끌 찼다. 카인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지부장도 카인 나이였을 때는 현장 요원이었고, 모든 돌발 상황에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물류량이 늘어나서 도로 사정이 영 좋질 않아. 방향을 보니 서부로 가는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더 나빠질 테니까 유념하라고.”
대형 캐러밴 때문이었다. 운송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과다하게 짐을 실은 마차가 늘어났고, 그 때문에 도로포장 함석에 금이 가 파손이 자주 일어난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일행은 적당한 숙소를 구할 수가 없었다. 마사다는 애당초 관광 도시도 아니었고 물류 중간 기착지에 가까웠다. 마부들이 말을 돌보고 잠시 쉬다가 길을 재촉하는, 수많은 중소 도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도로 공사 때문에 대형 캐러밴의 발이 묶였고, 그들이 숙소를 죄다 선점하는 바람에 이대로라면 길거리에서 자야 할 판이었다. 평소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보안국 지부 숙소도 살짝 알아보았지만, 애당초 거기는 빈자리가 없다고 했다.
보다 못한 마리아가 중재안을 내놓았다.
“정 그러면 수도원에서 하루 신세 지고 가지 뭐. 마사다에도 수도원은 있거든.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니까, 기부금 조금 내고 고기 삼 인분 사 들고 가면 별말은 안 할걸.”
“고기는 왜?”
“그래야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곳간 털고 갔다는 소리는 안 나올 것 아니냐.”
일리 있는 말에,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도시는 작았고, 시장까지는 그다지 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막 물건이 깔리는 와중인지라 조금 기다려야 했다.
일행은 적당히 나무가 드리워진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소도시 사람들 말고는 굳이 이런 곳에서 장을 볼 사람이 없어서인지, 인적은 드물었다. 아마 점심시간쯤에나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아질 터였다.
마침 딱 앉아 쉬기 적당한 바위가 있었다. 위쪽이 판판하고 열기를 받아 적당히 달궈져서, 한밤의 마차여행으로 인한 피로를 풀기에도 괜찮았다.
“저. 혹시. 그 수도원도 널빤지 침대에서 잡니까?”
오트란토 수도원에서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한 릴리가 마리아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응? 아냐. 볏짚 채운 매트리스일걸? 아무리 엄격과 청빈을 목표로 삼는 수도원이라고 해도, 그 정도 고행을 자처하는 곳은 아주 드물어. 마그데부르크 인근 수도원들이 유별나기는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야.”
“수도사가 ‘유별나다’라는 건 정확히 무슨 뜻이야? 굉장히 걱정되는데.”
“흥. 하. 다 나 같다는 뜻은 아니야.”
마리아가 카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다만 엄격주의파가 많이 배치된 건 사실이지. 빵을 하나만 먹어야 하는데 두 개 먹으면 밤새도록 불침번을 세우는 그런 엄격한 분위기 말이야.
부가 넘쳐나는 제국 남부 중앙 도로에서 교단의 정결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는데, 내 생각엔 그냥 마그데부르크로 가야 하는 부가 도중에 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 것 같아.
세속화된 수도원이 맛있는 걸 다 쏙쏙 빼먹으면 검의 경애 성지는 사골이나 우려먹고 있어야 할 것 아니겠어? 아니, 왜 그렇게 보냐?”
“생각보다 신랄해서.”
카인은 정직하게 답해주었다.
“아하. 그래?” 마리아가 카인의 턱을 손가락으로 슬쩍 짚었다.
“난 내가 굉장히 객관적인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머리와 눈썹, 수염 빡빡 민 이단심문관 보면 당장 도망쳐.”
“왜?”
“사람 여럿 구웠다는 뜻이니까. 털에 붙은 재는 잘 지워지지도 않거든. 예쁜 아가씨, 그렇게 겁먹을 것 없어! 난 누구 구운 적은 없거든. 아직은. 불 끄러 다닌 적은 많지만.”
“으스스하군요.” 릴리가 몸을 떨었다. “차라리 도끼로 목을 치는 게 낫지, 불에 태우다니요.”
“더 으스스한 건 따로 있어.”
“무엇입니까?”
“목이 잘릴 놈이든 불에 태워질 놈이든, 나는 죄인이니까 나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라고 고함치는 거. 그런 사람은, 진짜로 원해서 그런 말을 떠드는 게 아니야. 세상 모든 걸 다 놔버린 거지. 죽기 전에, 마지막 하나라도 의미 있는 걸 남기려고 그렇게 떠드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기적이 일어났다고 좋아해. 마침내 정의가 실현되었고 우리가 사람 하나를 천국으로 보냈다고 기뻐하지. 하지만 그들이 태워버리고 목 자른 사람은 그냥 평범한, 아주 보통의 사람이야.”
마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지독한 건 따로 있어. 이단심문관들이 가서 그런 의식을 중지시키면, 사람들은 실망하고는 해. 영주든 지역 사제든, 심지어 사형수 본인이든, 지켜보는 사람들이든. ‘에이. 불에 타는 걸 봐야 재미있는데.’라고 중얼거린 새끼까지 봤어.”
“세상에…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하기는. 냉큼 체포해서 들들 볶았지. 세상에 그딴 거 좋아하는 놈은 마귀 새끼밖에 없다. 남 매달리는 거 보고 행복해하는 걸 보니 네놈이야말로 마귀구나 하고 본보기 삼아 마을 입구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어. 귀가 빨개질 정도로 좋아하더라고. 행복했던 모양이야. 그렇게 남을 매다는 걸 좋아하는 놈이, 다른 사람들 앞에 본보기가 되었으니. 그거야말로 정의지.”
릴리는 새삼 감탄한 눈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젓기만 했다. 문득, 카인은 질문했다.
“어떻게 버텼나?”
“뭐?”
“어떻게 그 모든 일들을 버텨냈느냐고.”
“버티긴 뭘 버텨, 허우대 멀쩡한 사람이 헛소리를 다 하네.” 마리아는 카인의 가슴을 쿡 찔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네.”
“그러니까…” 카인은 말을 잇기 조금 힘들어했다. 릴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보고 있어서 더 그랬다.
“환멸 같은 게 느껴지지 않나? 그런 걸 보다 보면?”
마리아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혹시. 기대하니까 실망을 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
“알지. 이단심문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고.”
“『헛되고 헛되노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거룩한 책에도 그리 적혀 있지. 옛날 사람들도 세상엔 별 기대를 안 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죽고 나면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천국 이야기를 잔뜩 써 갈기지 않았을까?”
릴리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 그래요. 예쁜 아가씨. 왜죠?”
“저에게는 그 말을 반박할 논리가 없습니다. 다만…”
“다만?”
대답 대신 릴리는 마리아를 살짝 끌어안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마리아가 등을 팡팡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야, 야! 뭐 하는 거야!”
“듣고 있기엔 너무 슬픈 말이어서 그렇습니다.”
누가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망측한 일인 건 분명했기에, 카인은 두 여자를 슬쩍 가려주었다. 다행히 릴리는 필요 이상으로 오래 끌어안지는 않았다.
“우리 아가씨가, 휴. 사랑이 넘치네. 사랑주머니가 커서 그런가? 아무튼.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글쎄. 특별한 비법이 있는가 싶어서.” 카인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카인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리아가 릴리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꼭 황소 같아.”
릴리가 소처럼 크고 선한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황소, 라고 하면 대개는 무식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글쎄. 진짜 황소가 뜻하는 건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추진력이지. 그리고 황소는 일반적으로 뿔로 들이받아. 고개를 딱, 숙이고 앞만 보고 휙, 간 다음에 치켜올려 버리지. 좋은 기운이라는 뜻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릴리가 배시시 웃음 지었다. 마리아가 흐뭇한 듯 릴리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 * * * *
마사다 시장은, 식재료만 놓고 본다면 기대 이상이었다. 상주 인원 자체가 별로 없는 곳이라 공급도 수요도 별로 없었고, 그 때문에 식재료 하나만큼은 언제나 신선한 것을 가져다 놓는다고 했다.
덕분에 일행은 갓 잡은 어린 양의 고기와 신선한 새고기를 구할 수 있었다. 푸줏간 할머니는 카인이 내민 금화에 크게 기뻐했는데, 오늘은 일찍 집에 갈 수 있겠다며 콧노래까지 불렀다.
“행운은 원래 나누는 거랬어. 자, 이거라도 가져가시오.”
그러고선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내어주었다. 달콤한 향이 풍기는 걸 보니 꽤 맛 좋은 음식인 듯했다.
“씨가 있으니까 너무 꽉 씹지는 마시고. 또…” 할머니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들 안 보는 곳에서 드시오. 내가 줬다는 말은 하지 말고. 아시겠소?”
주머니를 움켜쥔 마리아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시장을 떠나자마자 마리아는 주머니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카인과 릴리에게 안의 내용물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크고 말린 대추 같았다.
“느이 북부에는 이런 거 없지?”
카인은 낄낄거리며 웃었지만, 릴리는 순진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마리아는 씨까지 씹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껍질째 씹으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대추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릴리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이거 뭡니까? 대추인 줄 알았는데 엄청 쫀득하고 달콤합니다!”
“아아, 그것의 이름은 말이지…”
“대추야자.”
카인이 냉큼 질러버렸다. 마리아가 얼굴을 팍팍 구겼다. 카인은 씨를 퉤, 하고 내뱉었다.
“계절이 좀 이르지 않아? 아직 초여름이잖아.”
“멍청아. 잘난 척하려면 끝까지 했어야지.”
마리아도 대추야자 하나를 우물거렸다.
“제국은 초여름이지만, 저쪽 서부는 지금 한여름인데다 자글자글 끓어오른다고. 대추야자 푹 익기엔 아주 좋은 계절이란 말이지. 그리고 이런 말, 제국에 충성하시는 두 분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솔직히 대추야자는 서부 이단자들 게 더 맛있어.”
릴리가 놀란 토끼 눈을 하며 입을 가렸다. 다행스럽게도 먹던 걸 뱉어내지는 않았다. 다만 속속들이 과육을 발라낸 씨를 얌전히 바닥에 던졌을 뿐이다.
“저. 그런 말씀 하셔도 괜찮은 것 맞습니까?”
“뭐가? 아아. 난 설마 우리 신께서 대추야자 국적 가지고 쪼잔하게 나에게 지옥불을 내릴 거라는 생각은 안 하거든. 난 어차피 존재 자체로 이미…”
아차 싶었는지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대추야자 하나를 더 집어 들어 씹었다. 카인은 화제를 돌리는 걸 도와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서부의 대추야자가 여기에서 버젓하게 유통되는 거지?”
“유통이 아니겠지.” 마리아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냥 대형 캐러밴 상인들이 자기들 먹을 거 가지고 다니는 거일걸. 대추야자는 간식으로도 훌륭하지만, 여행용 주식으로도 괜찮으니까. 달달한 거 싫어하는 사람 솔직히 없잖아? 하지만 꿀은 비싸고, 설탕은 더더욱 비싸지. 돈 받고 파는 것도 아닌데다가 호의 삼아 나눠주는 거니 별로 문제 될 건 없어.”
호통이 들린 건 뒤쪽에서였다.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말이외다!”
마리아는 용케도 인상을 구기는 것으로 끝냈다. 놀라 이를 앙다물었다면 씨를 깨물어버렸을 것이다. 걸음을 멈춘 일행의 앞에는 굉장히 꾀죄죄한 사내가 서 있었다.
피부는 늙은 나무만큼이나 거칠었고 옷으로 가린 부분이 안 가린 부분보다도 적었다. 하지만 워낙 지저분해서 음란하다는 생각보다는 가엾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쩌면 그런 인상은 벌어진 앞니, 벌판의 잡초만큼이나 듬성듬성 남은 머리카락 때문에 더 강화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만큼은. 눈만큼은 아니었다. 그 눈은 고통과 고행의 지혜를 담고 있었다. 사람의 목을 축여주는 물이 아니라 더 따갑게 하는, 그런 재가 섞여 들어간 우물 같은 기이함이 가득했다.
광인과 광신도의 눈이었다.
“신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르신?”
마리아는 평상복 차림이었고 어디에서도 이단심문관이라는 징표는 달고 있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삿된 것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모독이다, 그 뜻이오! 그 사악한 식물의 근원은 본디 서부의 돌불교의 땅에서 났던바, 그런 것을 철저히 배격하고 순수한 옛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이 타락하고 저주받은 제국이 바로 설 수 있는 길이란 말이오! 그러니, 당장 입에 든 걸 뱉어버리시오! 달콤함이 그대들을 죄악의 길로 잡아끄리니!”
잘못 걸렸군. 카인은 생각했다. 이제야 그 시장 할머니가 왜 아무 데서나 먹지 말라고 했던 것인지도 이해했다. 카인은 그냥 가자고 일행을 잡아끌려 했다.
노인의 어깨에 숯인지 잉크인지로 그려진 검은 불 문양을 보기 전까지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대추야자
산지 및 특징 : 원산지는 이집트이며, 열매는 길이 3~5cm의 원형 또는 긴 타원형이며 녹색에서 노란색을 거쳐 붉은색으로 익는다. 과육은 달며 영양분이 풍부하여 여행자에게는 중요한 식량으로 알려져 있다.
정말 맛있고 달콤합니다. 쫀득한 단맛에 식감도 좋고요.